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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0920설교 / 창세기37장1-11절 / 요셉의꿈을통한하나님의계시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9.20|조회수1,425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71-11

요셉의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요셉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본문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많은 오해를 가지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요셉의 꿈을 요셉의 비전으로 해석하여 꿈을 꾸자, 비전을 가지자는 식으로 강조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셉의 일생을 볼 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꿈과 비전을 뭔가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세상에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방향의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에게 주신 특별한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꿈이라고 해서 꿈을 꾼다, 비전을 가진다, 그래서 그 꿈과 비전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 전에 뜻하신 것 중 필요한 부분을 미리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셉이 꾼 꿈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시편 105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17절부터 보시면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05:17-19) 그러니까 요셉이 종으로 팔리게 된 것,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무엇이 응할 때까지냐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할 때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요셉의 꿈은 요셉 스스로가 세운 꿈, 요셉 스스로가 세운 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꾸게 하셨는데, 그 꿈으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되고, 그래서 결국 종으로 팔리게 되는, 심지어 종으로 팔렸다가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는, 그러나 꿈을 통해 미리 보이신 것처럼 애굽의 총리까지 되는, 시편 105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꾸게 하셨을 때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걸 시편 105편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요셉의 꿈은 내가 세우고자 하는 어떤 비전, 내가 가지고자 하는 어떤 꿈으로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꿈입니다.

 

실제로 구약 당시만 해도 기록된 성경이 구약 백성들에게 주어질 때가 언제냐 하면 모세 시대 때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어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질 때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뭐냐? 꿈의 방식입니다. 그럼 모든 꿈은 계시로서의 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의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현대의학 뿐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 의학적으로 볼 때 몸이 굉장히 피곤하거나 혹은 어떤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그것이 꿈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어떤 책을 읽은 내용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루 밤에 몇 가지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꿈을 꿉니다. 그러나 모든 꿈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꿈을 꾼다고 해서 다 계시로서의 꿈은 아닙니다. 요셉의 꿈을 이야기할 때, 특별이 성경이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몇 개의 꿈을 꾸는 그런 꿈과 같은 꿈이 아닙니다. 몸이 피곤해서 꾸는 꿈도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 때문에 꾸는 꿈도 아닙니다. 심지어 요셉 스스로 그런 꿈을 꾸고자 해서 꾼 꿈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을 통해 요셉의 꿈, 요셉의 비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실제로 요셉은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는가? 심지어 오늘 본문을 통해 내 꿈, 내 비전을 이야기하고, 특히 그런 꿈과 비전에 대해 높은 지위,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까지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미 해석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인본주의적 해석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알리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우선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그의 아버지만 거류했느냐? 야곱의 조부인 아브라함도 거류했던 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땅에 거류했던 겁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11:9)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이 가나안에 머물렀던 것은 다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지난 시간 살펴 본 창세기 36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었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36:6-8)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오기 전부터 에서가 세일 산에 거주하였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야곱과 함께 있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삭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에서는 아마도 가나안에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니까 세일 산에 거주지를 옮겼지만 완전히 옮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자면 야곱과 에서가 함께 가나안에 거주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러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에서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머물지 않고 세일 산으로 옮기셨고, 야곱의 경우 20년이란 세월 동안 밧단아람에서 살게 하셨지만 결국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에서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떠나게 하신 것이, 야곱의 경우 오랜 세월 동안 가나안에서 멀리 살았지만 결국 돌아와 가나안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느냐?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으로 보자면 족보라기보다는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일단 2절 중반부부터 보시면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37:2b-4)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고 말하면서 나오는 이후의 모든 내용은 엄밀하게는 야곱과 관련된 내용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부각되는 것은 요셉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를 어떻게 성취하시는가, 그의 가정을 어떻게 보호하고자 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요셉을 부각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 부분에서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했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이유로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을 통해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선 장들을 살펴보자면 요셉의 어머니는 라헬입니다. 라헬의 경우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는데, 그런 그녀를 통해 낳았기 때문에 더더욱 요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라헬의 경우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 아비인 야곱은 요셉에게서 라헬의 위로까지 얻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때문에 더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아버지에 대해 못마땅해 함으로 나머지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주는 것으로 형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미워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을 위하여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형들에게는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의 편애가 형들의 시기심, 미움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물론 아버지의 편애를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편애 자체를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편애 때문에 무조건 형들 편에 서 있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볼 때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늦게 자녀를 낳게 되면 늦게 나은 자녀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보내야 했습니다.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이 두 명이 있는데, 라헬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형들의 입장에서도 요셉이 십 칠세라면 형들은 대부분 청장년의 때입니다.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으로 시기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났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양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워하였다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요셉의 형들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 일어나게 될 사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미워하는 데 있어 더 자극을 받았던 자들이 누구냐 하면 어머니가 야곱의 본처가 아니라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그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사랑을 받고 있던 요셉을 미워했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들의 완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편애를 볼 수 있고, 편애 자체를 잘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들의 시기심의 정당한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완악함을 줄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은 그들의 행실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드러내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고자질 정도로 볼 내용이 아니라 그만큼 정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겁니다. 아비의 눈을 속이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몰랐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혹 그런 모습일지라도 잘못이 드러나게 되면 그 잘못에 대해 돌이켜야 하는데, 그들은 돌이키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드러낸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던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완악함입니다.

