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세기

190804설교 / 창세기13장14-18절 / 보이는땅을너와네자손에게주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8.04|조회수861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314-18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복을 주고자 하신 것은 단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람을 택하사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의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아브람을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이 되게 하신 복입니다(1:4-5 참조). 이 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브람을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큰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혈통과 관련된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의 내용이 증거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칭해지는 모든 백성들, 즉 영적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 즉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정착하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의 증거는 아브람과 더불어 이삭, 야곱이 마치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장막에 거했다고 말씀합니다(11:9). 그런데 왜 그런 모습으로 있었는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11:10). 그리고 그 성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다고 밝힙니다(11:16).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어디를 바라보도록 하셨는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도록 하셨던 겁니다.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착하지 않았을 때는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보게 하셨고, 정착했을 때는 가나안 땅만 바라보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전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기게도 하시고 때로는 어려운 일도 당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눈으로 보이는 가나안 땅이 그들의 모든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이 아닙니다. 외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외적인 복도 주셨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 했지만 도중에 하란에 머물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외적인 복을 더하셨습니다. 심지어 애굽에서 믿음과 상관없는 모습을 보일 때조차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아내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더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람을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받고, 이 세상에서도 외적인 복을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잘해도 복을 받고, 못해도 복을 받고, 얼마나 좋은가! 성경에 보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28:6), 아브람이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러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약속, 즉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그 명령을 이루시기 위해서 외적인 복을 더하셨던 겁니다. 아브람만이 아니라 롯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복을 주셨는데, 그 결과 그들의 소유가 많음으로 함께 동거하는 데 불편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종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별하게 되었는데, 롯이 선택한 곳은 어디인가? 쉽게 말하면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소돔 땅입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이 많은 곳(벧후2:7), 그래서 하나님께서 곧 심판을 행하실 곳, 그러나 심판하기 전이었던 고로 마치 에덴 동산과 같고 애굽과 같았던 곳, 바로 그곳을 선택하여 갔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롯의 선택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더하시는 내용입니다. 14절을 먼저 보시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베드로후서 2에 의하면 롯도 의로운 사람입니다(벧후2:8). 창세기 13장까지의 내용, 그리고 이후 내용을 보면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열매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다시 말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까지 함께 왔을 때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그도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롯과의 이별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약속의 말씀을 하신 대상은 아브람이었고, 그를 통해 이루실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롯과 결별하게 하시면서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칼빈롯과 이별한 아브람을 생각하사 위로 차원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슬픔을 경감시키고 치료하는 약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전에 봤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 있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있었지만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은 분명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위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에서 의인으로 삼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담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내용을 무엇을 통해 주시는가?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십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들어가자면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에 보면 성경이 말하는 위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위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셨다는 것, 그래서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위로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신 은혜를 거두시지 않는 것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행실을 따라 은혜를 유지하시거나 거두신다면 결국 우리는 그 은혜를 유지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은혜를 베푸시기로 하셨다면 베푸신 은혜를 거두시지 않습니다.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아브람이 애굽에서 한 실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은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산에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위해서 아내를 내어줬다는 것은 굉장히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는 그런 실수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했다고 해서 버리시느냐? 버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친히 역사하시면서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말씀을 보면 역사적으로 볼 때 더 심각한 실수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저버리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실수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죄악된 것들을 내놓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바 그 말씀에 대하여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없는 위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라면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위로, 그것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와서, 아브람의 경우 롯과는 한 친족입니다. 혈연에서도 그렇지만, 베드로후서에 근거하자면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아브람과 더불어 롯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루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인 것처럼, 에서가 아니라 야곱인 것처럼, 단지 육신적인 의미에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롯 역시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할 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으로 볼 때 롯의 자녀가 아닌 아브람의 자녀를 통해 약속하신 유업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서 아브람으로부터 롯을 떨어뜨리신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롯을 이별하게 하셨고, 이별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다시금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셨던 약속을 재차, 그러나 좀 더 확장해서 말씀하시는데, 우선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처음 말씀하실 때는 전혀 알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누가 사는지도 알지 못했고, 어떤 땅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어 가나안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말씀하셨을 때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멈췄습니다. 그러나 그 하란에서 다시금 말씀하여 가나안 땅에까지 오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명하셨지만 그 명령을 이룬 이가 누군가 하면 하나님이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이 가나안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7). 그러나 성경 기록상에서는 곧바로 극심한 기근이 와서 가나안을 떠나야 했습니다. 바로 그런 아브람을 다시금 이끌어 가나안까지 오게 하신 이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과정 이후 창세기 13장에서는 롯과 헤어지게 하시면서 그 땅을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러나 바라볼 수는 있을지언정 가나안이 아브람의 소유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15절을 보시면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세기 127절에서 말씀하셨던 바를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너의 소유로 있지 못하지만, 그리고 히브리서의 증거에 의하면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브람, 이삭, 야곱의 때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반드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의하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게 되는데,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즉 지금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 약속하신 바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믿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14절과 15절의 관계를 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14절의 경우 롯과 헤어지고 난 뒤 가나안 땅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가라고 명하신 가나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처음 명령하실 때부터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람은 곧바로 간 것이 아니라 가다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만 인간은 그 명령을 온전함으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인간이 온전하게 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율법은 모든 것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한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2:10). 그런 율법을 어떻게 인간이 온전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아브람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란에 머물렀지만, 바로 그 하란에서 동일한 말씀을 하시고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까지 오게 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14절에서는 바로 그 가나안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15절에서 약속하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것입니다.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약속 하신 바 역시 친히 이룰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여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가깝게는 애굽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도 기억하게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이 아닙니다. 불순종입니다. 자신의 생각이요, 자신의 꾀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안전하게, 나아가 풍성하게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약속하시는 바에 대하여 이루실 수 없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 여기서 영원히 이를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 그 말씀의 의도, 그리고 그 말씀이 성경 전체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영원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즉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가야 할 영원한 땅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원을 말할 때는 문자 그대로 영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어느 시점까지를 기준으로 해서 영원을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칼빈가나안 땅을 영원히 약속하신다고 할 때 단순히 영구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그 기간까지 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다고 할 때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여전히 약속의 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를 해석하고 있는 히브리서를 통해서도 분명히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부분인데, 히브리서 118절에서 10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인 야곱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살면서도 마치 이방의 땅에 있는 것처럼 거류하는 자로 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약속의 땅이지만 문자적인 의미에서 영원토록 그 땅에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살지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영원히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만나를 먹이시지만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도록 하기 위해서란 말씀과 같습니다. 가나안을 주시고 그곳을 바라보도록 하시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어딜 바라보도록 하시느냐? 지상의 땅이 아닙니다. 영원한 땅입니다. 그 땅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때문에 신약 백성인 우리는 구약처럼 외적인 것을 복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더더욱 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을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브람을 보라. 영적인 복 외에 물질적인 복도 받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욕심을 나타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은 유아 교회를 향한 방식입니다. 사탕을 주면서 순종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사탕이 목적이 아니라,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탕을 주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분명한 말씀을 통해 무엇이 복인지를 확인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지상의 복이 아니라 좀 더 분명히 말씀하시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면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16절과 17절을 통해서도 계속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5절에서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자손에게 준다고 할 때 네 자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땅의 티끌 같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람에게 자손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심지어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의하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끝까지 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창세기 15장에서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16장에서는 너무나도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바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만큼 치명적인 실수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의 역사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작정과 섭리를 말한다고 해서 인간의 실수와 죄악을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질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지만 그 믿음이 항상 동일하게 유지가 되는가? 그리고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 항상 자라남으로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약해지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는 등 항상 자라남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믿음을 말하기 이전에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즉 믿음이 있다가도 믿음이 떨어질 때 다시금 말씀으로 그의 마음을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4절과 5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그리고 로마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6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스마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때 나이가 86세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99세 때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데, 창세기 171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7:1-8) 그러면서 행하라고 하신 것이 할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다른 씨를 낳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표현한 것처럼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잘라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요, 더불어 아브람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회상시키며 확인하게 하는 표인 것입니다(1559, 4142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연약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등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우리를 그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일으키시고, 약속하신 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이 말씀, 그것도 오늘날 우리 시대는 계시로서의 말씀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믿음을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통틀어 66권의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완성된 이 말씀이면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나아가 믿음을 따른 행실을 위해서도 충분한 것입니다.

