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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1229설교 / 창세기21장22-34절 / 브엘세바에서여호와의이름을부르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12.29|조회수555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122-34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 때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셨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큰 민족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성에 대해서는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낳게 하실 것이 그분의 뜻으로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시간 안에서 조금씩 분명한 형태로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엘리에셀도 아니요, 여종인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도 아니었습니다. 사라를 통해 낳게 될 자, 바로 이삭이 약속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는가?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나이 99세요 사라의 나이 89세 정도가 되었을 때인데, 더 이상 약속하신 바를 믿기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이삭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베풀면서 육신의 자녀라 할 수 있는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면서 괴롭힌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너무하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 편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아브라함은 하갈과 함께 이삭을 내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아비멜렉 왕과 그의 군대장관이 아브라함 가정을 방문하여 맹세한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22절을 보시면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여기서 아비멜렉은 이름이 아니라 왕의 칭호입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파라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랄 지역, 혹은 그랄 지역이 블레셋 안에 있는 지역인데, 바로 그 지역의 왕을 아비멜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땅의 왕인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 온 것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왕과의 일이 바로 앞 장인 창세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 가면서 그랄이라는 지역에 거류할 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과 관련됩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리따운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취하여 갈 것을 염려하여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문제는 동일한 경험의 사건이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훈을 전혀 받지 못한 것처럼 다시금 거짓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아내가 그 지역의 왕의 후궁이 될 뻔한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낳게 하실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를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를 후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었습니다. 나아가 지금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그랄 지역에서 마음껏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서 이삭을 낳은 것이고, 이삭이 젖을 떼면서 큰 잔치까지 베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 왕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올 때가 정확하게 이 날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때쯤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창세기 20에서 밝히셨습니다. 7에 보시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그리고 17절과 18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바로 이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가정은 아비멜렉에게 있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종들을 통하여 저들에 대하여 살펴볼 것을 명하고 그것을 보고하도록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0장 사건에서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있고, 또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능력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확인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외적인 복을 통해 영적인 복을 알리실 때가 있는데, 어쩌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가정이 외적으로 더 많아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알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아비멜렉조차 하나님을 믿고 섬겼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믿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신에 대하여 인정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블레셋 족속이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히는 나라로 있었는데, 그런 부분을 생각하자면 이때 신앙이 들어가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신앙이 들어갔다면 그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경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네기 믿고 있는 신에 대하여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 신이 능력이 많다는 측면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요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여기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후대한 것을 언급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사라의 일은 아비멜렉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거짓을 고함으로 사라를 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때문에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 종들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심지어 자기 땅에서 내쫓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양과 소, 종들도 주었고, 자기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점과 흠을 나타낸 것이지만, 아비멜렉은 그런 아브라함을 후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누구로 말미암았느냐?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후대하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비멜렉의 경우 그의 후대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일 왼 손이 모르게 하시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때 본래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주신 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비멜렉이 후대하였다고 할 때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일한 대가로 받는 물질의 일부인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일부를 드리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그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물질에 아무렇게나 손을 대도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8계명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때 우리의 것이 되도록 주시지, 주시면서 우리의 것이 아닌 것처럼 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내 것이라고 해서 마치 내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가정을 후대하였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로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격인 양, 그것이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말해 자신이 아브라함 가정을 후대하였기 때문에 너희도 나와 내 아들, 내 손자에게까지 내가 후대한 것을 생각하여 후대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거짓을 행하지 않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비멜렉은 그랄 지역, 블레셋 지역의 왕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한 가정을 책임지는 자입니다. 물론 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 규모는 이미 우리가 살핀 바 있는 것처럼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창세기 14장만 보더라도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가 318명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때보다 훈련된 자가 더 많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은 그랄의 왕이요, 블렛세 지역을 다스리던 왕입니다. 그런 그가 먼저 찾아와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 그리고 손자에 이르기까지 후대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과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땅은 아비멜렉의 소유입니다. 땅 주인이 아비멜렉이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자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소리 쳐야 할 쪽은 어디를 봐도 아비멜렉 쪽에 있습니다. 창세기 20장만 하더라도 아비멜렉보다는 아브라함 쪽이 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구하는 쪽으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지 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시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전세 혹은 월세를 살아보면 알겠지만 주인집이 곁에 있다고 할 때 주인의 눈치를 은근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입장은 정반대입니다. 