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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0602설교 / 창세기4장25절-5장20절 / 아담의형상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6.03|조회수42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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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25-520

아담의 형상

 

창세기 3장에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첫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불순종하게 되고, 그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야 만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는 그런 죄가 어떤 것인지를 더욱 드러내주는 한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바로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록된 율법으로서는 모세 시대에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전에도 동일한 율법, 다시 말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양심의 법으로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양심을 통해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형으로서 아우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그 양심이 증거 하는 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란 하나님 사랑이 파괴된 이상 이웃에 대하여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가인과 아벨 사건, 즉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이웃과의 관계 역시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개하는 것이 가인의 자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가인의 자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죄악이 그만큼 관영했다는 것이요, 특히 라멕을 통해서는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 자신에게 해를 끼치면 반드시 보복하되, 생명을 앗아가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강퍅한 마음임을 성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바로 이러하다, 다시 말해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부패한 심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죄악의 관영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먼저 알아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가 나오고 가인과 아벨,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셋과 에노스가 나온다고 해서 그들만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기록방식의 특성상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면(1:28) 그 말씀대로 많은 자녀들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이 셋을 나을 때가 130세입니다. 그리고 셋을 나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말씀합니다(5:3). 단순히 셋만 자녀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 셋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 나오는 아담의 계보라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나 거기에 기록된 사람만이 아니라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여기 보면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 그리고 가인의 족보라 할 수 있는 앞선 내용의 경우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의 족보, 다시 말해 유기자로서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인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특히 아담의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족보와 대조적으로 가인의 족보를 먼저 언급한다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인의 자손들을 열거하다가 그 족보 속에서 라멕의 죄악 된 모습만 언급할 뿐입니다. 회개의 내용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당당하게 말할 뿐입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셋의 경우는 다릅니다.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할 때 그 씨가 셋입니다. 아벨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할 때 그리스도 없이 받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도 역시 아벨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언급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기자로서 가인과는 대조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심지어 셋을 이어 언급하고 있는 인물은 에노스입니다. 에노스 때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처럼(10:13) 구원의 대상,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 안에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한다는 의미로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있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그의 주석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체적인 예배를 함의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아벨이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처럼 에노스 역시 그러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느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에노스 때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이전보다 믿음이 더해짐으로 분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메튜 헨리). 셋도 분명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셋의 자녀인 에노스가 나게 됨으로 이제는 좀 더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칼빈).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할 때 이런 내용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에노스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비로소불렀습니다. 마치 꺼져 가는 등불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에게만 하나님이 기억 된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시대가 부패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낯선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셋과 에노스는 가인의 족보, 다시 말해 유기자와는 달리 하나님 자신의 교회로 부르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자녀들을 통해 죄의 관영함을 보게 하시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여 아벨처럼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참되게 부르면서 예배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으로 넘어오시면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아담 그리고 셋, 에노스란 이름이 창세기 4장 말미에서 나오고, 이어 아담의 계보가 나오기 때문에 대부분이 가인과는 대조를 이루는, 택자의 계보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아담의 계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있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의 경우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 15권에서 가인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를 지상의 도성과 천상의 도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정론이라는 틀을 가지고 두 왕국을 설명하기 때문에 가인의 족보는 유기자와 관련해서, 그리고 아담, , 에노스로 이어지는 족보는 택자와 관련해서 설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 계보가 작성된 의도가 무수한,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 비록 수적으로는 적지만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주석하는데, 택자와 유기자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조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의 계보로 나열되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무조건 택자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노아의 아들들을 보면 홍수 이후 아버지인 노아의 하체를 드러낸 사건으로 셈과 야벳의 경우는 축복을 받고, 함의 경우는, 좀 더 정확하게는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경우는 저주를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맨 처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말했는데, 두 형제를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축복을, 함은 그 사실을 드러냈다는 것으로 저주를 받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가나안으로부터 가나안 족속의 일부가 나오게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과는 전혀 무관한 자들입니다. 