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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0908설교 / 창세기16장1-6절 / 아브람이사래의말을들으니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9.08|조회수83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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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1-6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시면서 네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1-2). 그러나 큰 민족은커녕 자식 한 명도 없는 것이 아브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자식이 없으니 집에서 길린 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 약속하신 바를 이뤄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시면서 네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창세기 15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할 때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 달리 말하면 주신 것처럼 하신 것이 아니라, 주셔서 아브람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주셨다는 차원에서 그 믿음은 아브람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믿음은 결코 거짓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입니다. 의로 여겨 주신다고까지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거짓된 믿음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참된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온전하고 완전한 믿음이냐?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믿음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믿음을 저버린 것처럼 보이는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아브람과 관련해서도 생각해 보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때 아브람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인 사래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이를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불임의 상태였습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으나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애굽에서 아브람이 아닌 애굽 왕의 아내가 될 뻔한 일에서 건져주신 분이십니다. 롯과의 결별 이후 전쟁을 통하여 롯이 사로잡혀 가게 되었을 때 아브람으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아 오게 하신 분이십니다. 사래는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아브람만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래 역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속하신 바의 성취가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조급함이 찾아오면서 그것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완전히 불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에서도 그렇지만 어떻게 하든지 자녀를 가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담겨져 있는 정당한 방법이 아닌,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다는 데 있습니다. 즉 본래 하나님의 뜻은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약속의 자녀를 출산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경우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안 되니까 자기 몸에서 나온 씨가 아니라 집에서 길린 사람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창세기 16장은 사래로부터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믿음 안에서 기대와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소망은 시간이라는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출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져갔고, 그 결과 하나님이 본래 가지고 계셨던 뜻을 기다리기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아브람의 아내로 들여 그를 통해 약속의 자녀를 낳고자 한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안 된다면 여종을 통해 자녀를 낳으면 아브람의 씨가 유지되기 때문에, 그리고 여종을 통해 낳은 자녀는 주인의 아들로 칭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실행하게 되는데, 2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분명 드러나 있는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태를 닫으셨던 것이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문제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기다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께서 출산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유심히 살펴봐야 될 부분은 사래가 아브람에게 어떻게 말하느냐?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한편으로는 자녀를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자신도 모릅니다.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한다는 것은 자녀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 속에서 지금 사래는 어느 정도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서 하갈을 취하도록 하는 면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이런 방법을 통해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자기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칼빈은 본문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향유하려는 목적에 사로잡혀서 그것만 집착하다가 그만 그분의 말씀을 조급하게 떠나버리므로 그런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사태가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자연의 합법적인 질서를 떠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래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법을 떠나지 않는 방식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사래는 약속을 이룬다는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모세 시대입니다. 아브람 시대보다 400년 후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록되지 않는 율법, 즉 양심의 법을 그에게 심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자연의 합법적인 질서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214절과 15절에 보면 이것을 잘 증거 해 줍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따라서 지금 사래의 계획과 실행은 그 자체가 양심의 법을 어기는 짓입니다. 오직 두 사람에게 약정된 부부의 침상을 더럽히고 결혼의 법칙을 전복시킨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2절은 아브람의 어리석음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내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그저 따를 뿐,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방법에 대하여 옳지 못하다고 해야 하지만, 그도 역시 아내인 사래의 말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따라가더란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 당시가 일부다처제가 성행했던 모습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에 젖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지가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어도 죄는 죄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믿음에 얼마나 많은 결점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그 믿음이 전혀 자라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믿었지만 점과 흠이 있습니다. 믿었지만 거기에 결점이 있습니다. 믿었지만 연약함과 무지함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라가야 하는 것이고, 성경의 표현을 따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런 아브람의 모습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느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본질에 대해서는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굳건히 붙들고 있습니다. 약속 자체를 아예 불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다른 방법을 취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취할 때 여러 가지 핑계를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사래로 하여금 출산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결과 사래가 먼저 계획을 했고, 남편인 아브람도 찬동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된다.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지옥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놓고도 믿음을 공로라는 식으로 생각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영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인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인가? 많은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고안해 낸 방식, 개혁자들이 말한 자의적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혹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몰랐습니다.