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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202설교 / 창세기24장50-67절 / 네씨로원수의성문을얻게할지어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2.02|조회수1,22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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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50-67

네 씨로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지난 시간에 이어 창세기 24장의 나머지 부분을 보겠는데, 앞선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죽고 난 뒤 대략 4년이 흘렀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한 가지 맹세를 하게 합니다. 바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구하되 가나안의 여인이 아니라 자기 고향 자기 족속으로부터 구하도록 하겠다는 맹세입니다. 그래서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 지역으로 떠나게 되고, 한 성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나로 하여금 순탄하게 이삭의 아내를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기도를 하는 도중에 한 여자 나오게 되는데, 기도한 내용대로 요구하자 기도한 내용대로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좀 더 분명한 확신을 위해서 종은 여자가 누구인지 묻게 되고, 그가 아브라함과 가까운 친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때 종은 분명히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을 올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확신 때문에 결혼이라는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 편에서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확인해야 했는데, 그 일을 위하여 종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서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자초지정을 설명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들의 결정이 어떠한지를 알려달라고 하는 내용이 4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의 내용 속에서 몇 가지 교훈 받을 수 있는 내용을 말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서 리브가를 예비하시되 리브가를 만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종의 모든 길을 순탄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에서부터 메소보다미아까지 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메소보다미아에서 리브가를 곧바로 만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것도 종이 기도한 것처럼 매우 순탄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변함없이 드러나게 되는데, 우선 50절과 51절을 보시면 종의 자초지정을 들은 리브가의 가정에서 이렇게 답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여기서 라반은 리브가의 오라비이고, 브두엘은 리브가의 아비입니다. 리브가의 가정에서 가장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리브가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브두엘의 아버지인 나홀은 그들은 함께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아들 브두엘을 낳았을 때 어떤 신을 소개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을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지 않는 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를 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그들 안에 어느 정도 종교의 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자기들 신만이 옳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섬기고 있는 신들에 대해서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란 신의 역사를 보니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데리고 가서 주인의 아들의 아내로 삼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저들 안에 종교의 씨가 있고, 그래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했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우리는 그분의 뜻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참된 종교가 무엇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세상에 많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 하나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부터 시작해서 탐심의 마음을 버리라는 것까지,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계명으로 요약된 도덕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의 거룩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명령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마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서는 덜 강조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무를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공로를 강조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나아가 율법주의인 것처럼 매도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 공로주의, 율법주의는 아닙니다. 우리는 공로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절합니다. 율법주의 또한 철저히 거절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 무엇으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에 공로가 들어오는 것은 철저히 거절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말하는 것도 거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안에 명령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로 있습니다.

제가 지금 계속해서 마땅한 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마땅한 바가 공로주의, 율법주의를 거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누가복음 17에 있는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7절 이하 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마땅한 바라 바로 이것입니다. 명령대로 다 행한 후에 우리의 자세는 10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여야 할 일을 했지만 여전히 무익한 종임을 아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임을 아는데 거기에 어떻게 공로주의가 들어올 수 있고, 율법주의가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내가 한 것 때문에 상급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마땅한 바라고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공로주의,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거절해야 하지만, 우리의 마땅한 바, 의무에 대한 순종에 대해서는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거기에 기도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을 명령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고 할 때 우리의 순종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것은 결코 거부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공로주의, 혹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가 어디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52절과 53절을 보시면 저들의 결정에 대하여 종은 다음과 같이 행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우선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였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감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종은 순탄하게, 평탄하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와 경배를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기도 내용을 보면 주인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뜻으로 순탄하게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 되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종은 그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확인될 때마다 우리는 이 종의 자세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 없습니다. 본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였지만 우리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공의의 형벌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견인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한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은혜를 거두시되 완전히 거두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감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어떻게 찬송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까지 주시는 것입니다(살전5:18).

실제로 욥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만이 아니라, 받은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만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은혜라고 여긴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적용해 보자면 순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만 감사와 찬송, 영광을 올려드린 것이 아니라, 혹 순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다면 거기에는 감사와 찬송,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감사가 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성도의 생은 하나님의 은혜에 은혜를 더한 삶일 뿐입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은혜의 과잉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은혜의 결핍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처럼 종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10절에서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났다고 할 때 좋은 것, 다시 말해 은금 패물과 의복 등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그리고 그의 오라비와 여기서는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일종의 결혼이 성립되어 주는 예물인 겁니다.

