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2장 21-32절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라반을 떠나 이제 고향으로 가고자 했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되었던 것은 형 에서의 분노가 풀렸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라반에게로 도망하기 전 야곱은 형을 속여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형의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없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 다시 말해 천사들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군대와도 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네가 가는 길에 있어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두려워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로 온다고 할 때 야곱을 치기 위해서 오는 줄로 생각하였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믿음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천사를 보게 하시면서 까지, 그것도 군대처럼 많은 수를 보게 하시면서 까지 그의 믿음을 붙들고자 하셨지만, 본 것이 아니라 400명이 온다는 말로 인하여 그의 믿음은 한 순간 사라지는 듯 하였던 겁니다. 그만큼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약할지언정 믿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곱은 에서를 위해 준비한 예물을 먼저 보내고 자신의 무리와 함께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밤에 일어나 자신의 가족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야곱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 하게 되는데, 소위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입니다. 21절 이하 24절을 보시면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후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12장 3절과 4절에서는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사람의 모양을 한 천사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앞서 여호와의 사자들, 즉 군대처럼 많은 천사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으로 한 모양으로 한 천사와의 씨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한 내용입니다.
그럼 이 씨름은 무엇인가? 분명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긴 하지만 물리적인 접촉이 있는 그런 씨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내용에서 이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 야곱이 절뚝거리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어떤 의미의 전달만을 위해 비유적인 내용으로 씨름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씨름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할 때 대부분의 성경 해석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야곱은 자신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고 난 뒤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32장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사자를 군대처럼 보여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야곱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기도하게 되는데, 한번의 기도로 끝나지 않고 좀 더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자세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도 그 어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되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혹 기도하고 다시금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불신앙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기도했다면 하나님을 믿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우라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군대처럼 보이셨지만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에 두려워하였던 것이 야곱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리기 쉽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치 불의한 재판장에게 과부가 소원을 들어 주십사,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사 간구하고 또 간구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기도하고 난 뒤 기도에 대한 결과로 어떤 응답을 받을 때 기도 자체가 공로가 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 가운데 가장 경계해야 할 해석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25절 이하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여러분도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야곱의 씨름, 즉 기도에 대하여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씀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도 이길 수 있는 기도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일단 야곱의 기도와 관련해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을 붙잡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허벅지 관절을 치시자 어긋나게 되면서 나중에 보면 절뚝거리게 됩니다(3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도에 힘쓰되 기도하다가 안 되면 그냥 포기하는 식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때문에,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바랐기 때문에,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냐?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영적인 장자는 육신으로 볼 때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던 겁니다. 당연히 영적인 모든 축복의 상속자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마치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인 양 말한다면 기도 자체가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실제로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져 주셨기 때문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왜 져주시는가? 어떤 목사님의 경우 본문에 대하여 전리품으로 설명합니다. 즉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패한 쪽의 물품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승자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것을 거주 주시기 위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얻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근절되지 않는 악습이 있는데,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패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허벅지 관절을 쳐서 절뚝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평생 야곱으로 하여금 절뚝거리는 자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렇게만 할 수 있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쪽 다리만 쩔뚝거리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두 발, 두 손도 그렇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기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져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끈질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공로가 되고, 기도 자체가 내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거기에는 끊임없이 인간을 증명하고자 하는 악습 외에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야곱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지만, 이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 인간의 끈질김과 같은 것을 찬양하도록 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패할 수 없는 분인데 마치 야곱이 이겼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29절과 30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여기 보면 야곱이 자신과 씨름한 자의 이름을 묻는데, 이것은 야곱이 자신과 씨름한 자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물었다 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야곱은 자신과 씨름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서 그에게 축복을 주십사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축복을 받습니다. 그럼 왜 그의 이름을 묻고 있는가?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아주 많이 나타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휘장과 은폐물 속에 가려진 것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야곱은 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기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좀 더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기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후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게 하셨는데,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조금 앞에 있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좀 더 분명하게 보이게 하신 것이 신약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그런 측면에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히1:3).