물론 창세기 5장의 경우 함의 이름까지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함의 자녀인 가나안,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족속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성경이 뚜렷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는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이런 해석도 가능하리라고 보는데, 가인의 족보는 가시적인 의미에서 볼 때도 교회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의 족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유기자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셋, 그리고 에노스로 말하는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택자의 족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거짓되게 부르는 자들이 있다면 택자의 족보보다는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의 족보로 이해하는 것을 좀 더 합당한 해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것인데, 칼빈이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죄의 관영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소수이지만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며 보존해 주신 사실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오늘 본문 창세기 51절과 2절을 보시면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들을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다시금 언급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을 때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런 외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일하심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보편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식, ,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다(3:10, 4:24). 더불어 창세기 1장에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했을 때 곧이어 나오는 말씀이 모든 만물을 다스릴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1:26),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이런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오늘 본문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의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되어 있고(2:7), 하와의 경우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어서(2:22) 어떤 분들은 여자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과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는 어떤 존재로 있었는가? 성령의 열매들로만 가득 맺을 수 있는 자로서 창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복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은 존재요, 복의 근원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아는 자로서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으시고 난 뒤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창세기 27절을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즉 땅의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먼지, 티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이름을 통해 알리셨던 겁니다. 너희는 흙 혹은 먼지, 티끌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으로 만드셨지만, 그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시기도 하셨지만, 여전히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창세기 4장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시지만, 그리고 그것을 가인의 족보와 대조적으로 기록함으로 더욱 뚜렷하게 밝혀주시지만, 그들 역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자요, 전적으로 부패한 자요,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임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죄의 결과인 죽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2:17),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창세기 5장의 계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지만 그 복을 차 버린 것이 누구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절 이하가 다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3절에서 8절까지만 보겠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여기 보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누가 누구를 낳고 몇 세까지 살다가 죽었더라입니다. 물론 그런 공통적인 표현과 다른 표현이 에녹이라는 인물에 이르면 보게 되는데, 21절 이하가 그 내용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5:21-24)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 5장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계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연수를 기록하고 있고, 그 연수를 보자면 엄청난 생을 살았다는 걸 보게 됩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셋은 912세입니다. 에노스의 경우는 905, 그리고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드셀라인데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다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들 모두의 공통점은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느냐? 다시 3절을 보시면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담은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만이 아니라 하와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형상이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어떤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일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자로 있었던 것이 바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였던 것입니다. 그럼 3절에서 아담의 형상이라고 할 때 그런 의미에서의 내용을 말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1절과 2절을 통해 창세기 1장에 있는 내용을 요약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3절에서 말하는 아담의 형상과 대조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그 타락은 모든 인류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아담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담이 처음 부여받았던 그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절이 말하는 아담의 형상이란 맨 처음 아담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다시 말해 지식과 의,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어 생을 살 수 있도록 태어났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은 단지 유기자들에게 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것으로 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서 태어나는 것이고,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로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응함이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요, 그 죽음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단절로, 그리고 결국 육체의 죽음까지 말한다고 할 때 오늘 본문은 택자라 할지라도 죄의 결과 죽음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 그리고 3절 이하의 말씀은 대조적인 성격이 있고, 이런 대조는 무엇을 더욱 드러내기 위함인가 하면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래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지만 사람은 그 복을 차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오히려 타락한 자의 형상을 이어받는 것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일반적인 출생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짓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되,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 전적으로 무능력한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무능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가인과 아벨을 이해할 때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기 때문에 가인은 악인, 아벨은 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도 괜찮은 것처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가인은 악인, 아벨은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벨이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가 어떤 의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없는 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인도 전적으로 타락한 자이지만, 아벨도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난 죄인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인과 아벨하면 아벨의 경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인가?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신에게 어떤 원인이라도 있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원인으로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믿음의 방식으로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11절에 보면 욥에 대해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우리는 일단 이런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꼭 인간을 찬양하는 방식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으로 이해하자면 욥 역시 어떤 자입니까? 아담의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전적으로 부패한 자입니다. 심지어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입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3:11-12). 