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5장 1-18절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삭을 향한 복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은 창세기 17장에 잘 나타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8절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성경 곳곳에서 증거가 되는데, 성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증거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7절에 보면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핵심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것이 구약 처음부터 신약 마지막까지를 연결해 주는 하나의 핵심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핵심적인 내용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으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창12:2). 창세기 12장에서만이 아니라 13장(16), 17장(4-5), 18장(18), 22장(17)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창12:3). 이것 역시 12장과 더불어 창세기 18장(18), 22장(18)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약속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육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나온 이스마엘조차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혈통으로 보면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삭에 대하여 어떤 표현을 씁니까? 외아들, 혹은 독자라는 말을 씁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고(17), 이미 우리가 살폈던 창세기 22장(2)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독자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심지어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마엘 외에 또 다른 아들들이 있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삭에 대하여 외아들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부터 이스마엘을 분리시키시기도 하셨습니다. 창세기 21장 10절의 말씀처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혈통으로서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런 측면에서 이스마엘도 이삭과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하여 장사하게 되지만, 그는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할 때,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할 때, 이스마엘이 그 대상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의 성격은 오늘 본문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관련하여서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앞서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자녀가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에는 이스마엘의 자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자면 그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오직 이삭밖에 없다는 강조가 전체 본문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기록의 순서로 보면 사라의 죽음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별하고 난 뒤 결혼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렇게 문제될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주석가들은 사별하고 난 뒤가 아니라 사별하기 이전, 즉 사라가 살아 있을 때 결혼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4장 19절에 의하면 백 세가 되었을 때 이미 아브라함의 몸은 마치 죽은 것과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00세 때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았는데, 그 이후, 그것도 사라가 죽은 이후라면 아브라함 나이가 대략 137세를 넘어섭니다. 그때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로마서의 말씀과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주석가들은 사라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아브라함이 또 다른 아내를 얻었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때 한 가지 염두 해 둘 것은 성경 기록의 순서가 사라의 죽음 이후 그두라를 통한 자식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시간적인 순서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 것을 기록합니다. 기록상으로는 아브라함의 죽음 이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 그들이 태어난 것처럼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가 언제냐 하면 아브라함 나이 100세 때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나이 40세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이후 에서와 야곱을 낳을 때가 60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언제 죽었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175세입니다. 즉 아브라함 나이 대략 160세 정도가 되었을 때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것입니다. 죽은 이후가 아니라 죽기 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기록한 순서로 따질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두라를 후처로 맞이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사라가 살아 있을 때 하갈을 아브라함의 아내로 준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율법이 기록되어 주어지기 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창2:24), 혹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들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도덕법으로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새겨져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다처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로 있습니다. 만약 그두라를 사라가 죽기 전에 아내로 삼았다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본문의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일일이 밝히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해도 된다는 측면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그런 죄악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녀들이 있지만, 약속의 자녀는 이삭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2절 이하 4절까지를 보면 그두라라는 아내를 통해 낳은 자식들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육신적으로는 이스마엘부터 시작해서 이삭,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여려 명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신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로 있는가? 큰 민족에 속하는 자로 있는가? 은혜언약의 핵심이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그 말씀의 대상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두라로부터 난 자식들을 이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이것은 마치 하갈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이삭으로부터 분리시킨 내용과 같습니다. 물론 이스마엘은 쫓겨났습니다. 쫓겨나게 된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사건을 박해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갈4:29). 그래서 사라는 종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면서 쫓아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라의 마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다만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과정 속에서 오늘 본문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스마엘의 경우는 실제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것이 거의 없이 쫓겨났습니다. 창세기 21장 14절에 의하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 주고서 떠나보내게 되었던 겁니다. 혹 그래도 아브라함의 자식인데 아브라함이 너무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본문을 설교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 편에서는 이 일이 근심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이삭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약속하신 것이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것인데,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오늘 본문 12절 이하 18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두라의 자식들에게는 어느 정도 재산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곧이어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을 주고 난 나머지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삭을 떠나 동방으로 가게 하였는데, 왜 이렇게 하였는가? 외적인 소유와 관련해서 이해하자면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 그들에게 준 것으로 인하여 불화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는 이삭이기 때문에 이삭에게 돌아간 것으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자주 말씀드리지만, 구약은 외적인 복을 통해 영적인 복의 내용을 상기시킬 때가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라는 말은, 그만이 하나님과 은혜언약을 맺은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약속을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창세기에서 이삭에게만 독자라는 표현, 히브리서에서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만이 은혜언약의 대상이요, 그만이 약속을 따라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본문 11절은 뚜렷이 증거 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조금 있다가 여기에 대해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동일한 복이 지금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느냐 하면 다른 모든 자녀에게가 아니라 이삭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가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소수보다는 다수에 있습니다.