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6장 12-22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일컫는 모든 백성과 관련된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창12:2)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17:7).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스마엘은 제외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만이 아니라 그두라의 아들들도 제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는 오직 이삭만이 약속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자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다르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리라.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만민이 복을 받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한 것같이 너도 내 말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해서 그 약속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전적으로 믿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그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분명 흉년이지만 그 땅에 머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물렀습니다. 잘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고 말씀하신 땅으로 갔을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혹 자기 아내의 아리따움으로 인하여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사실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삭은 순종이 아닌 불순종의 열매를 낳은 것처럼 거짓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거짓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들키지 않고 있을 때는 거짓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그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를 보호한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그의 거짓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도록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로 있지만 그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담대히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연약하고 점과 흠이 있고 실수가 있고 죄악을 저지르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철회가 되거나 물리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연약하고 점과 흠이 있고 실수 또한 많지만, 그래서 죄악을 저지르는 일들이 항상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교훈하시고 책망하시면서 바르게 하시고 의로써 교육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때로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믿을만한 분인가를 누누이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섭리의 역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우연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할 때 그 흉년조차 우연이 아니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혹 그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연이 아님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은 바로 자신 백성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이삭에게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선 12절에 보시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였다고 할때 어떤 이들은 그랄 지역에서 자기 소유로 된 땅을 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이삭과 더불어 야곱도 장막에 거주하였다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히11:9). 어떤 집도 건물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을 뿐입니다(히11:13). 뿐만 아니라 이후 본문을 보면 이삭이 그랄에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런 내용들을 생각해 본다면 땅의 일부를 샀다기보다는 땅의 얼마를 임대하여 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임대하여 농사를 지었을 때 농사 지은 해에 얻은 양이 얼마나 되느냐 하면 백 배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을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기초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복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복을 주실 때 외적인 복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복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12절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여 백 배나 얻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를 주목하느냐? 농사하였더니 그 결과로 백 배에 달하는 결실을 했다는 데 주목합니다. 결과를 주목하지 결과를 있게 하신 원인자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인을 주목하고자 한다고 할 때도 농사를 지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즉 보다 먼 원인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원인을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돌립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결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것을 주실 때 외적인 것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지 않습니다. 외적인 것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노력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대하여 해야 합니다. 아무런 열심도 없이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자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목하도록 하시는 것은 가까운 원인이 아니라 먼 원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일한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주목하길 원하십니다.
바로 그런 뜻에서 히브리서를 통해서는 가나안 땅에 대하여 약속을 받았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가나안 땅 자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봤다고 증거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히11:16). 이 땅의 복은 당연히 하늘의 복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고, 역으로 이 땅의 복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늘의 복이 있음을 아는 자로서 감사할 줄 아는 자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원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시는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주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많게 하셨을 때도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고, 역으로 많은 것 중 일부를 가져가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니 욥처럼 주신 모든 것을 가져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면서 따지라는 것이 아니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특히 주시고 거두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욥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자세로서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 내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창26:3)을 성취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경우 영적인 복을 알리시는 방식으로 외적인 복을 통해 그렇게 하실 때가 많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즉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외적인 복을 주심으로 인하여 영적인 복을 바라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외적인 복을 주시면서도 그 복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즉 그 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경우 그에게 주어진 외적인 복으로 인하여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면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여기 보면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러 받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 소유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으로 말미암아 그랄 땅에 와서 농사를 지었을 때는 올 때보다 더욱 많아졌습니다. ‘백 배’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거부도 그런 거부가 없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조금 뒤에 확인하게 되겠지만 블레셋 왕이 네가 우리보다 강하다고 말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는데, 쉽게 말하면 남의 땅에 들어와서 자신들보다 잘 되는 모양으로 있으니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일은 이삭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21장 25절에 의하면 아브라함 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왜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는가?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서 거주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땅 백성보다 더 잘되는 모습이 있으니까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빼앗았던 겁니다. 우물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그것을 빼앗은 것입니다.
