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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301설교 / 창세기25장24-34절 / 에서와야곱-장자의명분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3.01|조회수76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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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24-34

에서와 야곱 - 장자의 명분

 

지난 시간 우리는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낳은 아들, 즉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선택과 유기와 관련된 내용을 살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택과 유기, 즉 예정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유익을 주지 못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예정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게으르게 만들고 나태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되었다면,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하여 견인의 은총까지 주어진다면, 그래서 구원이 확실하다면 굳이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정을 말한다는 이유로 게으르거나 나태하도록 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에베소서 1장은 예정을 말하면서(3)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고까지 말씀합니다(4). 그리고 4장 이하에서는 그 목적을 위한 권면으로 열매 맺을 것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만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부분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성경이 게으르게 만들고 나태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정에 대해 말하지만 누가 선택되었는지, 누가 유기되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택되었다고 해서 일찍 부르심을 받을지, 아니면 늦게 부르심을 받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는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부르시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위하여 명하시거나 권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명령과 권면을 통해 사람이 행하는 일이 있지만, 성경의 전 가르침을 통해 깨닫는 것은 그 행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는 것이고, 때문에 사람의 행함은 사람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17:10). 달리 말하면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 게으르거나 나태하도록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정의 내용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정하신 바대로 된다고 할 때 거기에 인간에게 돌릴 수 있는 공로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예정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아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안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정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숨겨 놔야 할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인 이상 드러내고 가르쳐야 할 말씀입니다. 개혁자들은 귀 있는 자들이 이 말씀을 듣게 하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정이 유익한 것으로 있음을 알았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 내용인데, 이것이 지난주 살핀 23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2523절을 다시 한번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여기서 큰 자는 형 에서입니다. 그리고 어린 자는 동생인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보편적인 질서를 따르자면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할 것이라는 말씀 역시 동일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야곱은 사랑하시지만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내용으로 설명이 됩니다(13).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를 더 강하게 하실 것이란 겁니다. 사랑할만한 이유가 그에게 있지 않지만, 그리고 사랑할만한 이유를 미리 내다보신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야곱을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를 더 강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시면 뜻밖의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24절 이하 26절을 보시면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여러분,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그 태어나는 모습을 통해 에서의 강함과 야곱의 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자로 있었지만 야곱의 경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혹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결코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고, 그래서 그 일로 인하려 리브가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입니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어떠하냐?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지만 형 에서가 더 강한 자로 태어나게 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인가?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그것은 작은 씨로부터 시작해서 큰 나무를 이루는 것으로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출생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 야곱을 사랑하시지만, 그리고 야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강하게 하시겠지만, 그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을 성취하시겠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온갖 역경과 고생이 가득할 것이라는 것을 태어나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비교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삭에 비해 이스마엘은 큰 자로 있었습니다. 이삭보다 훨씬 전에 태어났고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이삭이 자라는 동안 이스마엘은 이삭을 놀리는 자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마엘은 경우는 이삭보다 일찍 결혼했다고 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자녀도 12명이나 되는 수를 낳았습니다. 반면 이삭은 어떻습니까? 40세에 결혼해서 6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문의 내용처럼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비교해 보면 외적으로는 분명 이스마엘이 강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더 잘되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그들보다 강한 면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복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는가? 이삭입니다.

