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7장 7-14절
할례, 언약의 표징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86세입니다. 그로부터 13년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데,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전능하신 분으로 알리실 만큼 아브라함 쪽에서는 전능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의 신앙이 완전함으로 있지 못하다는 것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큰 민족을 이뤄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100세 때나 되어서야 약속을 따라난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심지어 사라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만큼 임신할 확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말씀을 따라 갔던 것이고, 그 과정 가운데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게 되어 그들 스스로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하갈을 통한 자녀 계획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100세 때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그것을 알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이가 들고,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우리의 마땅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믿되,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과, 더불어 그 약속을 이뤄주시기까지 우리는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우리에게 밝혀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밝혀주지 않았지만 약속하셨다면 약속하신 바를 이뤄주시는 분이시고, 이뤄주실 때 그분이 뜻하셨다면 못하실 일이 없을 정도로 전능하시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훈적으로 생각해야 할 바라면, 우리의 실상은 아브람과 같은 자리에 있을 때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항상 그렇습니다.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에 점과 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는 무능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홀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선언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도 하시지만 명령이 있다고 해서 무능한 인간이 그 명령을 이룰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명령하신 분이 그 명령을 이뤄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통해 그 사실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 창세기 17장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1절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폈다면, 오늘은 그 가운데 할례라는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7절과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 지금 말씀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그의 대대 후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의 대대 후손이라고 할 때는 이스마엘과 같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라는 전제를 가집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유대민족이라는 혈통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보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해서 다 언약 백성은 아닌 것입니다. 육체가 아닌 약속을 따라 난 자, 그들이 언약 백성인 것입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후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할례의 경우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런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누가 받느냐? 언약 백성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집에 있는 모든 남자가 다 받습니다.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다 언약 백성이냐? 외적으로 보자면 언약 백성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언약 백성은 할례자 모두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그의 자손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언약의 핵심은 무엇인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이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과 함께 생각하자면 내가 전능한 하나님으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명했다면 그 명한 바를 내가 이루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런 언약의 내용을 외적 방식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육체에 새기신 것이 할례인데, 9절 이하 11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에 대해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일방적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언약을 지키라, 행하라는 말씀으로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말씀 앞에 지키고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명하시는 대로 행하되 열심으로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다하여 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명하시는 것이 곧 우리가 순종해야 할 내용으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 무엇을 빼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주께서 명하신 그대로 행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할례라는 것을 명하시는데, 할례란 여기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포피를 베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언약의 표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왜 할례를 명하시는가? 이것은 창세기 16장에 있었던 이스마엘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출산하지 못하자 사라는 여종인 하갈을 통해 자녀를 낳기 원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라의 생각, 그리고 거기에 동조한 아브라함의 찬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창세기 17장 1절 말씀으로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약을 다시금 상기시키시면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통해 무엇을 상기시키시느냐?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방식이라는 것을 상시키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피를 베라는 것은 네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방식을 잘라내야 한다,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없다는 것 또한 확인시키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이중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시는데, 칼빈의 설명으로 다시금 말씀드리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잘라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는 것과, 나아가 “할례는 아브라함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며 확인하는 표였다.”는 것입니다(기독교강요, 1559, 4권 14장 21).
그런데 이런 할례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행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의 생식기 포피를 베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는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럼 여자는 언약의 대상이 아닌가? 여자는 언약의 대상에서 제외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자들의 할례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605).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할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언약 자체가 아닙니다. 언약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해야 하지만 그런 징표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언약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가 구원의 표지 구원 자체는 아니란 것과 같습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언약 백성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할례는 언약의 징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할례는 받지 않지만, 그러나 언약 백성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에 할례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부패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시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자들도 깊이 생각해야 될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할례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내용까지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12절 이하 14절도 보시면 할례와 관련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한마디로 아브라함 안에 있는 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고 할례 자체는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표징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약을 배반한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배반한 일이기 때문에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만큼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언약의 표징이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상기시키는가? 인간의 허물과 죄악 됨을 보게 하시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성취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명하셨다는 그 명령의 권위만으로도 우리는 할례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언약이 있고 언약의 표징이 있습니다. 언약의 대상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이 바로 언약 백성입니다.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이스마엘과 같은 자를 언약 백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표징과 관련해서는 이스마엘조차 행해야 할 자로 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17장 26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함께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도 언약 백성이라 할 수 없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를 따라 난 자이지,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언약의 표징을 받는 자로 있지만 언약을 표징을 받는다고 해서 그가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할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할례 받은 모든 자가 깨달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깨달을 수 있는 것,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믿는 자로 있는 것은 오로지 약속의 자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만 이런 내용으로서 은총을 베푸십니다. 즉 할례의 유익은 할례 받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만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할례가 오늘날도 유효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해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시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담처럼 있던 것이 허물어졌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읽어드리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둘이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담처럼 막아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담을 허신 것입니다. 할례가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모든 담을 허신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할례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을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대체가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세례입니다.