만약 욥에 대해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곧 성경을 부정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 그리고 악에서 떠난 자라는 사실은 그가 그 스스로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물론 교훈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성경의 기록 내용을 통해 욥과 같이 우리도 그런 자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훈 때문에 마치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 없이도 사람이 의인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정죄를 받았던 이단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을 보면 자주 의인 그리고 악인에 대한 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리스도 없는 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의인이라 말하는 것은 항상 이런 전제가 따라 온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의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래서 시편에서 의인이라 말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시편 1도 정확하게 그런 의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즉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이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복이 있는 사람들인 겁니다. 복을 받을만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가 그 복을 취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서 태어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셨기 때문에 그 선택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세워주셔서 복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할 때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될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는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지식적으로도 잃어버렸고, 의와 거룩에 있어서도 잃어버렸습니다. 성령께서 먼저 간섭해 주시지 않으면 성령의 어떤 열매도 우리로부터 맺혀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능력하기까지 해서 우리 스스로의 능력,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선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노스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앞서 셋도 그러했고, 5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택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우리를 너무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저 얼굴이라는 외형만 닮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짓 그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싸움과 다툼, 원망과 불평, 그리고 핑계 등, 수없이 많은 죄악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본을 못 보여서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차지하는 정도가 적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도 역시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좀 더 근원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그도 역시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결과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자,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죄에 대하여 너무나도 익숙한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가 이 계보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유기자와 달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라 할지라도 인생의 출발은 죄인으로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담 외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 죄인으로 출발합니다. 자연출생으로 말미암았다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죄인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신실하신가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게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은 가인의 계보가 아니라 아담의 계보, 즉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가운데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기에 택자로 부르시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요, 그들 역시 전적으로 부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주시는 대상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우리의 위로와 소망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위로와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알리시기 위해 창세기 5장은 계속해서 죽음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셔야 합니다. 왜 창세기 5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계보로 알리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타락한 본성을 따라 결코 하늘에 대한 위로와 소망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낙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 죽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116:15).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족보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들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형상이란 한 마디로 죽었다고 말하는 죽음의 족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결과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고 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자들,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가?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결코 인간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비교하자면 본래는 가인의 족보와 다를 바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인의 족보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들과는 구별시켜 주신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지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피지는 않았지만 그 위로와 소망을 누구를 통해 더욱 드러내시는가? 죽음의 족보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죽음을 말하지 않는,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하는 에녹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그는 어떤 자인가? 대부분이 900세를 살았던 그 족보 속에서 거의 반도 안 되는 인생, 365세를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전혀 복을 받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장수를 복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하자면 에녹도 오래 산 사람이지만 당시로 하자면 그렇게 오랜 산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성경은 그가 주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자면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그와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에녹에 하나님을 먼저 찾아서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를 부르시고 그와 동행해 주셨던 겁니다. 이 얼마나 복된 내용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에게만 있었던 복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주시는 복으로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위로와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교훈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강조를 할 수 있고, 다음 주에 그러한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고 시작하신 이상 완성하신다는 측면에서는 더 없이 큰 위로와 소망의 내용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더불어 아담의 계보, 즉 죽음의 족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죄의 형벌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듯한 생각을 가지게 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죽음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죄의 결과요, 형벌이요, 진노의 내용으로서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이루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완전성화입니다. 여러분, 에녹이 하나님의 동행했습니다. 그럼 그가 완전성화를 이루었는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해서 그가 더 이상 어떤 성화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와는 달리 성화는 점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성화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를 어떻게 완성시키시는가? 하나님께서 형벌로 주셨던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완성시키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형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의 시작은 죄인으로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다 아담의 형상을 따라 난 자들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도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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