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4장 1-49절
예비하신바 평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지난 시간 창세기 22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나홀의 자손과 관련하여 살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죽음보다 앞서 이삭을 위하여 이삭의 짝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성경 기록의 순서로 보자면 리브가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사라의 죽음, 그리고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픔보다 앞서 위로함을 예비해 두셨고, 실제로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심으로 위로함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24장 마지막 절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24:67)
그러나 창세기 24장은 단지 이삭을 위로하시기 위한 내용으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함도 있지만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맞이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데려오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런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25장 20절에 보면 이삭이 40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고 할 때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41세 정도가 됩니다. 사라가 127세에 죽었는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입니다. 그때로부터 대략 4년 정도가 흐른 것입니다. 성경은 141세의 아브라함의 나이를 많이 늙었다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때는 아브라함 때보다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 아담의 경우 930세를 살았습니다. 에녹의 경우는 365세를 살았는데, 죽었다는 표현이 없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계보 속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인데, 그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그때는 굉장히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 수명이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00세에 자녀를 낳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즉 100세도 늙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인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냐 하면 141세인 겁니다. 물론 창세기 25장 7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대와 비교해 보면 굉장히 오래 산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의 시점으로 볼 때 죽을 날까지는 아직 24년이나 더 남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라의 죽음을 통해 자신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내용을 보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게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하면서 오늘 1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복은 외적인 복이요, 지상적인 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두 번의 속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왕들을 통하여 물질로 채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는 그들의 물질을 받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4장 롯이 잡혀갔다가 구출해 오는 내용 속에서는 구출 받은 쪽에서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좋다고 할 때, 자기 백성 외에는 다 가져도 좋다고 할 때 그것을 거절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에 의해 부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있는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인 줄 진작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허락하셨고, 자신이 잘한 일 속에서는 그것을 거절하였지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복을 허락하시며 허락하실 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에게는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이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복을 범사에 더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하는 이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 규모가 커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외적인 복을 더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어디 있느냐? 지상에 있는 복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질 것이 아니요, 죽었다고 할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영적이라고 말하는 그 복,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밝히신 것처럼 내가 너의 가장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신 그 사실에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 분명 외적이고 지상적인 복을 담고 있지만, 그것에 제한되어 말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라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도 지상의 복, 외적인 복을 누리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그 복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복일뿐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진정한 복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지 지상의 복만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이 그에게 복됨으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시는 복 가운데 단지 지상의 복만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복,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만 믿음을 강화시켜나가시는 은총, 견인의 선물, 더 나아가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이끄시는 복의 내용까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복을 받아 누리는 자로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복 주십시오.”라고 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가 이제는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고자 합니다. 2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 집의 모든 소유를 맡길 정도로 아브라함과는 신뢰 관계에 있는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늙었지만 종 역시 늙었는데, 그만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을 만한 종입니다. 종 역시도 아브라함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그런 그에게 내 허벅지 밑에 손을 넣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에 엄숙한 맹세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모습일 뿐 실제로 맹세하게 하는 대상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3절 상반부입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특히 여기 보면 하나님에 대하여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이요, 하늘과 땅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으신 것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모든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내용이 것입니다. 3절 하반부와 4절입니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왜 아브라함이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가 아니라 고향 족속에게로 가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내용을 통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6:14)는 말씀을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의 경우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고향의 족속의 경우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고향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수24:2).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아버지인 데라가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고 할 때 그의 아들 역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성경은 아버지 데라가 고향에서 우상을 섬겼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데라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 나홀과 하란입니다. 