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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1110설교 / 창세기19장12-29절 / 롯의구원과소돔의멸망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11.10|조회수1,06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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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12-29

롯의 구원과 소돔의 멸망

 

본문에 앞서 설명하고 있는 소돔의 죄악상은 도덕적으로 매우 심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갔다고 할 때 그들은 롯의 손님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으로 온 자들에게 소돔 성 사람들이 모이되,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모여 집을 에워싸고 그들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 시대 속에서도 매우 낮선 모습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목적은 성적인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서 성적인 행위를 위해 사람을 내놓으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비취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만큼 소돔 성은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특히 롯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했을 때 그들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기세였습니다. 한 마디로 소돔 성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소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심판하실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시기 위해 두 천사로 하여금 소돔을 방문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정당성만을 확인하게 위해서 두 천사로 하여금 소돔을 방문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에 언급한 것처럼 그곳에 살던 롯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두 천사로 하여금 소돔으로 가게 하신 것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12절과 13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가 저녁 때 쯤 도착하여 롯의 집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눕기 전 소돔 성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는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돔 성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죄악의 완악함을 보여주고 난 뒤 이제 롯에게 하나님께서 이 성을 심판하실 것을 알리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창세기 1820절과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내용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때문에 심판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저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의 죄악을 확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악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할 때 그들의 부르짖음이 있기 때문에 그때서야 비로소 아신 것인가?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침묵 속에서도 죄악 된 행동을 볼 수 있고, 죄악 된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혹은 행동을 하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죄악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무엇을 확인해야지만 아는 분이 아니라, 본래부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이런 확인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대상을 위해서입니다. 바로 롯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죄악에 대한 확인, 그리고 그런 확인으로부터 심판을 확증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누가 경고 받도록 하기 위함이냐 하면 롯이 경고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성경을 대하고 있는 우리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경고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죄악을 싫어하시며, 싫어하시기 때문에 심판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소돔의 죄악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소돔의 죄악은 무엇입니까? 지난주 살핀 것처럼 그들의 성적 문란함에 있습니다. 그것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그들의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의 핵심, 즉 그들 위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본래는 다른 것들을 다스려야 하지만 죄가 그들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그것이 바로 그들의 죄악으로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그런 죄악을 닮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을 롯에게 알리신 것은 롯으로 하여금 그런 심판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본문은 롯만이 아니라 롯의 식구들까지 챙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네게 속하는 자는 속히 피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느냐 하면 자신의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알립니다. 14절을 보시면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분명 천사들이 사위가 있다면 그들도 네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롯은 곧 결혼하게 될 사위들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하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것을 농담 식으로 여겼습니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비웃었다, 조소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롯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있을 하나님의 재앙에 대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롯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 때도 그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서 심판하기로 하셨습니다(6:5).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6: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도록 했습니다. 심판 때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노아의 경우는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2:5)라는 구절이 있는데, 노아가 방주만 지었던 것이 아니라 의를 전파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심판을 알렸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방주를 짓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면서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했지만, 그런 경고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지금 롯의 사위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자세가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 앞에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한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의 때문에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심판하실 때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합니다.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말해도 사실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조차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네게 속한 자는 다 이끌어 내라. 그래서 사위에게까지 가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롯에게 속하는 자라고 생각하여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비웃더란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런 일이 없는가? 가라지는 비웃습니다. 가라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의 풍파 세상의 쾌락 앞에서 모든 것을 잊는 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할지언정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 17에 있는 말씀을 살핀 바 있는데,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6절 이하 30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여러분,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 일상의 삶입니다.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경고가 있다는 것이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 일상생활이 문제인 것처럼 말씀하느냐?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고를 비웃기 때문입니다. 경고가 있지만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세상 삶에 충실히 살아갈 뿐입니다. 일상이 모든 것인 양 그것만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영원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노아 때 심판하신 것처럼, 그리고 롯의 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도 심판을 위해 오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마지막 심판의 때를 정하셨습니다. 바로 그때가 오면 심판을 위해 다시금 오실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금 오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로서 깨어 있는 삶,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15절을 보시면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일단 사위들은 심판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롯을 비롯하여 그의 가족만이라도 재앙을 피하기 위해 빨리 빠져 나가야 합니다. 특히 여기 보면 롯을 재촉하여 이르기를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재촉했다는 것은 그만큼 머뭇거렸다는 것입니다. 지체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가 있음에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분명 롯은 의로운 사람입니다(벧후2:7). 아브라함처럼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핀 바 있지만 그는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곳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혹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기다리기보다는 자기 보기 좋은 것을 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었지만 산으로 도망하다가 멸망할 수 있으니 이웃에 있는 작은 성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이웃에 있는 성은 사실 삶이 방식으로 볼 때 다른지 않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은 그런 곳에서 완전히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들을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보다는 성이 더 나아보였는지 여전히 좀 더 나은 곳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롯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롯은 의인이지만 세상의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성도이지만 철저히 세상에 매여 사는 성도인 것입니다.

