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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816설교 / 창세기33장1-20절 / 야곱과에서의만남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8.16|조회수746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31-20

야곱과 에서의 만남

 

지난 시간 살핀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 즉 야곱의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어떤 원인이나 공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이 아닙니다. 물론 야곱의 기도는 끈질긴 기도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가려 하실 때 축복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붙잡은 것은 분명 끈질긴 기도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인이 되어 축복을 받는가의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 스스로 이르기를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대면하였을 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이시지 않고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더 이상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이름 부르도록 한 내용은 결코 야곱의 공로를 말하는 내용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브니엘의 뜻을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져 주셨기 때문에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왜 져 주셨는가? 이긴 자가 진 자의 모든 것을 갖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인간의 공로를 찬양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이름인 것입니다.

더불어 이 이름이 가지는 내용 속에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져 주셨지만 하나님도 이긴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해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알리십니다.

 

이런 놀라운 이름을 얍복 나루에게 받고 난 뒤 이제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우선 1절 이하 3절을 보시면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서로 하자면 에서를 위한 예물을 먼저 보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8절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자신이 그의 식구들 가운데 가장 앞섭니다. 그 뒤로 두 여종과 그의 자식들, 그리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 그리고 맨 나중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 순으로 따르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 예물을 보내고 난 뒤 자신이 앞서 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사건을 통해 야곱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믿음의 자라남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형 에서가 자신과 가족을 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던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렸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여종과 그의 자녀들은 앞세우고 레아, 그리고 라헬 순서로 따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과 그로부터 태어난 요셉은 맨 뒤에 둠으로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한 것이고, 종들보다는 본처를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그런 순서로 따르게 하였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한 번의 경험, 한 번의 깨달음으로 순식간에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쌓일 때 믿음이 조금 나아지는 경우들이 있지만 이 땅에서의 믿음은 결코 완전한 것으로 받지는 못합니다. 아니 믿음이 조금 나아진다고 할 때도 과연 믿음이 나아졌는가라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쉽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 것처럼 있지만 당장 현실로 가면 걱정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믿음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자주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에게 한번 참된 믿음을 주시면 그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만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 베풀어주신 믿음보다 더 연약한 가운데 놓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탄 나무에 불씨가 남아 있는 것처럼, 그래서 태울 수 있는 매개체만 있다면 다시금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작은 불씨만큼은 결코 꺼뜨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합니다. 연약함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불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상기해야 합니다. 자주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방편들, 그것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데, 그런 방편들을 통해 믿음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말씀, 성례, 기도를 말하는데, 그것을 활용함으로 믿음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하는, 나아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한편 우리는 야곱의 편애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편애는 이후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점과 흠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점과 흠이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의 실천과 관련해서도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누구도 이웃 사랑을 완전하게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내용을 통해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가까이 오자 자신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형에게 가까이 가게 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형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생각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결코 합당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형 에서를 맞이하였을 때 야곱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4절을 보시면 형 에서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순서는 예물을 먼저 보냈습니다. 에서가 분노에 가득 찼다면 그런 예물에 대해서도 가만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은 확인이 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가까이 오자 몸을 일 곱번이나 땅에 굽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의 마음이 완전히 풀렸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물은 그냥 두지만 야곱과 만났을 때 그 마음의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에서의 마음이 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풀린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풀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야곱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결과된 것이 앞서 보낸 예물 때문인가? 자신이 형을 만나면서 겸손히 몸을 낮추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야곱이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 예물을 보낸 것이나 겸손히 자신을 낮춘 것에 대해서는 마땅한 도리를 행한 것으로서 잘했다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오로지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계셔서 자신이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그들의 완악함도 연화시키시며 그들의 잔학함도 경감시키신다는 것을 증명하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은 비인격적인 피조물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피조물, 특별히 그들의 마음까지도 다스린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서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로 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의 기도대로 응답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기도보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미 하나님 안에는 예비 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혹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에 대한 응답을 예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는 것조차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기도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앞서 일하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성경이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 이유는 야곱과 같은 상황 가운데 놓일 때, 다시 말해 어떤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한분만을 의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온다면 야곱이 기도한 것처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가 유기자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마음까지도 주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악인의 악함을 제어하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73편에서도 나오지만 악인의 형통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이 악을 행할 때 형통이 아니라 벌이 있어야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처럼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악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악을 제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악에 대하여 내버려두지 않으면 인류는 보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지금도 인류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마음을 주관하시면서 그들의 악을 제어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십니다. 사람의 행동, 행동을 하게 되는 마음까지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의 갈등을 푸는 진정한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물론 야곱처럼 노력도 해야 합니다. 예물을 준비한 것처럼 선물도 줄 수 있고, 또 자신이 잘못했다면 잘못한 것에 대한 겸손함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변화시키셔야지 만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에서와의 극적인 상봉 이후 이제 에서는 야곱 뒤에 있는 아내들과 자식들을 보게 됩니다. 5절 이하 7절을 보시면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여기서도 우리는 야곱의 경건과 겸손함을 볼 수 있는데, 우선 자신의 아내들 그리고 자신에게 속한 자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는 말씀처럼(127:3), 야곱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식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에서 앞에서 야곱은 자신을 주의 종’, 다시 말해 형 에서의 종으로 지칭합니다. 영적으로 하자면 분명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 때문에 야곱이 더 높은 자리에 있지만, 세상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전에는 형을 이기려고만 했지만 2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경건과 함께 겸손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경우 편애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점과 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경건한 자들은 반드시 이웃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경건만 있고 경건에 따른 열매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참된 경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의 내용을 보면 믿음을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는데, 열매 없는 경건이 이와 같습니다. 반대로 경건은 없는데 열매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열매가 합당한 열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열매라 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에 보면 믿음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하는데, 경건이 없는 열매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경건에 합당한 열매에 있어 부족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경건과 경건에 합당한 열매가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실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8절 이하 11절은 예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서에게도 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야곱이 에서에게 주고자 하는 예물을 거절하게 됩니다. 받으면 분명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동생이 주는 물질을 받을 만큼 그렇게 궁핍한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히려 거절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야곱 입장에서는 20년 전 형을 속인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형의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고, 형이 용서한다고 할 때 말로만이 아니라 준비된 예물을 받아 줬으면 합니다.