하란의 경우는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데라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나오게 되었고,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도 함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서 떠나라고 하신 것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함께 아버지 데라, 조카인 롯이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종이 이렇게 묻습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여자가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이삭을 위하여 이삭으로 하여금 본래 아브라함이 나온 땅으로 가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6절에서 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한 마디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따라 오려고 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맹세하게 하는 것이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내용을 언급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맹세하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강조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인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것이지만, 앞서 아버지 집과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셨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곳에 분명 친척이 있지만 그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할 때 가나안에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선택하도록 한 이유가 거기에는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는 해석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족속의 딸 중애서는 아내를 얻을 수 없다는 확고한 마음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종으로 하여금 본래 자가기 살던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보내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오늘 본문 5절에서 여자가 나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내용 속에서,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얻게 하는 내용 속에서 우리는 결혼이 부모의 권위 아래에서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삭에게는 아무런 의지가 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이삭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아내를 고향 땅에 가서 구할 것이다”고 말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권위 아래 결혼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당사자들의 동의 또한 있어야 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위하여 예비하셨고, 예비하신 그를 평탄하게 만나게 하셔서 데리고 왔을 때 이삭으로 하여금 만족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과 대조를 이루는가? 창세기 6장 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물론 하나님의 섭리에서 제외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 2절은 하나님의 섭리가 강조될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규명하신 대상을 찾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믿지 않는 자와는 함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결혼 금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 고향으로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얻고자 하는데, 이 모든 말을 들은 종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9절을 보시면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엄숙한 맹세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떠나게 되는데, 10절입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여기서 좋은 것이란 이삭의 아내가 될 자에게 줄 예물과 또한 그 식구들에게 줄 예물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후 본문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는데, 1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만큼의 예물을 가지고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갔는데, 사실 그렇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난다고 할 때 그 길을 지켜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가 저녁이 될 쯤 입니다. 11절을 보시면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낮보다는 조금 선선해지는 저녁 쯤 해서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데, 바로 그때 쯤 도착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12절에서 14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간단히 말하면 순조롭게 만나게 하시되, 제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면 그것을 징조로 알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징조를 보여주셔서 저 사람이 내 짝임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때가 있는데, 다소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무조건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 주시면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줄 알겠다는 기도는 내가 정한 기도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한 기도라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합당한 기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때문에 기도한다고 할 때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이 근거가 되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되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는 본이 될 만한 그런 기도는 아닙니다. 다만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지금 종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철저히 아브라함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더불어 낯선 땅에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순조롭게 만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정이 있는 겁니다. 순조롭게 만나면 자기가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어쨌든 종이 기도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15절에 보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나온 것으로 기록합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이미 창세기 22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밀가를 통해 낳은 아들 중 브두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딸이 리브가입니다. 바로 그녀가 종이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를 다 마치기도 전에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22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비하신 리브가를 이삭에게 붙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지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에 딱 맞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가 리브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기도보다 앞서 일하시는 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왔다는 것은 기도를 듣고 난 뒤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하고자 하는 바를 아시고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럼 그렇게만 역사하시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한 소원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을 기도하기도 전에 아시고서 일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소원도 가지지 못하는 우리에게 하나님 뜻에 맞는 소원까지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가 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도가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16절을 보시면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이후에 확인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아리따운 여자였지만,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매우 아리따운 여자였습니다. 이 아리따움 때문에 아브라함의 경우는 애굽에서, 그랄에서 속이기까지 하는데, 이 일이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이 부분은 해당 본문에 가서 다시금 살펴볼 것이고, 지금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리브가의 경우 일상적으로 하던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런 모든 일의 역사가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역사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종이 기도한 내용대로 여자에게 요구를 하고, 여자는 종의 기도대로 행하게 됩니다. 17절에서 20절입니다.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이 말씀 자체만 보더라도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기도한 그대로 이뤄질 수 있는가? 그러나 기도가 핵심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도한 대로 이뤄지면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의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을 뿐입니다. 