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면 사라의 자녀는 오직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두라의 자녀는 여러 명입니다. 그래서 그두라를 주목하기 쉽습니다. 오늘 성경 봉독으로 사무엘상 2장을 읽었지만, 사무엘상 1장에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는데,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해 소개합니다. 왜 괴롭게 하느냐?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고,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습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한나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으로 괴롭힙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괴롭히고, 많은 자가 적은 자를 놀린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시대는 오늘날처럼 자녀를 낳지 말자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사라를 통해서는 한 명이고 그두라를 통해서는 여러 명입니다. 세상 시각은 어디를 주목하느냐? 그두라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조차 주목하는 기준이 그런 방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를 주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많다는 곳을 주목합니다. 교회 건물이 화려한 그런 교회를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는 대상,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혹 다수의 논리로 오해하실 수 있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다수 혹은 소수의 논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이 외적인 어떤 풍부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바 자신의 말씀을 주고 또 주고 있는 그들을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시적 교회라고 할 때 그 안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습니다(마13:24-30 참조). 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시적 교회 안에 말씀을 듣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고,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고, 좋은 땅에 떨어지는 비유입니다(마13:3-8 참조).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마음에 떨어지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에서 말씀에 대한 결실이 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잃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가라지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 교회 안에 있더라도 알곡을 주목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알곡을 주목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는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일일이 알려주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란 왕이 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신 왕으로 있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랐던 왕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그런 아버지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가 개혁했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데 일생을 바쳤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에 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가라지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알곡으로 정하시고 그의 마지막 때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두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쪽은 그의 마지막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모든 인생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을 받을 정도로 악하게 지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주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열매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알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알곡처럼 보이지만 가라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 주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마치 알곡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알곡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라지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도 누가 알곡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은 주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으며, 말씀이 있는 곳에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서조차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을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 역사 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그런 말을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올바르게 해석되고 있는 그런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성경은 만인구원설이라든가, 보편구원설을 거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만인구원설이라든가, 보편구원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가 모든 자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뜻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바로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런 분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해석되는 곳, 그곳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진리가 진리답게 선포되는 곳,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모든 자가 아니라 언약 백성을 주목하신다고 할 때, 바로 그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아브라함의 생애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그가 가나안 땅으로 오기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가 우상을 섬겼다는 구절 자체는 나오지 않지만, 여호수아서에 보면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수24:2). 아버지가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그의 집안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에 들어왔을 때 그곳에서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가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함께 떠나온 조카 롯과의 이별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롯을 구출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이 배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이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부리게 하셨지만, 대적으로부터 승리를 주시는 것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아가게 하셨던 겁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창15:1). 내가 너를 지키는 자요, 네게 있어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대상은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이 말씀의 뜻을 깨닫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셨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심지어 창세기 16장에서는 여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까지 낳게 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창15:4). 좀 더 구체적으로 사라를 통해 낳게 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창17:19). 그러나 여전히 믿지 못하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웃게 되는 일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웃음을 웃음으로, 다시 말해 처음에는 비웃는 듯 하였지만 기쁨과 감사의 웃음으로 바꾸셨는데, 바로 100세 때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셨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 그만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이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명령 자체보다 명령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100세에 주어진 이삭조차 하나님보다 더 큰 상급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가장 소중하지만 그 소중한 독자조차 주의 말씀을 따라 바칠 수 있다는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간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부활 신앙을 가졌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에베소서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결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물로 있다는 것은 그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부르실 때부터 그의 인생 전체를 감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고백,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은 이것을 매우 잘 정리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읽어드리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로 시작할 때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수고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수고보다 더한 수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인 겁니다.