지금 이삭도 동일한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잘됨에 대하여 시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빼앗았다면 이삭의 경우에는 그 우물을 다 흙으로 메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삭이 거주하고 있던 곳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아버지 아브라함 때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우물이 있었고, 그곳에서 농사를 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을 허락하셨는데, 이삭의 복을 보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질투하여 파 놓은 우물을 다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물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물을 마셔야 하고 짐승도 물을 마셔야 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생명을 직접적으로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매우 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외적인 복을 주셨는가? 그리고 그 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는가? 외적인 복에 안주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칼빈은 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현재 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축복은 순수무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고난이 동반되어 있어서, 결코 우리가 그것을 조용히 탐닉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복을 주시는 분이지만 외적인 복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그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보게 하셨다면, 이 땅에서 주시는 복 역시 그 복만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 복으로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외적인 복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결코 그 복으로 인하여 안주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 때문에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복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서 그 복을 기뻐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있다가 사라질 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상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도는 이 땅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16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흉년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그랄로 왔을 때 이비멜렉은 받아 줬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 속에서도 이비멜렉은 이삭에게 선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거부가 되었을 때는, 그리고 지금 16절에서 증거 하는 것처럼 블레셋 왕보다 더 강성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물론 왕 자신이 시기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시기 때문에 이삭으로 하여금 떠나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란 한결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친근해 하면서 믿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의심하고 질투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랬다가도 저랬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아비멜렉과 같은 자들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누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분이 아닙니다.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한번 미워하기로 하셨다면 끝까지 미워하십니다. 어떻게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실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분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불의함은 없으십니다. 이미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출생과 관련하여 살핀 바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신자는 이런 내용 속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로 하시고 난 뒤 사랑 받을만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을 멈추시는가? 본래는 죄 없는 자로 만드셨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왔을 때 그 죄 때문에 사랑하기로 하신 자들을 미워하시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만한 모습으로 만들어내고야 마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 놓으신 사랑인데, 어떻게 하나님 사랑에 있어 변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의 모습 때문에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는 믿음을 좀 더 확고하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도 한결같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시는 목적이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고치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혹 누군가 나에게 친절히 대하고 정중하게 대하다가 바뀔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잘 대해줄 때는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잘 대해주다가 해를 끼치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맺고자 하시는 열매와 상관없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인내로서 견뎌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7절 이하에 나오는 이삭의 자세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17절에 보시면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그동안 지냈던 곳에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랄 지역 자체를 완전히 등진 것은 아닙니다. 본래는 그랄의 평원에서 지냈다면 이제는 그랄의 골짜기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삭은 자신과 및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서 다시금 우물을 파게 됩니다. 18절에 보시면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그러니까 전혀 없던 우물을 새롭게 판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 파 놓은 우물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웠습니다.
왜 우물을 메웠을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그들이 그랄 골짜기까지는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자주 나오는 지역이라면 굳이 우물을 메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이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물을 메웠다는 것은 그들이 여기까지 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누군가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살핀 바 있지만 이삭에 대한 시기 질투만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도 그 땅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물을 빼앗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더 이상 그와 관련된 사람이 정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들이 정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우물을 메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저들은 이웃 사랑의 정신과는 먼 자들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블레셋 왕이 흉년 때 이삭을 받아 줬다는 것, 그리고 리브가가 아내임을 속였지만 그 땅에 머물러도 좋다고 한 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백성과 달리 블레셋 왕은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일이 바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와서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다시금 파서 생활하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좋은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좋은 않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미움을 당할 수 있고, 시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지 못한 상황 가운데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적용해서 말씀드리면 사람들의 시기 질투, 악함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모든 것이 다 빼앗기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는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상의 것은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빼앗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까지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결코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삭의 경우 샘 근원을 얻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런 이삭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이삭이 팠던 우물을 빼앗아가게 됩니다. 20절을 보시면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그래서 다시금 장소를 옮겨 우물을 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빼앗아가게 됩니다. 21절을 보시면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에섹’이라는 말이나 ‘싯나’라는 말은 다툼, 대적함이란 뜻입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에 대하여 다투었다는 것이고,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다툼과 대적함 속에서 이삭은 내주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저들이 다투고자 할 때 다투지 않았고, 저들이 대적하고자 할 때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빼앗으면 빼앗길 뿐입니다.
여러분, 로마서에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말씀이 있는데, 지금 이삭의 자세는 이 말씀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이 죽은 이후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메웠습니다. 자기들이 사용한 빈도가 낮아서 메웠습니다. 그곳까지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웠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곳에 머물고자 했을 때는 가만히 보고 있지 않습니다. 시비를 걸고 자기 것인 양 빼앗습니다. 성경은 그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이동도 만만치 않은데 그 일을 여러 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일로 인하여 저들과 다투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빼앗아 가고자 할 때 주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악에 대하여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블레셋 왕보다 강성한데 힘으로 이길 수 없겠습니까? 아브라함 때만 해도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318명으로 당시 강대국들을 이겼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할 수 없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열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답답할 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삭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인내하면서 선으로 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삭의 이런 자세에 대해서는 본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에섹과 싯나를 지나 다시금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서는 더 이상의 다툼, 대적함이 없게 하십니다. 22절을 보시면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르호봇’이라는 말은 장소가 넓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삭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느냐? 내 인내로 말미암아 장소가 넓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악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갚았기 때문에 장소가 넓게 되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악에도 불구하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만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우물을 팠을 때 샘 근원을 얻게 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거기에 인간의 시기와 질투가 있지만 다시금 옮겨 와서 우물을 얻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렇게 하십니다. 우물을 판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번거롭습니다. 수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팔 때마다 우물을 주셨습니다. 먹을 물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로 빼앗기는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삭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혹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예 사람들의 시비가 없게 하시면 안 됩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왜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그런 방식으로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통해 인내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 결국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하셔서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22절에서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제’라는 단어 이전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툼을 조장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대적하여 힘들게 만드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종식시키는 때가 있습니다. 이제 이전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제 이후로는 평안함이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누구를 위하시느냐? 우리를 위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하십니다.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는 인내해야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이 지나고 난 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줄 알고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