아비멜렉이 주인집이고, 아브라함은 전세 혹은 월세로 살 뿐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눈치를 보느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눈치를 보는 식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그런 자로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이 땅이 본향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의 본향으로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 뿐입니다. 마치 전세로 살고, 월세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위정자들을 세우셨고,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5:29). 심지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우리의 몸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몸과 함께 영혼까지도 지옥에 멸하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앞에 좀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주눅 들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기준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좀 부족하고 없다는 것 때문에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실패한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없지만 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아비멜렉이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보았다. 때문에 너와 나 사이에, 나아가 네 자손과 우리 자손 사이에 서로 후대하도록 하자. 이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받아들이게 됩니다. 24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부당한 일에 대하여 언급하게 됩니다. 25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여기서 아비멜렉의 종들은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비멜렉과 좀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는 것이 더 정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는 식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비멜렉의 백성이라기보다는 그의 신하들과 관련된 일이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가?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식구 그리고 종들, 나아가 수없이 많은 양과 소 등을 먹일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팠는데, 그 우물을 빼앗은 겁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네 말대로 맹세하겠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고 하면서 빼앗긴 우물에 대한 문제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맹세하는 것은 좋으나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은 일은 타국인에 대한 시기, 질투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에 대하여 안다고 할 때 아브라함 편에서 잘못한 일인데 마치 왕이 잘못한 일인 것처럼 양과 소를 주고 거주할 수 있는 땅도 제공해 준 것이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남의 땅에서 잘 되는 모습이 배 아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해를 끼치는, 그것도 우물을 빼앗은 것은 아브라함 가정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인데, 그만큼 큰 피해를 끼쳤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일에 대한 아브라함의 자세는 그 일에 대하여 왕께 고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단 묻어 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우물을 빼앗긴 일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사람도 물을 먹어야 하고, 짐승도 물을 먹어야 합니다. 우물을 빼앗겼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막대한 피해를 받은 겁니다. 그러나 저들의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곧바로 풀 수도 있었지만 참고 참았던 겁니다.

한편 이 일이 분명 심각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키신 것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비멜렉이 찾아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지만, 함께 계신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일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누가 지키시고 보호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안식을 맛보는 일이 있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시적입니다. 한 가지 어려움이 끝나면 좀 쉴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시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어려움만 주시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길 힘을 주시고, 때로는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때로는 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방식들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키고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견인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6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비멜렉 입장에서는 몰랐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 말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분명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약을 맺게 되는데, 27절에 보시면 언약의 징표로 양과 소를 주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그러니까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문제가 될 법한 일을 처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한 바를 지키자는 뜻으로, 그리고 아비멜렉이 먼저 요청한 것이긴 하지만 질서 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아랫사람으로 있기 때문에 존중의 의미를 표현한다는 뜻에서 양과 소를 주었던 겁니다. 이것으로 언약의 징표를 삼자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28절과 2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여기에 대해 아브라함이 설명하는 것이 30절과 3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여기 보면 브엘세바란 말이 있는데, 브엘은 우물입니다. 그리고 세바는 맹세라는 뜻도 있고 일곱이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빼앗겼던 우물에 대하여 자신이 우물을 판 것이고, 때문에 이 우물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뜻으로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은 것입니다. 일곱 암양 새끼의 경우 우물에 대한 언약의 증표로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인 것입니다. 성경은 전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6으로 가시면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 이삭이 그랄에서 사는 동안 이 맹세가 전혀 지켜지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절부터 보시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6:12-25)

사람의 맹세는 이와 같습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맹세는 얼마든지 자기 이익에 따라 맹세하기도 하고 맹세한 것을 어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언약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삭을 약속하셨다면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한 나이, 불가능한 몸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면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이스마엘조차 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할 때 실제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즉 인간은 약속하고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많지만, 그런 점에서 거짓투성이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약속하신 바를 지키지 않는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만큼 신실하신 하나님이신 겁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32절 이하 34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이 내용이 정리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비멜렉과 맹세를 했지만 그 맹세가 아브라함 가정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것도 영원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라나는 나무를 보면서 기억하겠다는 의미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금 살핀 창세기 26장이 그것입니다. 맹세했지만 맹세가 지켜지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 맹세를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 맹세가 전혀 지켜지지 않습니다. 맹세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자손까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들에게 가자마다 그 맹세는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의 약속은 결코 성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과 맹세했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가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을 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었던 사람도 자기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좋은 쪽으로 항상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좋은 쪽으로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조차 그렇습니다. 좋아졌다가도 다시금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변치 않는다는 측면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시며,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한번도 지켜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금도 지키고 계시며, 앞으로도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생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의비하며 예배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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