이것에 관하여는 골로새서 2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우선 11절에서는 할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행하던 할례가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표현은 할례이지만 구약에서 행하던 할례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는 세례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할례를 행했지만, 신약에서는 손으로 하는 할례가 아니라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즉 세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골로새서의 말씀을 살핀 적이 있지만 지금 바울이 이 내용을 쓰고 있는 것은 당시 거짓 교사들이 구약에서처럼 육적인 할례를, 손을 행하는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할례를 행해야지만 참된 구원을 맛볼 수 있다, 혹은 그렇게 해야지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거짓 교훈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이하 10절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11절과 12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진 자들은 더 이상 그런 육적인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구약의 할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성취된 것을 여전히 붙드는 것은 뭐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성하신 것을 파괴하는 것이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손으로 행하는 할례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할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데, 11절에 보면 육의 몸을 벗는 것으로 말합니다. 부패한 우리의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할례, 다시 말해 세례의 의미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지 않습니까? 포피를 베어라. 왜 베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부패되고 죄악된 것을 버리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에 대하여 죽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형식은 다르지만 할례에서 세례로 대체될 때 하나님께서는 할례의 의미가 유지되도록 하시면서 세례로 대체를 하셨던 것입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할례나 세례나 동일한 뜻을 가르쳐준다는 의미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육의 몸을 벗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스마엘의 경우 할례를 받았지만 그는 육의 몸을 벗은 것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로서 육체를 따라 살 뿐입니다. 동일하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육의 몸을 벗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구원의 표일 뿐 구원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1) 세례 자체가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의 유익은 우리 마음을 자극해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그렇다면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의 유익은 무엇인가? 구약 백성들의 경우 그들 몸에 새기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죄악된 것은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교훈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는 비록 할례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통해 할례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이 할례를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내용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구약 당시 할례를 받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도 동일한 내용으로 적용되었던 것처럼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교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언약 백성이라면 언약 백성으로서 죄를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만 죽이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도 가져야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성도는 어떤 자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청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라,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라는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산 자로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란 겁니다.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고 할 때 이 일을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무능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루시되 누구를 통해서 이루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십니다. 구약의 경우 약속하신 바를 통해 그리스도를 내다보도록 하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약속의 자녀라 할 때 이삭을 염두 해 둔 것은 사실이지만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보면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니까 약속의 성취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누구를 통해 성취가 되느냐?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완전을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이삭, 그리스도 없는 야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할 때 그 유효성은 그리스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약속의 표징인 할례 역시 누구를 보도록 하는 것이냐?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의 죄악 된 행동처럼 우리의 죄악 된 행동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부패의 결과로 나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데, 그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할례를 어떻게 소홀히 행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동일하게 세례 역시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의 표라는 이유로 어떻게 소홀하게 여겨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의 교회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교회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제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제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로서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것은 유아 세례와 관련해서인데, 할례와 세례가 동일한 뜻을 가진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유아 세례의 정당성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대상은 아브라함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할례를 행할 때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창17:12). 그래서 이스마엘의 경우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의 나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그때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의 경우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유아세례와 관련해 재세례파가 말하는 것처럼 줄 수 없는 문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데도 아무렇게나 세례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바로 그런 제자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복음의 도리를 믿지도 않는데 아무렇게는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회개와 믿음을 고백하는 자가 아니면 세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은 너와 너의 대대 후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때 후손은 엄밀하게 말하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아니라, 약속을 따라 난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감춰져 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시는 자, 그들이 언약의 대상입니다. 동시에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명하실 때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입니다. 그 안에는 약속을 따라 난 자, 육체를 따라 난 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 밖에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가 성경의 명하신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세례를 베풀 수 없지만, 가시적 교회 안에 있다고 한다면 난 지 팔일 만한 할례를 받은 것처럼 유아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유아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전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특히 유아로서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더더욱 드러내는 것이 유아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증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할례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오늘날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할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다시금 살피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떠한가? 부패된 본성이다. 부패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얼마나 지독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 하나라도 내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런 우리에게 언약을 상기시키시면서 할례를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가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너희가 아니라 내가 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죽음에서 생명을 내놓으실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겁니다. 심지어 좀 괜찮을 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육신의 자녀를 낳고 난 뒤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13년이나 이스마엘을 낳고 기르면서 그를 약속의 자녀로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너는 무능하지만 전능한 내가 명령한 그것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약속의 표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내 소견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것을 빼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 그대로 순종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할례를 명하셨다면 명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할례를 폐하셨다면 우리가 지킬 이유는 없습니다. 할례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의식법이 폐지가 되었다면 그것 또한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의식법 안에는 무엇까지 있는가? 다윗의 규례까지 있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규례도 우리는 지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참된 예배의 본질로서 말씀하신 것들, 도덕법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땅한 바를 내 소견, 내 의견, 혹은 오늘날의 분위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바꿔서는 안 됩니다. 명령하신 바가 순종의 내용으로, 명령하신 바가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바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