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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0922설교 / 창세기17장1-27절 / 나는전능한하나님이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9.23|조회수906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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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1-27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실 때부터, 좀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 말하자면 그가 영원 전에 작정하실 때부터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를 통해 낳게 되는 자를 약속의 자녀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약속의 형태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약속에 대하여 아브람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15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내용도 나올 정도입니다. 때문에 이후 아브람의 자세는 좀 다르게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창세기 16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나안 땅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사래 자신이 자녀를 갖지 못하자 사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여 하갈이라는 종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그런 사래의 말을 듣는 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래가 내 놓은 소견에 대하여 찬성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갈이 임신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저들의 불신앙에 기인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이 온전한 형태로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점과 흠이 있는 믿음이요, 연약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그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불신앙에 대하여 가정의 불화라는 형별을 주셨는데, 하갈의 경우 그가 임신하게 되자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멸시를 받은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하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찾아가 만나주셨고, 그에게 외적으로만 보자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바와 다를 바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갈이나 하갈을 통해 낳게 되는 이스마엘이나 성경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체를 따라난 자, 즉 긍휼의 그릇이 아니라 진노의 그릇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갈에게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와 우리의 구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육체를 따라 난 자조차 감찰하시는 분으로 있다면 약속의 자녀인 자기 백성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감찰하시는 분으로 있느냐 하는 것을 비교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더불어 그런 하갈을 사래 곁으로 보내신다는 것은 약속의 자녀로 있는 자가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보면서 그들과 같은 정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약속을 붙드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한 시련이라는 부분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즉 그런 시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린다면, 하갈 입장에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본 자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 섬기는 자로 있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하면서 누구도 하나님에 대하여 몰랐다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1:20 참조). 그렇다면 하갈의 경우는 더더욱 핑계할 수 없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직접적으로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자들 가운데 가라지가 여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말씀을 배척하는 자들로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스마엘을 낳고 난 뒤 대략 13년 정도 흐르고 난 후의 일을 기록합니다. 1절을 보시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616절에 보면 이스마엘을 낳을 때의 나이가 86세입니다. 그리고 99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13년 동안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드는 그 일에 있어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절의 비웃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전에는 그 말씀을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믿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고 난 뒤 13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오면서 더 이상 약속의 자녀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의 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으로는 약속의 자녀에 대한 소망은 사라졌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스마엘에 대한 만족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어떻게 말하는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3년 동안 아브람의 생애는 어떤 면에서 이스마엘을 보면서 산 삶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13년 이후 다시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쉽게 말하면 약속의 말씀에 대한 기대가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 자신은 얼마든지 약속하신 바를 이룰 수 있는 분이심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즉 지금 너의 상태는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방향으로 가 있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1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춰본다면 우리도 아브람, 사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있어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바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 앞에서 확고한 믿음 가운데 서 있는가? 그렇지 못합니다.

한 예로 신명기 83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있다면 우리는 그 말씀이 사실이요, 진실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83절은 무엇입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러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사는 자가 주의 백성이지만, 현실 앞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염려하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게 공중의 새를 보라고도 말씀하시고, 또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조차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면 하물며 내 백성이요, 내 자녀라고 칭하는 너희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1-32) 그런데 이런 말씀 앞에서도 우리는 들을 그때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현실 앞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결국 사래가 스스로 판단하여 옳다고 여기는 쪽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고, 또 거기에 찬성하면서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 앞에서 수없이 많은 타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고, 말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앞에서는 마치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알리십니다. 알리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 그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점과 흠이 있고, 연약함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고 또 주지 않으면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나타내시고 친히 말씀하신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한 모든 것이 틀렸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약속으로 말씀하신 바가 참되고 진실하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1절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를 통해 아이를 낳게 하고자 하시면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연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자녀가 낳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런 방식을 거슬러 일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러합니다. 즉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요,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놓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관련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전능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상 간의 모순을 일으키는 의미에서의 능력을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가 이삭일지라도 얼마든지 이스마엘로 바꾸실 수 있지 않은가라는 식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유기자로 정하셨을지라도 택자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작정하신 바를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이 뜻하시고 의지하신 바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반드시 그분의 의지를 근거로 해서 말해야 합니다. 시편 115 3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보다 높은 자로 계시며, 높은 자로서 우리와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만큼 능력이 많다, 한이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여기서 원하시는 모든 것은 그분의 의지, 그분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행하시되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의지에 따라 행하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능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 그분의 의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불변성을 생각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나타난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주시도록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숨겨진 의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다고 할 때 유기하신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알 수 있는 영역은 아닙니다. 때문에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혹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유기된 자일지라도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는 의미에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타내셨고, 나타내신 바를 통해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셨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해 주십시오!”라는 논리는 가지고 올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말씀하시면서 자신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실 때 역으로 인간의 무능함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전부터 약속해오던 말씀을 하시는데, 2절 이하 8절이 그것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우선 2절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언약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12:2), 큰 민족을 이루되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이다(13:16),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15:5)는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다시금 상기시키십니다.

