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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1201설교 / 창세기20장8-18절 / 네수치를가르게하였노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12.01|조회수1,17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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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8-18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라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인 사라를 애굽 왕에게 내어주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라는 것을 속이고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의도 가운데서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기 때문에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소개하면 혹이라도 사라의 아리따움을 보고 자신은 죽이고 아내는 취하여 갈 거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모습은 아닙니다. 분명 사라는 자신의 이복 누이이긴 하지만 결혼을 통하여 아내가 되었다면 아내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숨기고자 또 다른 사실을 가지고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인간의 부패성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애굽 왕이 자신의 후궁으로 삼기 위해서 데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침하지 못하도록 애굽 왕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난 뒤 그가 살던 곳에서 다시금 이동하여 네게브 땅,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애굽에서 실수했던 동일한 실수를 다시금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연단하시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셨는데, 창세기 20장에서는 마치 애굽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졌던 것에 또 넘어집니다. 개들이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우리 역시 토한 것을 먹고 또 먹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반복적입니다. 죄를 짓고 난 뒤 하나님께서 분명 교훈하셔서 죄를 회개하지만, 회개했다고 해서 더 이상 동일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또 짓고 또 짓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미움보다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 크십니다. 때로는 징계하시는 일도 있지만 히브리서가 잘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이기에 징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12:8). 반면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일반 은총이라고 불리는 내용도 있지만, 그런 은총보다 죄에 대한 진노가 더 큽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리시는 일반적인 은총의 내용이 있지만, 그들이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처럼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일일이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저들의 죄를 밝히심으로 저들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도록 하십니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미움보다 사랑을. 어떤 자들에게는 은총보다는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어떻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을 공평이라고 한다면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를 통해 어떤 나라는 비가 많이 오고, 어떤 나라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그런 나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모습으로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 되었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셨다고 할 때 죄에 대하여는 벌을, 선에 대하여는 복을 약속하신 것이 공평입니다.

특별히 선에 대하여 복을 약속하셨다고 할 때 그 선을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시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에 대하여 얼마나 큰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을 통하여 죄책을 제거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되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사용하셔서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사건을 볼 텐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죄악 속에서도 자신의 뜻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꿈이라는 방식을 통해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는데, 8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꿈의 방식이지만 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효력 있게 하신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꿈을 통해 들었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그 마음에 새기셨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 왕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 합니다(1:1-2a). 구약의 경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이때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은 구약과 같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신 그런 방식은 아니라는 이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신약에서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이해도 있습니다. 다만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비상직분입니다. 신약 시대에 한시적으로 있었던 직분일 뿐입니다. 때문에 지금도 그와 같은 직분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항존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는데, 바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말씀사역자인 목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길 기쁘게 여기셨는데, 이방인 왕조차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해 순종하도록 하는 역사를 펼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 왕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두려워 순종하는 역사를 보여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말미암은 두려움을 주셔서 순종하게 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다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은혜와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는 역사도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비교해서 말한다면 저들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많은 부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꿈의 방식을 통해서 효력을 발휘하신 하나님이라면, 동일하게 말씀 전파의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효력을 발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결코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마치 살아 역사하는 것처럼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있는 것이고(벧전1:23 참조), 그래서 거룩해져가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17:17 참조).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을 때 아비멜렉은 그 일의 자초지정을 확인하고자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왕이라 할지라도 탐욕의 마음으로 한 사람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거짓을 고함으로 아내가 아닌 누이인 줄 알았다는 측면에서는 억울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였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후 말씀을 통해 말하게 되지만, 지금 아비멜렉의 질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그것도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한 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랄 왕이나 그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그런 인식 가운데 있었다면 그나마 그랄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도덕적으로 볼 때 소돔처럼 심각한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을 붙들어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본래 그런 인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난 뒤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을 때 이런 죄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으로 있지만, 그래서 여호와의 도를 배우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이방 나라의 왕조차 무엇이 죄인지를 인식하도록 하십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내를 취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 뻔하였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이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아브라함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사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죄는 숨기되 죄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으면 씌웠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마치 무죄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처신할 때가 많습니다. 아비멜렉의 자세가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 봤던 본문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미 꿈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실입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물론 이 일까지 하나님의 역사로 있어서 곧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그의 행동을 제어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일인 것처럼 돌리는 방식인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금 전에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본래부터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많은 부분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랄이라는 성은 본래부터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죄로 여겼고, 그런 법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레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나를 속였느냐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질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살핀 이유와 같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아내라고 하면 자신은 죽이고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는 취하여 가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거짓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랄 왕이나 그 나라 백성에게 정당한 평가를 돌린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아브라함의 생각은 지레짐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12장의 내용 속에서도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지 말라는 명령은 적극적으로 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아브라함은 참된 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짐작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이 말은 거짓을 증거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9계명,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할 때 이 계명이 가지는 개요가 이웃의 선한 명예를 깎아 내리지 말고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데 있는데, 지금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자신이 잘못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가?