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가 죄에 대하여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무지가 핑계의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지일지라도 죄는 죄입니다. 때문에 무지한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지한 목회자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 현장은 더더욱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법으로 무엇을 명하셨는지 신학교의 교수들은 잘 가르쳐야 하고, 그것을 배운 목회자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있다고 할 때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 인간의 전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제가 신학교와 교회를 연결시키고 있지만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성경을 따라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고백한 신앙고백서와 같은 내용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배 모범과 교회 정치와 같은 내용들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른다는 것으로 핑계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내셨지만 인간의 무지함이 성경을 가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고, 그 결과 성경의 객관성만큼의 객관성은 아니지만 성경해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의 내용들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들을 잘 살펴 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한다고 할 때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경배와 찬양의 방식은 동원될 수 없습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형상의 문제, 그림이든 아니면 어떤 상이든 십계명을 해석하는 것 안에서 거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지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사래의 계획과 아브람이 거기에 찬동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들의 방식에 응답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우선 3절은 하갈을 통해 약속의 자녀를 낳을 계획이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째 되는 해임을 밝혀줍니다. 창세기 16장 마지막 절인 16절에 보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입니다. 이스마엘을 임신할 때가 85세로 생각해 보면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올 때가 75세입니다. 10년 동안 가나안 땅에 살면서 약속의 자녀를 기다린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래 기다렸다고도 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그것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나 그 때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섭리 속에서 볼 때 마치 미루시고 지금 당장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하시는 것은 많은 부분 인내하면서 기다릴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뜻을 알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의 뜻밖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기에 있는데, 그 일하심보다 앞서 갈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하갈을 으로 줬다고 되어 있는데, 본래 뜻은 아내로 줬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임신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약속의 자녀를 낳는 것이라면 하나님 편에서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문제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사래의 믿음에 결점이 있기 때문에 엉뚱한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으시면 됩니다.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내려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임신하게 하십니다. 1615절에서는 아들을 낳게까지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4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하갈이 임신하였는데, 임신하고 난 뒤 그가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간의 잘못된 계획을 막으실 수도 있지만, 항상 그런 방식으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잘못된 계획을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그것이 곧 형벌이 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 죄이고, 그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실 때 임신하게 하심으로 하갈이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저들의 계획대로 되게 하시되 거기에 형벌을 있게 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형벌일 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분명 형벌이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대로 예배하지 않는 것이 이미 형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고, 외적으로도 성장하는 모습이 있다 보니 형벌을 형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하자면 임신했다는 겁니다. 창세기 16장 끝에 보면 아들을 낳게 되는데, 아들을 낳으니까 내 방식이 옳은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허락하신 방법이 아닌 모든 것은 형벌의 성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하지 않는 방법으로 했는데 어떻게 형벌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명기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13:1-3) 거짓 선지자라면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이루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루어진다는 거기에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럴지라도 그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루어진다, 이루어지지 않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복은 어디 있느냐? 시편 11절과 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악인들의 꾀가 아닙니다. 죄인들의 길이 아닙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가 복된 자입니다. 해석으로서 좀 더 덧붙이자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율법만을 따라 행하는 자, 그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사람의 꾀, 사람의 길, 사람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데 된다는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성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성장이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성장이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진노와 형벌이 있는가? 주를 향한 열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를 위한 헌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의 내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있다 할지라도 주께서 명하신 방법대로 하지 않을 경우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자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야 합니다. 인간의 것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은 점과 흠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연약함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결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결점을 다 막아주시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한번도 훼손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결점에 방해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에 방해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이루시되 처음부터 가지신 그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께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과 흠이 있는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는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매일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모습인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물론 믿습니다. 믿지만 잠시잠깐일 뿐 또 다시 의심하고 원망, 불평하는데 뭐 그리 대단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형벌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점과 흠, 결점,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막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들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분이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루어가십니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와서 5절을 보시면 여종인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방금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계획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만한 모습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벌로서 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호세아서에도 보면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므로 왕을 줬다는 말씀이 있는데(13:11), 분노로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속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래는 어떤가? 