특별이 2절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었다는 표현을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일방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쌍방이 맺는 형식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의미에서 일방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언약이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할 때 아브람 너의 행동은 마치 언약을 깨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있습니다. 내가 전능하지 않더냐? 너를 부를 때부터 지금까지 너의 하나님으로서 너를 지키고 보호하지 않더냐? 왜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있느냐?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시작해서 13, 15장에 걸쳐 말씀하신 동일한 언약의 내용을 다시금 말씀하시면서 상기시키십니다. 한 마디로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아브람은 엎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다만 17절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웃음, 18절에서 이스마엘에 대한 기대에 근거하자면 이렇게 엎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순종은 외적으로 엎드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까지도 따라와야 합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지만,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금 말씀하실 때 아브람 편에서는 경외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그의 말씀을 듣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네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치시는데, 그 뜻은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입니다. 당연히 여러 민족이라 함은 육적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 되어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에서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온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7절에서는 이 언약이 아브라함과만이 아니라, 네 대대 후손과 맺은 영원한 언약임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시는데, 판명성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좀 더 명확하게 언약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아브라함 너와만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너와 네 대대 후손과 맺은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여전히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염두 해 두고 있다는 것이고, 동일한 의미에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 즉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의 그릇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이 땅을 주겠다는 것이 8절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가나안 땅 자체를 본질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 자체와 관련해서 영원히라는 말을 쓸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한시적인 의미에서 영원히입니다. 특히 너와 네 자손에게 가나안 온 땅을 주신다고 되어 있지만, 창세기 15장에 근거하자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가나안 온 땅을 받은 자로 있지 못함을 알리십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가 되느냐?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 후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모세조차 가나안 땅을 소유하지 못하는 자로 있습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 자체를 본질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이 땅에 대하여 주실 것인데, 창세기 15장에서 언급하신 대로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400년 후에나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보이는 땅을 주시되, 하나님의 뜻은 보이는 땅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땅을 소망하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그 땅을 받지 못한 자로 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조차 실제로는 가나안 땅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땅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약속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기업이라고 할 때 본질적으로는 가나안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을 통해 더욱 더 소망해야 할 땅이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 이 내용인 것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앞선 내용 속에서도 말씀하셨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하심으로 무엇을 드러내시는가?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체를 따라 행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것 또한 상기시키는 것으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할례라는 외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각인시키시는데, 그 내용이 9절 이하 14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다음 주에 다시금 살필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할례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데, 한 마디로 말씀과 상관없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의 방식은 남자로 하여금 생식기의 포피를 베는 것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16장의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생식기의 포피를 벤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방식을 다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식을 다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만이 합당한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그 방식만이 합당하다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사래의 이름도 고쳐 부를 것을 명하시는데, 15절과 16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아브라함의 이름의 의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면, 사라의 이름의 의미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일을 이루시고자 하시는지 그들의 이름을 바꾸시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실 때마다 상기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방식대로 행하였지만 그것은 내 뜻이 아니란 것이요, 내 뜻은 하갈이 아니라 사라를 통해 여러 민족을 낳는 것이란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꿔 부르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브람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웃음이라는 자세는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을 낳고 난 뒤에는 말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으로 반응하고 있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스마엘을 낳기 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나 상속자로 삼겠다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도 여러 민족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 또한 약속하십니다. 20절을 보시면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긍휼의 그릇이냐? 아닙니다. 진노의 그릇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닌 여러 민족의 아버지, 여러 민족의 어머니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낳게 될 자식을 약속하시는데, 19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그리고 21절에 보시면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판명성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분명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할 때 이 뜻을 담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여기서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볼만한데, 그 뜻은 웃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상기시키는 이름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늘 이런 식의 자세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듯 하는 그런 자세로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변경하거나 포기하는 법이 있는가? 없으십니다. 없으시기에 17절과 18절처럼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조차 돌리시는데, 22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17절과 18절과 같은 반응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까지 바꾸시면서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17절과 18절과 같은 마음의 상태로 있다가 하나님 말씀을 받고 난 뒤 이후 말씀처럼 변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바르함의 인생을 잘 살펴보십시오. 15장에서는 다메섹 사람 엘레에셀, 16장에서는 이스마엘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마엘을 말한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 소견을 말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이 점과 흠이 있고,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할 것 같은데 변하지 않는 자세!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는 이러한 모습으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만 하시는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친히 이루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그 놀라운 사건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창세기 22장 이삭을 받치는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시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7장 전체를 살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1,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과 그 말씀이 실제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무능한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무능하다가 아니라, 철저히 무능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선한 것이 조금이라도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전능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나의 나 됨이 있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식을 버려야 하고, 인간적인 소견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와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수한 것들의 결과를 형벌로 놔두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수한 것이 실수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도록 놔두심으로 거기에 빠져 살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말씀하시는 바가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또 배우면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인간의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방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죄와 관련된 것들을 죽이면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그릇이요, 약속의 자녀가 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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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오하람 | 작성시간 19.09.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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