다만 말씀의 불충분성을 말할 수도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말씀은 있지만 그 말씀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특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때문에 그런 전제로 우리는 말씀의 충분성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믿음을 위하여 말씀을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것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히브리서가 증거 하는 것처럼 아브람의 경우 가나안을 소유로 가지는 것을 자기 때에 이루어지지 않을 내용으로 있습니다. 일부 가지긴 하겠지만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는 한 참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이란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가운데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단련하시고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1:3), 그리고 인내로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겁니다(5:4).

아브람에게 그렇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현실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처럼 거짓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연약하여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믿음을 더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세우십니다. 그러나 또 넘어집니다. 일어나지 못해 허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믿음의 시련을 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인내를 만들어 내시고, 또한 인내로 소망을 가지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못남, 어리석음 등이 반복되고 다시금 일어날 때 우리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소망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한 도성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예배하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여드렸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그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약속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여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왜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의 유익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이 세상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있다고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높여드리면서 그분을 향해서만 우리의 두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눈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연약함으로 한 눈을 팔 수 있습니다. 곁눈질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1절과 7, 그리고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면 동일한 말씀의 내용이지만 1절의 경우 전혀 확인되지 않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와서 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되 영원히 이를 것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말씀이 더 명확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명확해지면 명확해질수록 분명 우리의 믿음은 좀 더 견고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리에셀, 이스마엘이라는 실수는 견고해지기보다는 더 큰 실수가 자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악한 본성은 그만큼 뿌리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어디까지 이끄시느냐? 거룩하고 흠이 없게까지 만드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가 주실 부활을 바라보면서 납득이 안 되더라도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려고까지 하는 자리까지 가게 만드십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 속에 신앙의 훈련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됨, 연약함 등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15:5b)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역으로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 가운데 서도록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안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예배하며 영화롭게 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