동일하게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처음부터 에서는 야곱보다 강한 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났습니다. 심지어 그 외형을 보십시오. 25절에 의하면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낱 어린 아이에 불과하지만 그의 외모는 사내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야곱은 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성하고 난 뒤의 모습을 묘사할 때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반해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7:11). 그렇다는 것은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사내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면 야곱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미 외적인 모습을 통해 한쪽은 강한 자, 한쪽은 약한 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27절은 어떻습니까?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의 모습처럼 에서는 강한 자로 장성했고, 야곱은 약한 자로 장성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말씀하셨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선언을 하셨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도록 하기 까지는 어린 자에게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역경 고생 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마실 것인데, 예정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야곱의 경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반면 에서의 경우는 그들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것으로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나중에 확인하게 되겠지만 미리 조금 맛보자면 창세기 32에서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는 의미입니다(28).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내용 때문에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기도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면 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까지 변경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까지도 변경시킬 수 있습니까?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난 뒤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의미입니다(30). 하나님 편에서는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지만, 실제로는 이긴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생명이 보전된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져 주십니까? 창세기 2523절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이겼다고 말씀하시는데, 사람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겼다는 뜻은 어떤 뜻입니까? 단지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는 육신의 싸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모든 복락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럼 이것이 야곱에게만 약속된 내용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를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가? 우리 역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한번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 앞에 서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고집이 꺾을 것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가는 길을 반드시 막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선택하시면 선택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간섭하시고 또 간섭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 고집대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모든 복락을 반드시 주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전리품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적 전쟁을 통해 이기게 하시고, 이기고 난 뒤 얻게 하시는 모든 복락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지만 그 생명이 보전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심으로 결국 승리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주어지는 결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선택의 결과로서 끝까지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마땅히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면 알수록 더 많은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12:1) 우리 몸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것도 즐거이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장자의 명분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내용이 23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할 때 그 완성이 훨씬 뒤로 미뤄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의 명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조금 전에 27절을 확인한 바 있지만 에서와 야곱이 장성하고 난 뒤 에서는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장막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자로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사랑하시지만 에서는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처럼 아버지인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반면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로 태어날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로 있었습니다. 장자이기에 아버지 이삭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로 있었고, 뿐만 아니라 예언의 말씀이 있었지만 예언 때문에 에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축복도 빼앗기게 됩니다. 외형은 야곱의 꾀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할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뜻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 23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는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는가? 여러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말씀하실 때 우리의 선조들은 지상에 있는 땅이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이 진정한 본향임을 알고 그곳을 바라보며 살았다고 히브리서 11장은 증거 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은 외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할 때 외적인 것만을 바라보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대하여 이삭이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많은 자식들이 있지만 그들이 제외되고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로 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도 동일한 뜻이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알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야곱을 사랑하기보다는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이삭은 자기 아들에게 예정된 유산보다도 음식을 더 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무상의 계약을 힘닿는 대로 전복시키려 했다고까지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기를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이삭은 마치 그리스도의 모형처럼 잠잠히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게 되는 내용 속에서는 매일 하는 것처럼 들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복시키려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이삭이 그리스도의 모형처럼 비취는 일이 있고, 또한 그가 습관을 따라 경건 훈련에 매진한다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부패성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곧이어 나오는 창세기 26장을 통해 더욱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이삭 역시 동일하게 처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도 역시 부패성을 가진 인간이란 것입니다. 특히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먹는 것에 대한 탐심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 에서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편애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는데, 친 자식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그것이 선택과 유기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때 에서의 경우 유기되었으니까 미워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쨌든 리브가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야곱을 사랑하였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야곱 편을 드는 것처럼 있다면 여기에도 우리는 인간의 부패성의 한 면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에게 부패성이 있고, 그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택을 방해하는 것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죄가 하나님의 선택을 막은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의 선택을 실패하도록 한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죄조차 해결하시고서 자신의 선택이 불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29절 이하를 보시면 에서의 어리석음이 있고 야곱의 간사함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야곱에게 주시는 역사를 펼치십니다. 