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3장 5-13절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리라
히브리서의 기록에 따르면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히11:8).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면서 장막에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히11:9). 따라서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렀지만 하란에서부터 가나안까지 오는 과정, 그리고 가나안에서의 이동은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 행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데 있습니다(엡2:8). 즉 아브람이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행하는 모든 여정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체로서 아브람을 이끄시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나 기근으로 말미암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우선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주체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지, 믿음으로 행하던 아브람조차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요15:5).
감사한 것은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을 내놓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이 말씀하신 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끄신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지난주에는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 애굽에서 얻게 된 모든 소유까지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애굽 왕의 마음까지 붙드신 것을 말씀드렸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교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소유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그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경우 그런 점에서 이전에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곳을 찾았다는 것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왔다는 장소적 이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에서 자기 생각으로 갔던 아브람이 다시금 믿음으로 회복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 속에서 오늘 본문은 소유가 많아짐으로 아브람의 종과 조카 롯의 종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데, 5절 이하 7절을 보시면 그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처음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까지 가는 여정 속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순종으로 인해 좋지 못한 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를 더욱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의지했고, 그 결과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한 열매들을 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나올 때 애굽 왕이 준 것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결과 아브람의 소유가 굉장히 많아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셨던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소유의 풍성함을 주셨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다툼으로 인하여 아브람이 조카 롯과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왜 결별하도록 하시는가?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아버지인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소유를 많게 하셨습니다. 이제 애굽에서의 사건이 이후 더 많은 소유를 가지고 가나안 땅에 왔지만, 많아진 소유로 인해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롯과도 헤어지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아브람의 소유만이 아니라 조카인 롯에게도 많은 소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람의 종과 조카 롯의 종 사이에 다투게 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장소는 한정적이요, 소유는 많다보니 자기 소유를 먹이고 마시기 위해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과 롯은 친족입니다. 때문에 다투지 말라는 권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맡은 소유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충분한 풀과 물이 있어야 하는데, 풀과 물보다 소유가 더 많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겁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더더욱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땅 주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위협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유는 풍부해졌지만 그 소유로 인해 다른 사람이 아닌 친족끼리 다투고, 불편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오늘 본문 8절과 9절을 보시면 아브람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 사랑에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자기에게 유익되는 쪽으로 해결되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실제로 아브람의 경우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은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를 취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때도 아브람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와 나는 한 식구다. 때문에 네 목자나 내 목자나 다투게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네가 먼저 선택해서 가면 나는 다른 쪽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본문에 대하여 단순히 아브람의 성품이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롯은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애굽에서 배운 바 어떤 면에서는 결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학교에서 아브람은 자기 생각, 자기 꾀를 의지한 결과가 얼마나 부끄러움으로 결과 되었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람의 미덕이라는 말로 아브람을 높이고, 그의 공로인 것처럼 칭송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이 열매라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 대하여 은혜를 베푸시되, 그 은혜의 열매가 오늘 본문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우선 아브람은 롯에게 ‘한 친족’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롯이 아브람의 조카요, 이 땅에 이미 거주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과는 달리 좀 더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아브람은 어떤 결정을 하게 되는데, 9절에서처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함께 생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땅은 좁고 소유는 많기 때문에, 그래서 종들끼리 다툼이 있고, 이런 다툼은 결국 주인인 아브람과 조카인 롯에게까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던 겁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위치로 볼 때 그가 롯보다 먼저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정권을 누구에게 양보하느냐 하면 롯에게 양보하게 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런 양보의 정신 가운데는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물질이 다가 아니란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보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 세상의 것이 다가 아니란 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왔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극심한 기근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곳에서의 실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하여 선으로 대하셨는데,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아브람은 철저히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아브람의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한다는 말은 양보하겠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소출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아무리 불모지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능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 가운데 있게 하시며, 약한 자로 하여금 강하게 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외적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복을 내리시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카인 롯에게 모든 걸 양보할 수 있었던 겁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바로 이런 내용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모든 일에 양보해야 하는가? 