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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719설교 / 창세기31장17-42절 / 야곱의가정을지키시는하나님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7.19|조회수59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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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17-42

야곱의 가정을 지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4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두 딸을 위하여 14, 자신의 품삯을 위하여 6년을 라반의 양 떼를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품삯을 위하여 수고한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야곱을 번성케 하셨는데, 이것이 라반이나 그의 아들들에게는 좋지 않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야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라반 자신에게 복을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30:27). 그래서 야곱이 이제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만류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머물러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품삯까지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품삯을 정한 이후에는 끊임없이 야곱이 번성케 되었는데, 여기서도 라반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6년 동안 품삯의 조건을 변경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품삯의 조건을 바꿀 때마다 야곱이 변경케 되는 쪽으로 역사하셨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라반은 안색이 변했던 것입니다(31:2).

 

야곱은 라반의 안색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31:3). 그래서 두 아내를 불러 자초지정을 설명하고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이제 고향으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이렇게 자신의 소유물들을 챙겨 떠나고자 할 때 아무도 몰래 라헬은 그의 아버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훔치게 됩니다. 19절에 보시면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드라빔은 집안에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우상입니다. 크기는 매우 작은 것인데, 지금 라헬은 자기 가정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드라빔, 즉 우상의 형상을 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라헬은 누굽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를 위하여 7년을 봉사했지만 라반의 거짓에 속아서 다시금 7, 14년을 봉사하여 얻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 가운데 특별히 요셉이 창세기에서는 부각이 되는데, 그런 요셉의 어머니가 라헬입니다. 그런 그가 20년 동안 남편과 살면서 남편이 섬기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한 자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수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도 섬기는 수준, 그리고 그 우상이 가지고 있던 정신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외에도 복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 어떤 면에서는 그런 수준이 세상의 욕심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세상적인 욕심이 가득한 수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도둑질까지 하는 수준, 그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드라빔을 훔쳤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게 되는데, 믿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순순한 믿음의 모습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라헬은 미신적인 마음으로 우상을 도둑질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하여 야곱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 때문에 야곱의 가정이 교회로 있었지만 지상의 교회는 온갖 점과 흠과 죄악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 달리 말하면 야곱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마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편지한 배경처럼 분쟁과 다툼, 음행, 우상과 관련된 그런 문제들이 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을 파기시키지 않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역사하고 또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음행과 우상 숭배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 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문제가 없도록 우리는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어떻게 편지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1-3) 정확하게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점과 흠이 없는 게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선한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싸움을 하면 언제나 이기기만 하느냐? 때로는 지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것이지만, 또한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만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어떻게 부르시느냐?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실상은 성도답지 않은데, 반드시 거룩하여 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은혜와 평강이 더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점과 흠이 있지만, 그것도 너무나도 많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상 은혜와 평강을 끊임없이 주시는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자면 심판 외에는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내놓는 것은 온통 점과 흠과 죄악뿐인데, 심판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사랑으로 대우하십니다. 사랑 받을 만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기로 하신 겁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택하신 백성에게 주기로 하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가 사랑을 받을 만 한 자가 되도록 만들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관심에 대하여 우리의 마땅한 자리는 어디겠습니까?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다 돌려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리가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라헬이 훔친 드라빔에 대한 부분은 이후에 다시금 언급되지만, 지금 이런 라헬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책망 받아 마땅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 20절에 보시면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21절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처럼 라반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 지금 야곱의 모습니다.

여러분, 분명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으로 가고자 합니다. 창세기 313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야곱에게 힘이 되어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런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습을 가지느냐 하면 도망하는 자로 있습니다. 지난 주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 힘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그를 완전히 붙잡아 견고한 믿음의 내용으로 자리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후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 자체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완전한 것으로 있지만 그 말씀 앞에서 반응하는 우리는 여전히 점과 흠과 죄악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불완전함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혹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다면 그 말씀을 주신 대상 또한 완전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는 없는가? 물론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훈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한 순간 우리를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으시지만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인 방식으로 훈련하시기를 뜻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이런 뜻과 목적을 가지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점과 흠이 하나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그리고 그분의 방법과 목적은 언제나 선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지 않은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잘못은 인간으로부터 나올 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들, 점과 흠들, 죄악들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실 때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믿고 그 말씀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우리가 훈련해야 할 내용입니다.