특히 10절에서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과 같다는 표현은 에서가 야곱을 대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로 대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지금 에서는 야곱을 은혜로 대하고 있는 겁니다. 거짓된 마음으로 대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한 꾀가 아닌 겁니다. 진심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사실을 형을 만나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의 마음을 녹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래서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목적이었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 진정한 화해의 표로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받기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에서는 야곱이 준비한 예물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12절을 보시면 에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쉽게 말하면 함께 가자는 겁니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지난 20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묵은 감정을 다 털어 버리자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사정상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13절부터 15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실제로 야곱이 에서에게 준 예물에 비하면 그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에서의 경우는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왔다면, 야곱은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같이 간다는 것은 한쪽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먼저 출발하면 뒤쫓아 가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에서는 동생을 위하여 자신의 종 중 몇 사람을 야곱을 위하여 남겨 두겠다고 말하지만 야곱은 이것도 거절하게 됩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는데, 16절과 17절을 보시면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그런데 여러분, 분명 야곱은 형이 먼저 출발하면 그 뒤를 따라 자신도 세일로 가서 에서를 다시금 만나겠다고 하지만 이후 내용을 보면 그렇게 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도 거짓을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해석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살펴오면서 확인할 수 있는 야곱의 모든 자세는 거짓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형에 대한 미안함, 형이 자신을 반겼을 때 기뻐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야곱이 곧바로 형을 따라 세일로 가지 않고 숙곳이라는 곳에 간 것은 전체가 다 이동하기보다는 먼저 정착할 곳을 찾고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기 위한 행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거기서 형에게 찾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뜻은 달랐는데, 한편은 긍휼의 그릇으로 한편은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일이 있고, 그래서 화해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같은 멍에를 메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해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다른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사람과의 협력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가야 합니다. 혹 다시금 불화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따라 가야 할 자가 바로 주의 택한 백성들이 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에서와 헤어지고 난 뒤 야곱은 숙곳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되는데, 숙곳의 의미는 ‘()막들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야곱은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짓습니다. 아마도 상당한 기간을 머물기 위한 목적으로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금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곳이 세겜입니다. 18절 이하 20절을 보시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특히 여기서는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를 주고 사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세겜 성읍이 세워진 곳 앞에서 장막을 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땅을 사서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빗지 않기 위한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땅을 산만큼 좀 더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주하였지만 그곳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들도 저들이 섬기는 신들이 있고 또한 신 앞에 예배하는 제단이 있지만, 그들과는 구별된다는 차원에서 야곱은 자신만의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불렀던 겁니다.

 

창세기 33장은 에서와의 화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헤어지면서 숙곳으로 갔다가 세겜 성읍 앞으로 가서 장막을 치며 살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결코 교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지만, 그리고 저들이 섬기는 신은 우상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은 무엇입니까? 시편 1154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115:4-7)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115:8)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시편 1153절에 의하면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저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시면서 야곱에게 행하신 모든 역사가 이런 역사인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에서조차도, 에서의 마음조차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5:9-11)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인 것입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

물론 그의 가정 안에 모든 우상을 제거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후에 제거하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비록 세겜 땅 앞에 정착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 아닌 참되신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의 이름만을 부르며 살겠다는 고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든, 어디에서 살든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로서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특볗히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를 통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도움이시요 방패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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