무조건 양보해야 하는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양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보하고, 포기해야 할 때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이 세상의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소유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외적인 소유가 다가 아니란 정신이 성도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을 위하여 사는 자로 있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보하고, 포기해야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혹 환경이 좋지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도 가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함께 하지 않으면 가능한 것도 불가능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하나님 한분만 의지한다는 차원에서 우리는 양보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신앙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 불가능에서 가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 여기에 더 궁극적인 초점을 두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비록 외부적인 요인이 중요하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어떤 결과도 다 무가치하며, 외적인 요인은 별로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괜찮다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예가 요셉입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의 미움으로 종으로 팔려가게 되고, 종으로 있다가도 옥에 갇히게 되는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외적인 요인으로 보자면 그는 망한 인생입니다. 종으로 팔려가고, 종에서 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종으로 살지만, 비록 옥에 갇혀 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그의 인생이 형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느냐? 환경만 좋으면 어느 정도 결과에 있어서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삼천지교’(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해서 생겨난 고사성어인데, 우리는 다 여기가 최종 라인인줄 압니다. 심지어 맹자의 경우 “사람은 선한데 환경이 좋지 않아 악하게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만들어 주면 반드시 사람은 선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이트라는 심리학자는 비록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환경을 만들어주면 변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예전에 방송했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가져야 할 생각은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빠진 환경결정론이라면 외적으로 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빠진 인격체는 제대로 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전적인 부패성을 해결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이트의 그런 생각은 결국 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지고 말았다는 게 역사의 증거입니다. 우리 주변만 봐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쁜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다 나쁘게 자라는 것도 아니며,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다 괜찮게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환경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넘어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모든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느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함께 하신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결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느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소유 자체가 그의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환경이 그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그의 삶을 결정하시는 분이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의 삶이 비록 좋은 환경으로 나아가진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형통한 삶이라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내려갔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총이 있었을 때 물질의 소유, 외적인 소유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소유, 외적인 소유로 인해 다툼이 있게 되었을 때 형제라 할 수 있는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권을 줄 수 있었던 겁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선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그리고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리고 마지막절인 33절을 보면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내용들입니까? 사람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내가 먼저 결정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나중에 선택한다고 해서 항상 나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내가 먼저 선택할 때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롯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중이 좋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라는 것을 항상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에 달린 문제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선택권을 줬을 때,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면 롯이 어디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 보면 롯의 시각에 대한 문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의 경우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고,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곧장 나오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본 것은 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도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조만간 멸하실 땅이 지금 롯이 선택한 땅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애굽 땅이라 함은 이미 아브람이 지금의 땅으로 오기 이전에 잠시 기근을 피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입니다. 비록 거짓으로 인하여 교훈은 받았지만 어쨌든 그곳에서 나올 때 소유의 풍부, 많은 가축 등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얼마나 풍족한 땅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건 비록 아담과 하와 외에는 누구도 여호와의 동산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런 내용을 알려주심으로 전승이 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롯이 바라본 이 소돔 땅이 애굽과 같고, 말로만 듣던 에덴 동산과 같다는 것은 그만큼 풍족한 땅이요, 가장 완벽한 땅, 가장 아름다운 땅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아름다움, 외적으로 완벽하고 풍족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은 어떠냐? 12절과 13절을 보시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결국 롯의 시각은 철저히 외적인 것, 이 땅에 속한 것들만 봤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소유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결별하기 전 항상 아브람과 함께 하였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한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람이 애굽으로부터 와서 다시금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할 때 롯이 없었겠습니까? 롯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롯과 관련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2:6-8) 롯에 대하여 ‘의로운 롯’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거짓되게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시각은 아브람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던 겁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름답다고 하는 곳, 세상적으로 볼 때 좋다고 할 만한 곳을 선택했던 겁니다.