 

사흘 뒤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사실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그래서 뒤를 쫓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데, 21절 이하를 보시면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31:21-24) 야곱이 도망하기 전까지는 그나마 자신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야곱의 소유가 많아짐으로 안색이 변하였지만 자기 손 안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나마 어떤 조치라고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몰래 도망하였기 때문에 굉장히 분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서 길르앗 산에 이르렀는데, 29절에서 표현되지만 야곱을 해할 마음으로 쫓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라반의 자세가 바뀌는데, 25절 이하를 보시면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31:25-28) 처음에는 해할 마음으로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위선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한 마디로 야곱이 도망하듯 간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향으로 간다고 했으면 좋은 마음을 보내줬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결과 자신의 딸들, 그리고 손자들과 아름답게 이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네가 도망하듯 간 것은 너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얼핏 말 자체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비춰집니다. 야곱이 도망하듯 갔기 때문에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반의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29절에서 곧바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오히려 야곱의 자세가 잘못된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위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어떤 말까지 하느냐? 29절에 보시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위선적일 뿐만 아니라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하려고 갔지만 하나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좋은 말로 보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야곱을 해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해할만한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어서 해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해할 마음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힘으로 하자면 야곱보다 강할지도 모릅니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야곱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능력을 자기 마음대로 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 9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라반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마치 자기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해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치 자신이 아량을 베푼 것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우월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의 특징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는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랑합니다. 그 능력으로 무엇을 결과 시키면 그 결과가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큰 착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은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비록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십니다(5:45). 해와 비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라반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그를 제재하셨지만, 하나님에 의해 제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나에게는 너를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 우리는 라반의 이 말 속에서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라반은 야곱을 해하고자 쫓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야곱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도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창세기 312절에 의하면 라반의 안색이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변했지만 야곱을 그대로 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그를 통해 뭔가 이익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분명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뿐이겠습니까? 라반와 함께 20년 동안 살면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특히 라반과 품삯을 정하고 난 뒤 6년 동안 일하면서 그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고 또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라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라반 몰래 도망하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라반의 이 말을 통해 야곱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 비록 라반의 음성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속에는 거짓됨이 분명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해 말씀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므이의 저주 속에서 다윗은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으로 사울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다윗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저주하게 됩니다. 즉 그의 저주는 결코 옳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악인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시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악인을 통해 자신의 뜻을 전하실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단을 통해서도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을 불러냈을 때가 그러합니다. 분명 신접한 여인을 통해 불러낸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단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사울에게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82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 무슨 권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그들을 통해서도 세우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야곱은 라반의 말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믿음이 없는지를 깨달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을 때, 혹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그의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동일한 사실을 라반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반과 같은 자가 말할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혹은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가 말하는 경우처럼 나를 저주한다는 측면에서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물론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분별력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의 분별력을 주셔야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말을 통해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예가 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런 부분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선적이고 교만에 가득 찬 라반이 야곱을 해할 목적으로 왔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자 자신의 두 딸과 손자들과 작별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야곱을 책망했습니다. 더불어 한 가지 내용으로 더 책망하고자 하는데, 바로 드라빔을 훔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30절을 보시면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그러니까 지금 라반은 두 가지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말없이 그냥 간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상을 훔쳐 간 것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책망에 대해 우선 야곱은 첫 번째와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31절을 보시면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왜 자신의 두 딸 그리고 손자들과 작별하지 않았느냐 하면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억지로 빼앗을까 하여 두려워서 그랬다고 답변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라반을 두려워해서 몰래 떠났기 때문에 지금 이 말은 야곱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반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라반이 야곱에게 보여준 모습은 좋은 모습이 아니라 야곱으로 하여금 두렵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해할 수 있다는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책망과 관련해서는 32절에서 답변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이미 언급했지만 19절에 의하면 라반이 섬기던 신을 라헬이 훔쳤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혹 누군가 외삼촌의 신을 훔쳤다면, 그래서 외삼촌이 찾게 되면 결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장담을 조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장담이 큰 실수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야곱이 장담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라헬의 도둑질을 드러내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곱이 장담했기 때문에 라헬은 죽어야 합니다. 즉 알지 못한다고 해서 함부로 장담할 것이 아니라,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도서 52절의 교훈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어쨌든 야곱이 장담하자 라반이 뒤지기 시작합니다. 33절 이하 35절에 보시면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여기서는 라헬이 어떻게 자신의 도둑질을 숨기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낙타 안장 아래 넣고는 생리로 인하여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식으로, 그래서 자신이 훔쳤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까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물론 라헬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책망 받을 것 외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던 것도 책망 받아야 할 내용으로 있고, 또 아버지 라반의 신을 훔쳤다는 것도 책망 받아야 할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거짓으로 숨기고 있는 것도 책망 받아야 할 내용으로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자신의 교회로 삼으셨지만 그런 교회라 할지라도 점과 흠과 죄악이 너무나도 많음을 보게 됩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모습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교회의 점과 흠과 죄악을 다 들춰내시지 않습니다. 들춰내신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때로는 감춰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감추시는 것을 통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감추시지 않고 다 들춰내신다면 누가 머리를 들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머리를 들고 살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로 살아가야 되는데, 우리의 숨은 죄까지 다 드러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드러내게 하시는 역사도 있습니다. 드러내셔서 회개하도록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 때문에 숨겨진 죄에 대해서는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버려야 할 것으로 있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라헬의 경우 아버지가 뒤질 때 조마조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거짓으로 들키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죄에 대해서 더욱 담대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두근두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익숙해져서 죄를 죄인 줄 모르는 지경에까지 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드러내시지 않은 것이지 자신이 잘 숨겨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비를 베풀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괜찮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싫어하십니다. 미워하십니다. 죄와는 함께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신 사랑을 보여주셨던 겁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면,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다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죄를 죽이며 사는 삶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들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죄의 달콤함, 죄의 쾌락이 분명 있지만 그것을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숨겨 주고 계시다고 해서 끝까지 숨겨진 채로 있다는 보장은 되지 않습니다.

