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19장 30-38절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잘 보여줍니다. 세상은 죄 외에는 내 놓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인데, 왜냐하면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 다 죄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롬14:23). 특히 로마서 1장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씀합니다(롬1:20). 모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빌리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종교의 씨앗이 있는 겁니다. 종교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나 도시, 심지어 가족까지 하나도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기독교강요, 1559, 1권 3장 1).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을 뿐입니다(롬1:21).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롬:23). 그러니까 본래는 하나님을 섬겨야 했는데, 하나님 대신 하나님이 아닌 대상으로 바꾸어 섬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누구냐? 본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명한 피조물들입니다. 창조의 질서로 하자면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아래 만물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 피조물로 되어 있는데, 죄란 창조의 질서를 역순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이것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1:25).
창세기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말할 때 이 부분을 부각시키지는 않았지만 이 죄와 전혀 관계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를 통해 부각시키고 있는 죄악상은 이 죄악과 연관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방금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다는 내용을 언급했는데, 이 말씀 이후 곧바로 나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로마서 1장 26절, 27절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즉 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피조물을 섬긴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죄로 벌하실 때 이런 방식으로 벌하시더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이 창조의 질서를 파괴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시는데, 그것이 곧 순리대로 해야 할 성적인 관계가 역리로 쓰이게 되는 그런 형태로 나타나더란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니 나머지도 다 파괴되는 그런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소돔과 고모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아주 옛 시대에만 나타나는 그런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로마서를 통해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모든 시대 속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이전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우리나라도 보면 간통법이 폐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법을 통해 보자면 분명 죄이지만 세상은 죄가 아닌 것처럼 희석시켜 버렸습니다. 심지어 조금 전에 읽어드린 로마서의 말씀은 분명 죄로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를 쓰는 것, 그래서 남자와 더불어 남자가 성행위를 하는 것, 여자와 더불어 여자가 성행위를 하는 것 등 성경은 분명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그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법이 거짓을 진리라고 말한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처럼 반드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짓을 진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지상의 교회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처럼 있다고 해서 세상과 항상 나란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3-15) 쉽게 말하면 너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다를 자들이란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며, 분리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결코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결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은 하나님 보실 때 부패한 곳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일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것입니다(창6:5). 그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은 누구인가? 바로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롯의 예로 들자면 소돔 성 사람들이 몰려와 죄악 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바로 교회요 성도라는 것입니다. 부패된 세상, 썩어져 가는 세상 가운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자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자들, 그들이 교회요 성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는 착한 행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윤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 쉽지만, 좀 더 확대하자면 진리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 표현하는 것과 같은 시대가 창세기뿐만 아니라 세상이 지속되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있겠지만, 그래서 오늘날도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구별된 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소금으로서의 역할,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그들과 함께 동화되어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어떤 면에서 소돔 안에 살면서 소돔에 동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롯의 두 딸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 롯에게 속한 자입니다. 가시적으로 보면 롯에게 속하여 교회라 불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제가 가시적으로 볼 때 교회라고 한 것은 그들이 참된 교회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 즉 가시적 교회조차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어디를 따라 가느냐 하면 바로 앞에서 멸망한 소돔의 방식을 따르더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교훈의 내용으로 있어야 합니다.
우선 30절을 보시면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본래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외에도 그 주변에 있던 성들을 다 멸하려고 하신 듯 합니다. 지난시간 살폈던 내용 중 천사를 통해 롯을 구원하려고 하실 때 천사들이 명한 것은 소돔을 속히 떠나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이 어떤 요구를 하느냐 하면 창세기 19장 18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간청합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창19:18-20) 그리고 이런 간청에 대해 들어주시는데, 21절을 보시면 이렇게 답합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즉 본래는 멸할 성읍이었지만 롯의 간청으로 인해 그 성읍은 멸하지 아니할 땅으로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변경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정하신 바는 소위 소알이라는 땅은 제외가 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은 마치 롯의 간구를 통해 멸망할 땅이 멸망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교훈하시는데,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자기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사실과, 때문에 기도하라는 요청을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어쨌든 나타난 방식으로 보자면 멸하려고 하셨지만 롯의 간청으로 인하여 멸하지 않은 땅이 소알로 불리는 땅입니다. 그런데 정작 소알로 도망하여 오자 그 땅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천사를 통해 처음 말씀하신 산으로 올라가 거주하게 되는데, 칼빈의 경우는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함으로 그렇게 행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소알이라는 성읍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는데, 24절 말씀처럼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 같이 내림으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성읍들이 멸망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오늘날 3D 4D라고 해서 좀 더 생동감 있게 영화를 보는 일들이 있는데, 롯은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두려움이 소알이라는 성읍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알은 작은 성읍에 불과하지만 소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소돔과 다를 바 없는 죄악이 만연했다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연했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으로 있는 겁니다. 롯의 간청이 없었다면, 적어도 나타난 바에 따라 말하자면, 소알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악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롯의 경우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소돔을 선택한 것처럼 어쩌면 다르지 않는 자세로 소알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그곳에 머무는 것이 두려움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도는 그런 죄와 더불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좋아 보이기 때문에 좋아 보인다는 이유가 올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롯이 소돔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고 다시금 소알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 역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항상 세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항상 그렇게 나타납니다. 버렸다가도 다시금 줍습니다. 안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다시금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만큼 세상에 밝은 자입니다. 계산이 빠른 자입니다. 세상 이익과 유익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을 주십니다.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주시는가? 심판을 통해 주십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심판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주시는 형벌일 수 있습니다. 그런 형벌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일인가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과 더불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면 명령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셨다면 가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공경해야 하고,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살인하지 말아야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면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외적으로만 하지 않으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으로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두려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교훈을 받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 천사를 통해 명하신 산으로 올라가 거주한 것까지는 잘 한 것으로 있지만 이후 두 딸이 두려워해야 할 일을 벌이게 됩니다. 31절 이하의 내용인데, 우선 본문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창19:31-35) 그리고 36절 이하에 보시면 두 딸이 임신하게 되는데, 그들이 누구냐? 모압과 암손의 조상입니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창19:36-38) 한 마디로 소돔의 죄악과 다르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도 신약 성경에 의하면 롯이란 인물에 대하여 의로운 롯이라고 칭합니다. 그런 그의 가정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란 충분히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동성애와 관련하여 이곳저곳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드러내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그런 분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만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반대하고 혐오스러워합니다. 이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의 본성이 괜찮기 때문에 본래부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역사하실 때 그들의 양심을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그런 마음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을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올바른 윤리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무법천지가 될 뿐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 이것이 인간 본성입니다.