이 일 후 종과 종과 함께 한 자가 거기서 유숙하고 떠나고자 합니다. 54절에 보시면 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그러나 리브가의 오라비로부터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에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55절입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그러니까 종은 속히 이 일을 알리고 싶어 하는 마음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주인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평탄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여행의 여독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가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가정에서는 딸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리브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56절입니다.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혹 이런 반응 때문에 종이 상대방 입장을 너무 헤아려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주 살핀 내용 속에서 우리는 종이 상대방에 대하여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의 마음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금 종의 입장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인도하심에 대하여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지금 종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바 그 사명에 대하여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의 자세에 대하여 리브가 쪽에서는 그럼 리브가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말합니다. 57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그리고는 리브가에게 묻습니다. 58절입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그만큼 하나님께서 순탄하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주부터 보고 있는 창세기 24장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도 이런 인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려움 없이 순탄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시는 것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거두실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생 가운데 순탄함이 있는 것,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순탄함이 아니라 역경이 있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역경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그 은혜를 거두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평탄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할 수 있지만 기도한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과 역경으로 연단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본을 따라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그래서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과정 속에서 리브가의 부모 그리고 그의 오라비인 라반 등은 리브가를 보내게 되는데, 여기서 축복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59절과 60절을 보시면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우선 축복의 내용 가운데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는 부분을 보면 정확하게 사라에게 주신 약속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라의 본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를 사라라고 고쳐 부르도록 하셨는데, 그 뜻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입니다(17:15-16). 그런데 동일한 뜻을 지금 리브가 가정에서 리브가를 보내면서 축복의 내용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자손의 번성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게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덕담을 한 것처럼 리브가의 가정에서도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곧이어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란 내용이 덧붙여졌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보면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는 부분에 대해 자손의 번성을 복 빈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승리의 개념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 이것을 통해 생활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바를 예언하게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 편에서는 덕담을 하는 듯 일상적인 의미에서 축복하는 것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을 통해 놀라운 복을 예언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과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창세기 315절입니다.

창세기 3 15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 말씀은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내리시는 형벌의 내용입니다. 물론 뱀은 도구일 뿐입니다. 뱀을 도구로 한 사탄이 실제 형벌의 대상으로 있는데, 그 형벌이 무엇이냐?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치명타를 준다는 것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뿐이다. 어느 정도 상처는 입히겠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치게 할 정도는 되지만 회복 불가능한 모습은 아니란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여자의 후손이 사탄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창세기 315절은 소위 원복음으로 불리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였지만, 그리고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의 모든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복음의 내용이 지금 리브가 가정에서 리브가에게 축복의 내용으로 언급이 되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들은 복음을 모릅니다. 종교의 씨앗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을 섬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통해서도 원복음과 같은 내용을 예언하게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신다고 할 때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내다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으로 풀고 있는 것처럼(3:16), 리브가에게 축복한 내용도 단순히 세상적인 의미에서 덕담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예언하시는 성격으로 복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탄의 모든 권세가 무너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서 교회에게 그 승리를 안겨 줄 것이다.

 

여러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약속의 말씀은 사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도 증거가 되었던 말씀입니다. 그 복음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증거 되었고, 이제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에게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리브가에게 만 증거 되고 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삭의 아들이 야곱에게, 그리고 열 두 아들에게 증거가 되고,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증거 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증거 된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을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한 가정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요한복음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증거 합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고 증거 합니다(1:11). 복음이 들려졌지만 들려졌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우리는 믿게 된 자로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시는데(1:12), 우리가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그럼 이 일이 우리에게 원인이 있어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혈통도 아니고 육정도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1:13).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기에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찬송이 아니겠습니까? 경배와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사탄의 권세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상, 리브가에게 축복한 말씀처럼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그 씨가 우리를 사탄의 모든 권세에게 해방시키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게 해방시키시는 분인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리브가에게 말한 이 축복의 내용은 저들 편에서는 일반적인 말을 한 것일 수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복음의 내용을 심겨주셨습니다. 이제 61절 이하 67절은 리브가가 이삭을 만나게 되는 내용인데, 61절은 자기가 살던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내용입니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맨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리브가도 역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게 됩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뒤로 한 것입니다. 어쩌면 두려울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낯선 곳에 가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마음까지 주장하심으로 종을 따라 나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계속해서 62절을 보시면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고 기록합니다. 본래 이삭은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느냐? 네게브 지역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을 때 헤브론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계속해서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이동한 것이 아니라, 따로 살았던 겁니다. 왜 따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롯과 이별한 것처럼 소유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분가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과 이삭이 따로 살았는데, 리브가가 올 때쯤 브엘라해로이라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묵상하다가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63절을 보시면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경건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이삭은 매일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습관을 가진 것 같은데, 이 날 역시 동일하게 묵상하다가 누가 오는 것을 보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삭만 본 것이 아니라 그런 이삭을 리브가도 보았습니다. 64절과 65절을 보시면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여기서 우리는 리브가의 정숙함도 보게 됩니다. 이미 성경이 리브가에 대하여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창세기 2416절입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만큼 순결을 지킨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건을 잃어버린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람을 만나기까지 순결을 지키는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그 말씀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내용도 있는 것입니다(6:2).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남녀 사이에 순결을 지키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늘날 시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죄의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홍수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된 경건을 가지는 것, 특별히 그런 경건을 가진다고 할 때 결혼에 앞서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이라고 할 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 그것이 참된 경건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기에 있습니다.

 

종은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이삭을 맞이하게 되고 그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게 되는데, 66절과 67절을 보시면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지난주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죽음보다 앞서 이삭을 위하여 이삭의 짝을 예비해 두셨고, 사라의 죽음 이후 리브가를 통하여 이삭을 위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이런 위로를 주시기 위한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종을 인도하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리브가를 떠나보내게 되면서 그 가정에서 축복한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짧은 한 구절 속에서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을 통해 말씀하신 원복음의 내용이 들어 있기 하신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이 우리에게 위로함을 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는 복음이 아니고서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위로를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 복음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밟으심으로 해방시키신 것, 그래서 더 이상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도록 하신 것, 나아가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는 사탄의 권세 아래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의 능력 아래 사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한없는 위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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