여종 하갈이 자신을 무시할 때 자신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말미암아 된 모든 일에 대하여 아브람을 탓합니다.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그런데 아브람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사래의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분명 맞지만, 이 모든 일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느냐? 사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때문에 아브람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래는 여종의 멸시로 말미암아 분이 나 있는 상태고, 그 분함을 맹목적으로 아브람에게 쏟아내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어떤 말까지 합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이름은 망령되게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요, 그분을 예배하고 경배하는데 어떻게 함부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성경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넌센스처럼 퀴즈를 내고 하는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지금 사래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하기 위해서 누구의 이름을 말하느냐? 하나님의 이름까지 말합니다. 거기에 경외심이라는 것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 변호를 위한 목적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속에서 사래를 보면 인내함보다는 성급함이 앞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심성 있게 대처하기보다는 매우 경솔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분명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편들어주실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기 편인 양 생각하고서 함부로 말하는데, 어떻게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자기 생각에 하나님은 내 편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신명기 29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고, 그 율법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밝혀져 있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과 여종에 대한 사래의 반응을 6절에서 언급하는데, 여기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우선 아브람의 경우 당신의 여종이 당신 수중에 있기 때문에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사래의 권유로 하갈을 아내로 맞이했고, 결국 저들 편에서 볼 때 약속의 자녀일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귀하게 대하도록 해야 될 텐데,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여기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종이 여주인을 멸시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래 입장에서 매우 큰 모욕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래의 권유로 하갈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본래 자신의 아내가 사래라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였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람이 사래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아브람의 겸손과 겸허함이 그의 대답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는데, 분명 임신을 했기 때문에 하갈을 편들 수 있는 동기를 가졌지만 아내인 사래 때문에 사래를 통해 주어진 아내를 포기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갈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포기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 안에서의 불화를 볼 때 뱃속에 아이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행한 결과가 심각한 형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브람의 반응에 힘입어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는데, 이런 자세 또한 결코 합당한 자세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심보는 결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사래 앞에서 도망하게 되는데, 먼저 멸시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사래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형벌이 어떤 면에서 가정의 불화로 나타나고 있다면 하갈의 멸시의 형벌이 사래의 학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형벌의 형벌이 끊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래를 통해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절 마지막에 언급하고 있는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는 부분을 좀 더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람 가정의 가장은 아브람이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가정,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는 하와입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하와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의 머리는 아담이었고, 맨 처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대표가 아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우리는 사래의 어리석음, 사래의 성급함, 사래의 경솔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야해야 할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람이 아내인 사래의 말을 들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래의 실수를 중도에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브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래의 실수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가장으로 있다고 할 때 좀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의미에서, 다시 말해 교훈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브람만인가? 사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의 말을 했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사기 말씀대로 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가장으로 있다고 할 때 그 가정을 주의 말씀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지셔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가정의 가장으로 세웠다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점과 흠이 있지만, 실수도 많이 하지만, 말씀으로 이끌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만이 아니라 부부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다 행하면서 주의 것이 자녀에게 심겨지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좀 더 확장하여 우리는 전 성경을 통해 분명 하나님의 크신 뜻이 이삭에 앞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하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낳게 하시는가? 그것을 통해 육신의 자녀가 누구인지, 약속의 자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21장으로 가시면 사라, 그때는 이미 이름을 사라로 바꾸었는데,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는데,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갈라디아서 429절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즉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예비하셨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1장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게 되는데, 갈라디아서는 이것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4:30)

그러므로 여러분, 본문을 통해 사래의 불신앙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아브람 역시 거기에 함께 참여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그들의 모습을 통해 교훈을 받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15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을 말했지만 그 믿음이 16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기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지만 점과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나 사래나 자기 본성대로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목적하신 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과정까지도 그분의 섭리로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교훈적인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아브람과 사래의 방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여기에 있습니다. 내 믿음 좋다, 내 믿음이 잘 났다, 내 믿음이 탁월하다가 아니라, 아브람과 사래처럼 우리의 믿음은 항상 점과 흠이 있지만, 우리의 믿음은 항상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어쩌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지만, 그래서 실수하고 또 실수하지만, 죄를 낳고 또 낳지만, 형벌의 끊임없는 역사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선한 뜻이 나타나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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