앞서 로마서 1장과 관련하여 말씀을 드렸지만 성적인 문란함은 인간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한 결과 형벌로 있습니다. 모든 질서의 파괴가 형벌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인 동시에 그것이 곧 그들 자신들에게는 죄로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소돔과 같은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조차 그러합니다.
실제로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 간음을 행하는 자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서 살인죄와 더불어 이런저런 죄까지 더하는 상황까지 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다윗에 대하여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행13:22). 다윗의 경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는 다윗으로 하여금 경건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 넘어질 때가 있더란 것입니다.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특히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 이후 수없이 많은 후궁을 들임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로 나눠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의 후궁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의 경건이 나중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의롭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항상 의로운 열매만을 내놓는 것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롯으로 하여금 의롭다 하신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의 삶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하나님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을 통해 분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죄에 대한 탄식이 있었고,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모든 죄를 멀리 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돔 성 백성들의 죄를 지적했지만 그는 자기의 두 딸을 그들에게 내어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란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을 보시면 노아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 모든 인류를 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가? 노아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의인이라 불릴 수 있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위하여 방주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고 난 뒤 홍수를 모든 것을 멸하시고자 하셨을 때 노아에게 속한 자만이 방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 한 가정만 남은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세 아들과 며느리만 남은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감격 또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그치고 다시금 땅으로 나왔을 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죄가 사라졌는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홍수 심판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19장으로 오시면, 롯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온 두 천사에게 이른 말이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분명 롯은 주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인자를 롯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소돔을 향한 심판 가운데서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겁니다. 롯만 인가? 처음에는 그의 아내도 소돔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두 딸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도 주께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두 딸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이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에게 배필이 없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 몰래 아버지와 관계하여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마치 소돔과 다르지 않는 방식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돔을 방식을 따라 가더란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서가 아니라 은혜 밖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지만 그런 뜻을 저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은혜가 있다는 것 때문에 안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면, 죄 문제와 관련해 하나님의 은혜를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을 지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만 생각해 보면 모두가 아담 안에서 지은 죄책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신 역사가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 안에 있다면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으라, 주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롯의 경우 의로운 자로 표현되고 있고, 지난 시간에 봤던 것처럼 롯에게 속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중도에 그의 아내는 돌아보지 말라고 한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두 딸 역시 소돔의 죄악과 다르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택자인지, 유기자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 이런 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일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서 누군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을 언급하기도 합니다(고전5:1). 물론 이때 아버지의 아내란 실제 어머니가 아니라 계모입니다. 사별 하고난 뒤 얻은 아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후처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계모와 음행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교회 안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했는지 바울은 이방 사회에서조차 없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비단 이 일 뿐이겠습니까? 교회이지만 지상 교회에서는 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파당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일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 있기 때문입니다. 전투를 다 마치고 승리한 교회가 아니란 것입니다. 죄의 유혹이 있고, 그런 죄와의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심지어 지상의 교회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입니다. 외적으로는 성도라 불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도가 아닌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본성도 부패한 본성으로 있는데 싸움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갈등도 있고 분쟁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그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죄악이 들 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경성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노아의 때, 롯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와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마24:42)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서 열처녀 비유가 나오고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다 이런 내용입니다. 준비하라. 깨어 있어라.
그러나 그것보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또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넘어지는 자리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요15:5),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비록 두 딸의 꾀에 의해 동침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롯은 두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의 자세에 대해서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술을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될 정도로 마셨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방심하도록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방심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술에 대하여 부정으로 말하는 바가 많습니다. 술을 완전히 금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약으로서 포도주를 약간씩 사용하라는 권면도 있지만, 주로 부정적입니다. 더군다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분명 우리에게 유익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롯과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 대하여 밝은 자요 많은 부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로 사용되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지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식의 풍성함이 있었는가?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특별히 롯의 아내와 두 딸의 행보는 소돔에서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심판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롯의 아내의 경우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을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었고, 두 딸의 경우 소돔의 죄악과 다르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세상의 방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분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세상의 방식들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주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고백에 합당하게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