지금 심판의 재앙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깝기 때문에 무엇을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함께 멸망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려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택하신 백성조차 버리시는 일이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것 때문에 여유를 부려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자세를 경고합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것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과 관련해서도 보면 애굽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을 취하여 먹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방식 가운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12:11) 무슨 말씀입니까? 출애굽을 위해서 즉시라도 출발해야 할 것처럼 먹으라는 것입니다.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을 나오는 데 있어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마치 미련 있는 것처럼 대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겁니다. 무엇이 죄인 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돔 성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람의 모습을 한 두 천사를 요구했을 때 그것이 악한 일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의 안일함을 추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보십시오. 광야 생활 속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자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먹지 못할 때 그들은 어디를 마음에 품었느냐 하면 출애굽 했던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11:5-6)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지금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위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있음을 말씀해주고 있지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가장 좋은 상급임을 말씀해주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기보다는 지상에서의 복을 더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지상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다가도 뒤에 있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소돔 성의 멸망과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재촉하십니다. 재촉할 뿐만 아니라 친히 이끌어 내십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인간이 내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내놓습니다. 죄를 내놓고, 죄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지만 그런 경고도 무시합니다. 심지어 구원을 위해 재촉하시지만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체하기 일쑤입니다. 끊어내 버리고 돌아서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 자꾸만 뒤로 돌아봅니다. 머뭇 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만큼은 자비를 더하십니다. 자비에 자비를 더하시고, 은혜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지체하지만 지체하는 그 손을 잡아 인도하여 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 롯과 관련된 상황을 보고 있기 때문에 롯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하자면 롯보다는 아브라함이 좀 더 나은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롯의 경우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자신이 보기 좋은 땅을 선택했지만 아브라함은 그 선택을 양보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신앙의 면모가 있었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창세기 14장에서 당시 그 지역에 큰 전쟁이 나서 롯이 잡혀 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롯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롯만이 아니라 약소국이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 되찾아 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약소국 가운데 소돔 왕이 사람만 보내고 물품은 다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감사한 마음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말합니까?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아닌 소돔 왕에 의해 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거절하게 됩니다. 롯은 세상의 눈을 뜬 자이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부분에 있어 자유로운 것처럼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점과 흠이 없는가? 실수가 없는가? 죄가 없고, 언제나 선한 것만 내놓는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점과 흠이 있고, 실수도 있고, 죄도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그도 롯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가 이런 신앙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아브라함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롯에게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도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롯과 비교해 보니 아브라함이 더 낫더라.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남달랐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16절 마지막에 있는 말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주고자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아브라함과 같은 자도 있고, 롯과 같은 자도 있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그들의 그들 됨은 주의 은혜가 앞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끌어 내라는 명령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되는 17절도 보시면 두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이끌어 내라는 명령에 대하여 지체하자 롯과 그 가족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명령하시는데,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도망할 때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하십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이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오늘 본문 26절에 의하면 도망하다가 롯의 아내의 경우 뒤로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고 증거 할 정도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와 같습니다(고전10:12). 고린도전서 10에 보면 모세 시대 때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교훈을 주는데, 그들은 다 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즐겨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6-12)

물론 택자가 버려졌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 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 두 부류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택하신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런 자들을 통해 교훈의 성격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시느냐?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멸망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과 달리 구별하여 부르셨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할 자들이 우상을 섬겼고, 또한 음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음행을 행했습니다. 주를 시험해서는 안 되는데 주를 시험했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해서는 안 되지만 끊임없이 원망 불평함으로 인해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교훈 삼아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명령하신다면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입니다. 한편으로는 명령 앞에서 명령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명령하신다면 명령하시는 바가 주의 뜻인 줄 알아야 하고, 주의 뜻이기에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라는 것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명령을 이룰 수 없는 것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명령이라고 할 때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기도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의 은혜를 따라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 이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것입니다. 주의

 