기도가 주체가 아니라,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주체로 계실 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도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하겠습니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받는 것이 무슨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누가 주체인지를 잊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가 능력이 아니고, 기도를 하는 자의 능력이 아니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능력이 나타날 뿐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을 보시면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순탄하게 이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여부를 알고자 주목하게 되는데, 22절 이하 2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일단 여기 순서를 잘 보셔야 하는데, 2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여자에게 줍니다. 결혼 할 여자에게 줄 예물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뭔가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정상적인 순서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면 그 여부가 확인되고 난 뒤 예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종이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다시금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4절부터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인데, 이 부분을 다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것을 밝힙니다(34).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35), 그런 그에게 사라를 통해 노년에 낳은 아들이 있다는 것(36)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3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종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가나안이 아니라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는 것을 밝히고, 42절 이하에서는 리브가를 만나게 된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 중 지금 순서와 관련된 부분이 47절입니다.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그러니까 “네가 뉘 딸이냐?” 묻고 난 뒤 그가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는 것을 듣고서 코걸이, 손목걸이를 끼운 겁니다. 정상적인 순서를 밟은 것입니다. 이것을 왜 바꿔서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소위 물질주의의 사고방식처럼 예물로 리브가의 마음을 먼저 녹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종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소녀 리브가가 이 일에 대하여 알리게 되는데, 28절 이하를 보시면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을 집으로 들이게 되고 대접하게 됩니다. “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머니 집에 알렸더니 리브가에게 오라버니가 있어 그의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 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창24:28-33)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과정을 다시금 설명하는 것이 34절 이하 48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리브가의 오라비니인 라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가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종을 대접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의 정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경우 믿음 가운데 있다고 하기가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그들에게도 이웃 사랑의 정신이 어느 정도 실천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더더욱 믿지 않는 자들보다는 본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의 충성됨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여러 가지를 대접하고 있지만 그가 온 목적은 아브라함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자 여기까지 오게 된 내용을 먼저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간다고 할 때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사명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사탄의 시험 앞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라 할지라도 먹고 마시는 것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는 뒷전으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무엇이 우선순위로 있는지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 우리가 그런 삶으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합당한 열매란 무엇인지를 나타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자초지정에 대한 설명 이후 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49절을 보시면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를 데려가도 좋은지, 아니면 이 일에 대하여 거절하든지 결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어떤 내용이 있었습니까? 기도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도중에 기도한 내용 그대로 행하는 자가 왔습니다. 여기에 확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의 여부를 알고자 하여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경배하고 찬송까지 했습니다. 다시금 확신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확신 때문에 종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내가 확신한 것 때문에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몫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종종 보면 내가 확신한 것 때문에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삭의 결혼과 관련하여 이야기해 보자면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상대방 의사도 묻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례한 행동이겠습니까? 본인은 확신을 가졌는지 몰라도 상대방 쪽에서 확신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어떤 확신에 있어서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그 확신을 고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복음 때문에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면서(행4:19), 보고 들은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변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 대해서는 내 개인의 확신만이 아니라 그 확신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도 분명 함께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내가 확신한다는 것 때문에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일이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이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동의가 분명 있어야 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공개적인 죄를 지었으면 그 사람의 용서가 분명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것 때문에 사람의 용서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종의 자세는 매우 신중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에서 결정해야 할 몫까지 빼앗는 그런 모습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확신에 대하여 분별하고자 하는 그런 신중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후 내용을 보면 결국 리브가가 종을 따라 가게 되고 이삭을 만나면서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삭은 리브가로 인하여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위로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긴 구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 사실을 창세기 22장에서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4장에서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비하셨기 때문에 예비하신 바를 순탄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셔서 만나게 하시고 리브가와 함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올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비해 놓은 신 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순탄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물론 모든 여정이 아브라함의 종과 같은 여정은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 있는 선진들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과 같은 여정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요셉은 어떻습니까?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심지어 종에서 죄인 취급을 받게 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창39:2,23). 즉 무엇이 형통인가? 무엇인 순탄이고, 무엇이 평탄인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형통이요, 그것이 순탄이요, 그것이 평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의 모든 인생길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예비하신 바를 주시기 위해 순탄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그 삶 속에서 이웃 사랑의 열매가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