 

라반이 찾고자 한 것을 찾지 못하자 야곱이 라반을 향하여 책망의 소리를 높이는데, 36절 이하 42절입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라헬의 죄를 드러내셨다면 야곱이 이렇게 큰 소리를 높일 일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함부로 입을 열어 많은 말을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라반과 함께 하면서 라반에게 성실히 행했다는 것, 반면 라반은 야곱에 대하여 불의하게 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있습니다. 야곱의 성실함은 어느 정도인가? 38절 이하 40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면 야곱에 대한 라반의 자세는 41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야곱이 번성케 된 모든 역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합니다. 라반이 그 일에 방해자로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셨기 때문에 빈 손이 아니라 이렇게 번성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 자신을 뒤쫓아 오는 라반을 책망하셔서 다시금 자신을 지켜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고백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라헬의 점과 흠과 죄악, 뿐만 아니라 야곱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의 점과 흠과 죄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으로 인하여 믿음이 약하여지고 그래서 도망하는 그런 모습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상의 내용이 그 가정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그는 다시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라반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 꿈을 통해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29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자신에게는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합니다. 즉 저들과 우리의 다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저들처럼 우리도 점과 흠이 있습니다. 저들처럼 우리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줘서 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체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 또한 그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성경은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4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무엇을 행한 것처럼 표현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의 원인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고난을 보셨습니다. 야곱의 수고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 때문에, 그의 수고 때문에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실 뿐입니다. 그럼 이런 표현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무엇인지를 이런 방식을 통해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의인의 고난을 기뻐하시고 의인의 수고함을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마땅한 자리는 어디인가? 의인으로 고난을 받으며 수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마땅하냐 하면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그리고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점과 흠과 죄악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지만, 달리 말하면 우리가 깨끗해서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바와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지키시고 보호하시지만, 우리의 마땅한 자리는 점과 흠과 죄악의 자리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며, 의인으로서 수고하면서 주의 은혜를 누리는 자리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수고와 애씀이 내 공로가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내용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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