29절 이하 33절을 보시면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우선 하나님이 주신 도덕법으로 야곱의 행동을 판단해 보면 형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부터가 하나님 앞에 죄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형으로 하여금 장자의 명분을 포기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736절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하여 야곱이 에서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일에 대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냥하고 돌아오는 형이 배고픈 줄 알고 자기가 요리한 것 외에는 먹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 놓고 장자의 명분을 거래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그 사람의 자질에 대하여 미리 보시고서, 미리 예견하시고서 그를 선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어디에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자질이 보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일반 이웃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면 자기의 친 형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장자의 명분에 대한 마음 때문에 악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죄악 된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34절을 보시면 에서의 잘못과 관련하여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장자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아들로 아버지의 복을 누구보다도 많이 누릴 수 있는 권한과도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할 때 그 복은 영적인 복이고, 장자로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에게도 영원한 하늘 생명을 물려줄 수 있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복을 배고프다는 이유로, 지금 현재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차 버리고 말았습니다. 장자로 태어나 장자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외적 조건은 갖추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복보다는 지금 당장 보이는 작은 물질 때문에 영적인 것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고 버리신 자가 하나님의 간섭이 없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즉 성령의 은총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나 세상적이요 육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적이요 육적인 사람은 이 땅에서 금방 사라져 가는 것만을 즐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 결과 에서는 장자권이 현재 생명에 보탬이 되지 않으니까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여기고 신령한 것을 땅의 썩어져 가는 것과 교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은총으로 다스림 받는 자들은 자기들의 고귀한 소명을 저버릴 만큼 육체의 덫에 깊이 빠져들지 않습니다. 물론 넘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체에 덫에 빠져드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만들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심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을러도 좋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선택받았다는 것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교회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견인의 은총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면 견인의 은총까지 주십니다. 그러나 넘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항상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권면까지 교회를 향하여 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34절을 보시면 장자의 명분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으로 팔았을 때 팥죽을 먹는 모습과 관련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일어나 갔다.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런 에서에 대해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과 관련하여 히브리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12 14절부터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2:14-17) 우선 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도 포함됩니다. 바로 그들과 화평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죄악 된 모습까지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화평하되 거룩함을 따르는 자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특히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교회가, 성도가 거룩함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거룩함을 유지해야 되는데 거룩과 반대되는 길로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예로서 몇 가지를 언급하는데, 첫 번째가 음행하는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서의 예입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특히 22절 이하 24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판 장자의 명분과 관련해서 그것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택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른 곳은 바로 이런 곳이다. 장자들의 모임이 있는 곳, 바로 교회다.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행하는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것이요,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거룩이란 무엇인가? 한 그릇 음식이 우리 육체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어떤 문제가 있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거나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자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에서는 그와 같은 자로 있는 겁니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배고파 죽겠다는 이유로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것을 차버렸습니다. 잠시 잠깐의 고통 때문에 영원한 영광의 내용을 차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그런 자가 없는가? 있습니다.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의 것을 포기합니다. 잠시 잠깐 누리는 것 때문에 영원히 누리는 것을 차 버립니다. 그만큼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통해 경고하시는 내용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에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을 향해서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주의 백성도 넘어질 수 있지만 넘어진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말씀으로 경계토록 하십니다. 주의하라고 알리십니다. 에서의 경우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지만, 너희에게는 이런 말씀이 회개의 기회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의 것을 내려놓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9절부터 보시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19-21) 여기 보면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는데,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땅입니까? 아니면 하늘입니까? 그러면서 2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여러분, 누가 재물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땅에 있는 것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다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는 이상 모든 사람은 다 재물로 대표되는 것을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은 어떤 자냐? 25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에서의 경우는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의 것을 하찮게 취급했다면, 주의 백성들은 결코 하찮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 아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자입니다. 왜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말합니까? 그것에 대한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한다고 해서 팔리는 문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의 것을 어떻게 땅의 것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고, 그에게 장자의 명분에 대한 사모함을 주셨던 겁니다. 그가 장자의 명분을 사게 된 방식 자체는 점과 흠이 있지만, 적어도 땅에 있는 것보다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아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그런 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마태복음 63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를 위해 땅의 것이 필요하지만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더불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4:11). 왜냐하면 하늘의 것 때문에 땅의 것을 절제하고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도록, 그래서 땅의 것 때문에 하늘의 것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오히려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자족할 수 있도록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의 가치,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뿐인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는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린 자로 있었고, 그것에 대한 사모함을 가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실제로 선택의 결과로서 그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복을 저와 여러분이 받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도 동일하게 그것에 대한 사모함을 가져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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