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8장 20-33절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
창세기 13장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입니다(창13:13). 소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가 가르쳐지지 않는 곳, 그래서 의와 공도를 행함이 없는 곳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를 곧바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그들의 죄악이 차기까지(창15:16 참조) 오래 참으십니다(롬9:22 참조). 소돔 역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다가 때가 되어 심판을 행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을 향하여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는 말씀 다음입니다. 특별히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해 부르신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난 뒤 소돔의 죄악과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강대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하시기 위해서 소돔의 죄악을, 그리고 그 땅을 향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을 향해 말씀하신 강대한 나라는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 여호와의 도의 가르침을 따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소돔의 죄악을 따른다면 심판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지난주에 잠시 언급했던 20절과 21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여기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억울함을 당한 자들이 그들의 답답함을 하늘에 호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런 호소를 하나님께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소리를 들어서야 비로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르짖지 않아도 아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들만 감찰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 감찰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억울함에 대하여 들으신 것처럼 표현하시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뒤 세상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창조하시고, 또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그분의 뜻을 따라 섭리하십니다. 창조해 놓고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뜻을 따라 운행하시며 간섭하십니다. 그런 간섭하심이 20절과 21절의 표현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말씀하실 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사람은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전체로 볼 때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나라입니다. 만약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한다면 그들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인가?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오로지 10명도 안 되는 사람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라고 할 때 그 부르짖음이 의인의 부르짖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도가 없고 의와 공도를 행하지 않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악인이요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도 동일한 악인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한 일에 대하여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하늘을 향하여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미 살핀 바 있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어려움조차 감찰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하갈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스마엘의 어머니입니다. 사라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인물입니다. 사라와 이삭이 긍휼의 그릇이라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서도 감찰하시는데, 소돔 안에 있는 악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위한 분으로서 그들만을 주목하시지만, 그들을 위하여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지만, 그들을 위하여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의 부르짖음도 들으십니다. 때문에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 때문에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하실 때 이어 나오는 말씀처럼 저들의 죄악이 심히 중하다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창15:16)과 비교해 보자면, 지금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을 만큼 그 죄악이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르시지 않지만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고 할 때 심판의 기준이 되는 여호와의 도를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저들의 죄악을 분명히 밝히고자, 그래서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이렇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친히 말씀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는 데 있습니다. 너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로, 그곳은 여호와의 도가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의와 공도가 행해지는 나라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다. 저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죄악이 가득 찼으며, 때문에 심판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비교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의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심판하신다고 할 때 불의함이란 일절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바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조금의 죄와 악도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십니다. 일부분만 거룩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 자체이십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십니다. 일부분만 공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공의 그 자체이십니다. 때문에 그런 분이 직접 내려오셔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살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저들의 죄에 대하여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심판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에 대하여 곧바로 심판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악에 대하여 참고 또 참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한번 참고 두 번 참는 정도가 아니라, 참고 또 참으십니다. 언제까지 참으시는가? 저들의 죄악이 차기까지입니다. 물론 저들의 죄가 찬다고 할 때 얼마만큼 차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에게는 감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고,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선악 간의 심판을 행하십니다. 모든 나라에 대하여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긍휼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들도 동일한 죄인이지만 약속의 자녀, 즉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들의 모든 죄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심판대 앞에는 서겠지만 진노와 저주를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확인하는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어떻게 증거 하기도 하느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즉 의와 공도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긍휼의 심판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런 의와 공도의 내용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열매 없는 성도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열매 맺게 하시되, 창세기 내용으로 하자면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살피기 위해 내려오시는 것에 대하여 저들에게는 두려워해야 할 내용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그리고 아브라함 안에서 영적으로 그의 자녀라고 할 모든 자들에게는 두려워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들을 찾아가시는 것은 심판의 정당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긍휼의 정당성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도 대상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나라가 강대하게 될 것과 세상 나라로 대표되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고 난 뒤 두 천사로 하여금 떠나보내셨을 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간청가 나옵니다. 우선 22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지난주에 살핀 16절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18절 이하 21절은 아직까지 두 천사가 떠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22절에서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천사가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을 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간청하게 되는데, 23절에 보시면 이렇게 아룁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우선 이 말 자체를 우리가 유심히 생각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궁극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는 아브라함의 말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신다면, 그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은혜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분으로 계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아브라함의 이 말이 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이 아니라 일시적인 심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 등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실 때 저들 또한 그 심판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던 겁니다.