재미난 것은 이런 명령에 대하여 롯이 그대로 순종하는가 하면 오히려 이런 요청을 하게 됩니다. 18절 이하 20절을 보시면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여기 보면 자신을 주의 종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주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주께서 큰 인자를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신다는 것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고 명하신 곳까지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다가 재앙을 만나 죽을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요청하는 것이 근처 성읍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 성은 가깝고 작기도 해서 도망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과 22절에 보시면 롯의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십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본래 멸망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이웃에 있는 성읍 역시 멸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동일한 죄악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롯이 말한 성읍에 대하여는 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롯의 요청이 있고 거기에 그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롯의 요청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고자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온전한 순종으로 있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롯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것은 롯의 요청이 정당해서라기보다는 속히 심판을 행해야 하는 것 때문에, 본문의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나는 것처럼 롯이 도망하여 안전한 장소에까지 이르기 전에는 심판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양보적인 차원에서 허락했을 뿐입니다. 들어주셨다고 해서 요청 자체를 기쁘게 여기셨다 거나 들어주신 것 자체를 기뻐하셨다 거나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사무엘 시대 때 세상 사람들처럼 왕을 요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 호세아서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13:10-11)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셨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들어주시되 그들의 요청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것 자체가 죄요, 죄를 죄로서 벌하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청을 들어주기도 하시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롯의 요청을 그렇게 들어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 명령에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명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이디어를 보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지만 그 말씀을 조심만 바꿔 주십사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불어 22절에서 롯이 도망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심판을 행해야 하지만 롯 때문에 심판을 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될 정도로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 앞에 말씀 그대로의 순종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넣어 요청하는 일이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엉뚱한 짓을 합니다.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변경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얼마든지 버리고 또 버려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바를 신실히 이루시는 하나님, 그 일을 위해서 자비에 자비를 더하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우리에게 베풀고 있는 은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23절 이하 25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실제적인 심판을 기록합니다.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유황과 불로 인하여 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롯의 아내를 뒤를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26절을 보시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하여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소알로 불리게 되는 성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26절에 근거하자면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치신 것처럼 롯 역시 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롯에게는 계속해서 자비를 더하고 계셨던 겁니다.

 

결국 롯에게 속한 자이지만 사위도 거절했고, 롯의 아내의 경우 천사들에 의해 억지로 밖으로 나와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는지 아니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할 수 있는 롯은 아무런 해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끊임없이 베풀어지고 있는 대상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곡식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곡식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전달되는 대상으로 있습니다. 가라지는 같은 곳에 있지만, 같은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리고 잠시이지만 그 말씀에 대하여 은혜도 받는 것처럼 있지만 그들이 뒤를 돌아볼 때,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놓지 않을 때 소금 기둥이 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아브라함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된 소알 성 사람들도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알 만이 아니라 혹 그 주변이 다른 성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성이 심판에서 제외되었다면 그들 역시 보았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혹 신께서 노하셨는가? 하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심판의 이유가 저들의 죄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나라는 결코 저들과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나라, 그래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및 그의 자식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나라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면서 새겨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강대한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외적인 강대함이 아닙니다. 소위 강대국처럼 백성이 많고 군사력이 있고 무기가 좋은, 그리고 전술이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재력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나라가 강대한 나라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강대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멀리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말씀합니다. 롯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에 따라 행하신 결과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에 기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구원 받은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의 구원의 원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를 생각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약속하신 바를 실행치 아니하는 법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심판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인해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심판 속에서도 자기 백성인 롯을 구원하시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롯은 심판 받지 않아도 될 만큼 괜찮은 인물로 있는가? 전반적으로 볼 때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원하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합니다. 29절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람이 원인이 되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전히 점과 흠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있지만 그 말씀 앞에서도 순종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연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속한 자 중 그의 아내는 소돔 성을 빠져 나왔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다음 주에 확인하게 되겠지만 롯의 두 딸은 아버지와 함께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했지만 마치 소돔 성의 죄악과 다르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롯에 대하여는 신약에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돌리지만,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두 딸에 대해서는 이런 면에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라고 판단할만한 열매 외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의 명령 앞에 우리의 입을 여는 것, 그리고 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미련을 두는 마음,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것, 나아가 소돔과 같은 죄악 된 모습 등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 그 도에 그대로 순종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그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만, 롯의 경우는 분명 죄악 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하여 항상 이렇게 대하십니다. 그러나 설교 중 말씀드린 것처럼 항상 이렇게 대하신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나태해지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세,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 받은 자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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