여러분, 성도는 보이는 것이 우리의 결정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롯은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좋건, 아니면 환경이 나쁘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어떠하든지 상관없다는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의 기준이나 하나님의 시각을 가졌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그의 판단 기준은 지금 보이는 것, 지금 당장 눈 앞에 이익이 되는 것, 거기에만 판단 기준이 있었습니다. 외적인 것만 봤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우리도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평안을 얻고, 그렇지 못할 때는 많은 환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런 논리는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어떤 논리냐? 평안이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 형편이 좋고, 지금 내 형편에 문제가 없고,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나 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러면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순종했는데도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순종했는데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당장 주일 다음 날이 시험인데, 주일을 지킨다는 정신 때문에 토요일까지 열심히 하다가 주일날 정작 공부 안하면 월요일 시험 반드시는 아니지만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순종한다고 해서 그 다음이 다 잘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잘되느냐, 잘 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요, 그 명령을 지키느냐, 아니 지키느냐의 문제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시각이 머무느냐 하면 외적인 것, 세상적인 것에만 시각이 머문다는 데 신앙의 연약함, 신앙의 나약함이 있습니다. 물질이 없으면 물질 때문에 시험이요, 사람과의 갈등이 있으면 사람과의 갈등 때문에 시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사실은 이런 외적인 것이 어떠하든 네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복이라 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이 좀 없어도 주신만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줄 알고 자족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비록 사람과의 갈등이 있어도 모든 사람을 주께 하듯 하라 하셨기에 그런 갈등 속에서도 주를 대하듯 하는 마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면 마치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고, 당하는 것 같고, 뭔가 남긴 것이 없는 듯 느껴지는 극히 세상적 분위기에 젖어 있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셔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는가? 그것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애굽과 같고, 여호와의 동산처럼 좋아 보이는 곳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땅을 멸하시려고 하는가? 13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들이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물을 때 일차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죄인가, 아닌가? 죄의 방향인가, 아닌가?”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아무도 죄와 동떨어져 살 수 없고,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죄를 계속해서 짓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다름은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어딜 가나 죄의 영향 아래 있고, 실제로 죄에 물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결정해야 되는 일이 있다면 그 결정이 죄악 된 길로 가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월급은 많은데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직장과 월급은 적지만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 두 군데서 오라고 한다면 가장 기본적으로는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가야 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 명령 자체를 어기는 것은 죄입니다.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하는 것은 분명 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뜻 가운데 분명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결혼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섭리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걸 잘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이 혹은 청년들 스스로가 믿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걸 조심할 뿐 아니라, 아예 그런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적지 않은 청년들이 신앙은 뒷전이요, 다 겉치레로 뭘 재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을 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은 없지만 내가 말하면 뭐든 다 들어줄 만큼 나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매우 착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믿음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무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봉독으로 사사기 2장 부분을 읽었는데, 거기에 정확하게 이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삿2:2-3).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면 감사하지만, 가시로 올무로 사용하실 수도 있는 겁니다. 롯처럼 소돔이 애굽 같고, 에덴 동산 같아 보이니까 보기 좋은 대로 결정하는 것이 가시요, 올무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롯도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소돔의 분위기 속에서는 고통을 당했던 겁니다. 함께 어울려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날마나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마음이 상하고 고통을 당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나올 수는 없었는데, 어쩌면 외적인 조건 때문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히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성형수술의 성행, 과도한 다이어트 등 이런 사회풍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오늘 시대 뿐 아니라 우리 부모 세대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학벌로 따지고, 지역으로 따지고, 가문으로 따지는 등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고자 하는 정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정신을 따른 결과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실제로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 있었고, 그 문제 때문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절 이하를 보시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2:1-4)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교회 안에서조차 있는 것입니다. 외모로 판단하고,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다 롯의 정신과 다르지 않는 정신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9절도 보시면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냐 하면 결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의 형편으로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소위 차별금지법처럼 죄악된 것까지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죄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죄악된 것이 아니라, 부한 자와 빈한 자와 같은 그런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외모로 판단하고, 그의 형편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라면 롯의 정신과 다를 바 없는 삶일 것입니다. 외형만 좋으면 됐지 무슨 죄를 짓든, 무슨 죄악을 도모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정신인 겁니다. 심지어 성도가 이런 모습이고, 교회에 이러한 사람이 많다면 그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는데, 전혀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부르셨다면 우리가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다 죄인이요, 때문에 우리를 받아주실 수 있는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 우리를 부르시고, 이곳에 앉히셨다는 건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은혜요, 긍휼과 사랑 외에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건 결코 성경의 방향이 아닌 겁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롯처럼 외형을 보고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형으로 판단하지 않으셨기에 우리 역시 외형, 외모로 판단하는 모든 원리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라 오직 말씀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결정이 죄의 방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고, 또 결정하는 그 시점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철저히 주님께 아뢸 수밖에 없는 자로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무엇을 선택할 때 뚜렷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분별할 수 있다면 결코 죄나 죄의 방향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버릴 줄 아셔야 합니다. 더불어 권면 드리기는 여러분의 외형보다 내면을 더욱 가꾸어 하나님 기뻐하시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시각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왜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으로 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롯의 경우 세상을 보았습니다. 외형을 보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정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상의 것은 좀 양보하고,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지만, 떡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떡이 아니라 말씀 먹고 사는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명하고 계신 겁니다(고전10:31). 즉 여러분의 모든 결정 기준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결정해야지, 내 마음대로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