어쨌든 야곱의 소망하는 바가 경건에 합당한 간구임에는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해 달라는 기도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머니 태 중에 있을 때부터 그를 택하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정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기도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미 하나님 안에는 예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혹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에 대한 응답을 예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는 것조차 예비하시기도 하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앞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고 난 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을 부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으로 계신 반면 인간은 거룩과 너무나도 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죄인 된 인간은 죽음 외에는 결과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과 대면하셨지만 야곱을 죽이시지 않았습니다.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니까 진짜 이겼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 스스로가 고백하는 것처럼 브니엘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본 것입니다. 본래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죽이시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푸신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대하면서 인간을 높이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철저지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지 인간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져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복락을 거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무엇까지도 아끼지 않고 주셨는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곧 자신을 주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져 주셨던 겁니다. 자신을 주시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져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을 하나님의 모든 택하신 백성에게 주고 계신 겁니다. 물론 혈통으로 하자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닌 것처럼(롬9:6)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영적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길 수 있는가? 자기의 실력으로 이긴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져 주셨기 때문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무엇까지도 주시는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님 자신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복으로서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인 이상 어떤 것도 부족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사람들은 나무를 심었을 때 그 나무에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을 기뻐합니다. 밭을 갈면 그 밭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이많이 자라길 원합니다.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야 안심이지 없으면 불안 해 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어도, 심지어 우리의 양과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으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한분만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한분만 있으면 다른 것은 없어도 괜찮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본문에서 야곱이 끈질기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낸 것을 빌미로 우리에게도 복을 내려 주시되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복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는 정반대로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기를 기도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하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많아지기를 기도하는 그런 자로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 기도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보장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치가 세상의 어떤 것에도 미치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도가 세상의 복락과 관련해서 구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십니까?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6-29) 우리의 기도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이 내용은 우리 실력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죽지 않고 여전히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언어적으로 하자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지만, 그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이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본래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만물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공통으로 주고자 하는 것은 결코 세상의 것,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마치 세상의 것을 채우고 그것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말씀하기도 하지만, 같은 구약에 있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는 그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물질적인 그런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요,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복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우리가 구해야 할 모든 간구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무엇까지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본문 28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야곱이 하나님도 이겼다면 한낱 사람과 싸워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과 겨루어 야곱으로 이기게 하신 것은 두려워하는 야곱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도 하시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나까지 이겼는데, 세상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앞에 400명의 대군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큰 군대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아니 그런 군대가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분만 계시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도 있는데(마10:28),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일까지 있을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을 죽이고자 하는 일도 있고, 실제로 죽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몸은 죽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두려워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도망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고 위협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말할 정도로 담대했습니다(행4:19). 심지어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미암아 능욕 받는 일에 대해서도 합당히 여겼습니다(행5:41).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요, 당연히 배척하는 일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두렵고 사람이 두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세상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판단하는 모든 것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불어 싸울 때 이기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도 이겼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여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이겨서 하나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리품들을 다 받은 자들입니다. 더 이상 지옥 형벌 가운데 놓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어려움조차 감당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라고 칭할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하시면서 이스라엘로 부르십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형과 싸우는 일이 뱃속에서부터 있었고 싸움에서 패하기 싫어서 발꿈치를 잡은 것입니다. 바로 그 이름을 버리게 하십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네 방법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거짓으로 장자권을 사고, 거짓으로 장자의 축복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방법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고, 그 결과 도망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이름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길 수 있어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져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야곱은 브니엘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도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는 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말고 은혜 안에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영적인 모든 것이 네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 안에 있는 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만 나에게 계시면 그리고 그분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면 얼마든지 기뻐하며 살고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약간 실천적인 면을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내용처럼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야곱처럼 거짓으로 세상 복을 취하고자 하는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직해서는 좀 더 부요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어떤 모양으로 사느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인지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거짓을 더하여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시편 73편에 있는 말씀처럼 불의한 자가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향은 결코 거기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사도들이 주의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바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31절과 32절을 보시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씨름 가운데 다치게 된 다리를 절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흔적입니까?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하신 흔적입니다. 네 힘대로, 네 소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흔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받았던 고난의 흔적들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으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23-27) 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이고, 채찍에 맞고, 주먹질 당하고, 돌에 맞는 등! 사람들이 볼 때는 전혀 부러워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결과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물리적인 고난을 받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과연 내 방식, 내 뜻, 내 소견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내용과 방식으로 사는 것을 과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대면한 자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다 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화롭다고까지 하십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영광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살면서 가지는 흔적이 아니라, 내 고집대로 살면서 가지게 되는 그런 흔적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가지는 흔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칭해지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