최근 가정예배 본문으로 있는 전도서는 어떻게까지 말합니까?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전8:12).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어떤 말씀까지 있느냐?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고 말씀합니다(전8:14). 본래 하나님의 공의로 볼 때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벌을, 의인들의 선행에 대해서는 복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악행에 대하여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이 벌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의인들의 선행에 대하여 그들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복을 받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공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런 일이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왜 이런 식으로 역사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악인들에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것과, 더불어 의인들의 고통에 대하여는 나 몰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시며,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죄악이 가득하고 악인의 횡포가 끊임없지만, 그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불의함 그 자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 자신만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원하시기에 이 땅에서는 이런 일조차 있게 하시는 겁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악인과 함께 의인이 멸망당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뜻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신데, 악인과 함께 의인을 멸하신다면 공의에 합당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하고 아뢰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24절과 25절을 보시면 이렇게 간청합니다.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할 때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만 일하시는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함께 의인들을 벌하실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불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물리적인 악이라고 말하는 고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악의 저자는 아니시지만, 물리적인 악에 대해서는 주체로 계십니다.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항상, 언제든지 선을 이루어내십니다. 욥의 고통이 그런 것입니다. 욥의 고통은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인 악이라고 하는 고통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셨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주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선을 이루어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향하여는 공의의 형벌을 행하시지만 의인을 향하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형벌 안에 있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는 같은 형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형벌 안에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악인에게는 말 그대로 형벌이지만, 의인에게는 형벌의 내용을 넘어섭니다. 다시 말해 의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죄를 짓습니다.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벌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연단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간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그리고 이런 내용의 반복이 본문 끝까지 있습니다. 27절 이하를 보시면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27-33) 내용 자체는 단순합니다. 50에서 5인 부족한 45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기서 5인 부족한 40명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10명씩 줄어들어 30명, 20명, 10명까지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간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만 있어도 이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공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의인 열 명도 없는 성, 그만큼 죄악이 관영한 성이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죄악이 심히 무거워 심판 외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의와 공도가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비춰볼 때 참된 이웃 사랑의 정신이 전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것은 결코 경솔한 결정이 아닌 것입니다.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 대충 알고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죄악을 분명히 아시되, 그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죄를 쌓아 나간 것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그 죄를 얼마나 가득 채웠는지를 아시고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결정이 불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강대한 나라와는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십니다. 세상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죄악이 가득한 나라요, 그 무게 또한 무거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나라는 여호와의 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위로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는 완전함으로 있지 못합니다. 완전함으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세상 나라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의와 공도가 아닌 죄의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들의 완성을 위해서 은혜언약을 맺고 계신 겁니다. 내가 너를 완전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내 백성으로 삼은 이상 내 백성답게 만들고야 말겠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겁니다.
더불어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을 언급한다면,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입니다. 일단 기도와 관련해서 소위 중보라는 말을 본문을 통해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물론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할 때, 그래서 가톨릭에서 말하는 또 다른 중보자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내용을 거절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이 무색해지지 않는 언어로 그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은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풀어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남을 위한 기도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정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자세만 보더라도 그가 중보자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두려움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27절에서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본래는 아뢸 수 없지만 아뢸 수 있게 만들어 주셔서 아뢴다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 역시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께 아뢸 수 없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본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말할 수 없는가?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의도는 분명 그리스도의 나라인 강대한 나라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있습니다. 강대한 나라의 특징은 여호와의 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의와 공도가 행해지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즉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못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심판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의 간청이라는 것을 더욱 드러내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심판이 분명히 드러나기 전에는 저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 안에 있는 의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혹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가 없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까지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 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고,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은 우리에게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무엇까지 말하는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12:23). 때문에 기도하는 것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는 것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죄의 결과 심판 외에는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본문과 함께 생각하자면 우리를 왜 부르셨는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강대한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강대함이란 세상이 말하는 외적 든든함에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의와 공도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언급했던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죄악된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여야 합니다. 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거기에 짓눌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부지런히 여호와의 도를 배우는 데 힘써야 합니다. 여호와의 도를 배우고, 그것을 행하는 것, 이것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의식법, 재판법은 폐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구약과 동일한 도덕법인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법대로 살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도 그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7-19)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돌판 부분의 일부를 해석하십니다. 우리에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여전히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의와 공도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행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도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도덕법으로 주신 이 말씀의 내용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주신 도덕법이라면 그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의와 공도인 줄 알고, 비록 우리 스스로는 연약하여 다 지킬 수 없지만 주의 은혜를 따라 주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주의 도움을 구하면서 죄를 버리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