오늘 본문 7절 이하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죽음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형벌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창2:17).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으로 있고,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적인 죽음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곧바로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고, 이후 육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이후로는 육체적으로는 생명을 가진 자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로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 인생으로 있습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누구도 예외 없이 인생에 있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히브리서 9장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말씀할 정도입니다(히9:27). 오늘 본문 12절 이하 18절에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도 소개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17절에 보면 이스마엘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도 죽고, 약속을 받지 못한 자도 죽습니다. 죽음에 있어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음 자체를 맞보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외 없이 영적인 죽음으로 시작한다는 측면에서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육체적인 죽음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서의 삶은 히브리서가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나그네 인생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죽음은 그런 나그네 인생을 마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약속을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물론 기뻐할만한 일, 즐거워할만한 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할 만큼(시90:10)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이 되어 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대상인 자기 백성을 떠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이 땅에서는 수없이 많은 죄를 지으면 살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자로 살지만, 그런 우리를 죽음을 통해 완성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겁니다. 바로 형벌로 말미암은 죽음조차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죽음을 통해서도 은혜가 증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죽을 때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약속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항상 편안하게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를 보십시오.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조차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죽는가?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고 말씀합니다(히11:36-37). 우리는 믿는 자로 있기 때문에 좀 편안하게 죽으면 좋겠다, 가장 이상적인 것이 잠을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내 뜻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스마엘도 죽는다고 할 때 죽음의 외형 자체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불신자 가운데 병들어 죽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런 일이 신자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테러를 당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건 사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모든 사고 속에서 신자들은 항상 보호를 받는 것인가? 아무런 사고를 당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치기도 하고, 어려움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통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신자나 불신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는데, 불신자의 경우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경우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주님과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의 수고와 슬픔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이 끝나면 영광만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불러 가신다고 할 때 거기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은 그의 죽음으로 나그네 인생을 마쳤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시련 가운데 넘어지는 일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수고와 슬픔을 맛보지 않도록 죽음이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슬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에 대하여 살펴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육신적으로 이별하는 것은 슬플 수 있으나 성도는 슬픔이 지나쳐 믿음이 없는 자처럼, 소망이 없는 자처럼 반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을 장사하게 되는데,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헷 족속에게서 값을 주고 산 막벨라 굴에 장사하게 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브라함에게 육체적으로 보자면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만 복을 주셨는가? 이삭에게만 복을 주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주고자 하신 복을 그에게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복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스마엘의 자손과 조금 비교할 수 있는데, 우선 12절 이하 18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외적으로 보자면 이삭만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것을 기록합니다. 반면 이스마엘에게는 열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다 하나의 족속이 되었습니다. 외적으로만 보자면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이 더 잘 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복으로만 보자면 이스마엘도 복을 받은 자라고 분명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이 바로 은혜언약으로서의 복이요, 영적인 복인 것입니다.
특히 11절을 다시 보시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그대로 주어지고 있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사람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땅에 남아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엇만은 사라지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만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0장 8절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중세를 지나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예로 성경이 이신칭의를 말한다고 할 때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가 있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거절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조된다고 할 때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되는 일들도 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믿음이 선물이라는 사실(엡2:8), 그리고 그 믿음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주셨다는(행13:48) 것이 강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루터나 칼빈 등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달리 해석하는 일들이 교회 역사 속에서는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루터나 칼빈이 이 땅에 남아 있는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경에 대한 이해와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말씀답게 내놓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그대로 보존하시고, 바로 자기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성도는 바로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 하나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리가 있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정당하게 해석하여 내 놓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다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의 의를 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교훈이 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교정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언제까지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가실 때까지 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점과 흠이 항상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 가다가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완성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만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도록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