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인정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경감시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실제 자신의 이복 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다른 한 가지를 숨기려고 한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복 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면 아내로서 아브라함 옆에 있는 것이지 이복 누이로서 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내로 소개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이 아니라 거짓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혹은 자신의 죄를 좀 가볍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숨기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면서까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죄를 좀 더 가볍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속였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죄까지 더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결코 모르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 대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죄를 숨기고 죄를 경감시키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핑계 대다가 또 다른 죄를 더하기 때문에 죄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끊어냅니까?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끊어내야 합니다. 솔직함으로 끊어내야 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 변명으로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을 때 사람들이 행하는 바가 다른 사람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서 죽이기까지 하는 이 내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소돔의 죄악상을 생각하면서 마치 이와 방불한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면 실제 인간의 본성이 이런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같은 경우는 사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나마 사람들의 양심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자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율법 해석처럼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함을 주면 실제적인 살인은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욕하는 일 등을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살인자라는 죄명을 벗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는 얼마든지 사람들이 죄악을 향해 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라멕이라는 인물이 행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23절을 읽어드리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이런 외형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일들로 비일비재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결코 죄악을 향한 질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악을 향해 질주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도 부패성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주심으로 그 길을 막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악 속에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무겁게 합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 보십시오. 미워하는 마음이 어떻게 즐겁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생각해 보시고, 나아가 죄에 대한 징계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멸망시키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고, 싫어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여기서는 자신의 삶이 나그네 인생임을 밝힙니다.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릅니다. 많은 부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아리따운 아내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서 어디를 가든 아내를 아내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라비와 누이 관계로 말하자고 이미 말했다는 겁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부터 그렇게 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는 첫 번째 실수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자신의 죄악을 경감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은 바에 대하여 다시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올바르게 처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12절의 자세와 같이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려고 하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그 말이 옳은가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베푸신 그런 은혜를 그랄에서도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14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한편으로는 자신이 죄를 지을 뻔한 일에 대하여 보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인 줄 모르고 데려왔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보상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두려움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지난주 본문인 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때문에 아브라함을 후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잘못으로 판단하자면 아브라함의 거짓이 앞섰기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지자인 아브라함을 후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12장과 동일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심는 것은 죄악과 관련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긍휼을 더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징계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징계로만 대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조차 이런 모습으로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한이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이유로 자신의 반복적인 죄악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과 비교해 오늘 본문이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은 애굽 땅에서는 소유를 가지고 애굽 땅을 떠나게 되었다면, 그랄 왕은 계속해서 머물러도 좋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앞서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두려움은 선지자인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산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랄 왕은 양과 소, 종들을 줄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까지 후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양과 소, 종들을 줄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결과가 저쪽은 잘못했고 이쪽은 잘못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비멜렉이 주는 자로 있다고 해서 아비멜렉은 잘못, 아브라함은 받는 자로 있다고 해서 아브라함은 잘못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잘못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백성에게 관대하게 행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고 해서 많은 것을 주시는 것이 곧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 잘못이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그 죄악을 덮는 일까지 있는 겁니다.

이어 16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이미 남편임을 알고 있지만 사라에게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만 속인 것이 아니라 아내인 사라 역시 아브라함을 오라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20:5 참조). 그리고 이런 표현을 통해 사라의 잘못도 드러내십니다. 즉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때 그것으로라는 말이 우리말 번역에서는 은 천 개를 가리키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오라비인 아브라함이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은 3인칭 대명사 단수로서 번역에 따라서는 도 될 수 있고, ‘그것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때 사라의 수치를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은 천 개인가, 아니면 사라가 오라비라고 한 아브라함인가? 칼빈은 사라의 남편인 아브라함이 그의 수치를 가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너는 아브라함을 오라비라 하였지만 그런 거짓된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네가 오라비라고 말한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요, 그를 통해 그의 수치스러움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방 왕을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책망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이방인으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이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정신 차리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아내 된 사라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이 남편인 아브라함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신부된 우리는 점과 흠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을만한 모습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랑 되신 남편으로 통해 그 수치를 가리십니다. 아내의 수치를 신랑이 가립니다. 이것이 신부된 교회의 감사 내용입니다. 수치스러움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수치를 다 가려주십니다. 가려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한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방 나라 왕에게 받고 있는 대접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셨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났다면 대접이 아니라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보복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주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 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멜렉과 그 집안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데,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이것은 앞선 본문 7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 바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것으로 인하여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시는 벌을 내리셨던 겁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았다고 할 때 그것을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이 사건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을 요하는 그런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라를 데리고 있었던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라를 보존하신 일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할 때 하루아침에 그것을 확인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시간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미결로 남겨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이 큰 잘못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바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일에 대하여 이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 하시사 닫으셨던 태를 열어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20장의 내용을 보고 있지만,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조차 아내 리브가의 아르따움으로 인하여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똑같은 거짓을 고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의 부패성이 얼마나 깊고 반복적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삭에게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반복적인 죄악 된 모습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반복되는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긍휼을 자기 백성에게서 거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 외에 내놓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죄, , 죄만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악 속에서 우리는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주의 명령에 순종하되, 금하신 것을 금하고 명하신 것을 행하는 자로서 주 앞에 서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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