때문에 꿈을 꾸기 전 이 내용은 아버지의 편애, 요셉의 고자질과 같은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이제 곧 있으면 자기 동생조차 팔게 될 형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편애가 있었고, 요셉의 고자질도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을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초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형들의 시기심, 질투, 미움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 등 요셉에 대한 형들의 자세에 대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요셉이 더욱 미움을 받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셉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꿈, 즉 계시의 말씀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요셉도 우리가 꾸는 꿈처럼 일반적인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런 꿈에 대해 일일이 다 이야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꿈에 대해서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꿈의 대상인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여러분, 요셉이 이 꿈을 이야기할 때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가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하여 선택이 되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단지 요셉을 사용하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에게 주시는 일종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후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장차 기근이 있을 것이고, 그 기근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 먹을 것을 구할 것인데, 거기서 요셉을 만나게 되는 그런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자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4)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영원한 작정을 따라 실행하고 계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 안에서 야곱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 누굴 세우고자 하느냐 하면 요셉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이런 요셉의 꿈을 듣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있을 일에 대비하여 미리 약속의 말씀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선 그들의 시기심, 그들의 완악함이 그것을 가려버린 꼴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8절입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어떤 면에선 그들이 먼저 태어난 것, 그들이 요셉보다 형이라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묵살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시기심, 그들의 질투가 말씀을 가리는 꼴로 있었고, 또한 그들의 위치가 말씀을 가리는 꼴로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꿈과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66권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충만히 밝히셨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계시도 없고, 그렇게 계시하실 때의 방식도 오늘날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계시하시는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이 어떤 일의 결과를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결과를 말씀하시면서 미리 알리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최후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셨지만, 그래서 전도서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셨지만(3:14), 궁극적으로 무엇이 있다는 것만큼은 숨기지 않으셨느냐 하면 최후 심판이 있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할 것이라.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씀 앞에 어떤 자로 서 있습니까? 혹 요셉의 형들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분명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정 가운데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알리시면서 그 과정의 구체성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 결과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은 그 결과로서 주어진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한 시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자로 있습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 할지? 어느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과 적어도 우리가 택자로서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자로 있다면 비록 그 과정은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그 결과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심판이 있다는 걸 알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가 없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너무 안일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세는 다 누구와 같은가 하면 요셉의 형들과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신의 시기심과 질투로 말씀을 가린 것처럼 우리의 온갖 죄악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는 꼴로 있습니다. 특히 세상에 대한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가리게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삶!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복이 이 말씀을 통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을 마치 발로 걷어차 버리고 있는 꼴인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학생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오늘 말씀이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해서 꿈과 비전을 가졌다 칩시다. 그리고 좀 거창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실제로 그 꿈을 이루었다 칩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꿈을 위하여 주일에도 시험을 치러가게 되고, 주일에도 경기를 하게 되고, 혹은 주일에 예배 한 번 드렸다는 것으로 주일을 성수했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만 따라가면 분명 고난이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됩니다. 시편 105편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단련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위한 단련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단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단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지킴으로 고난의 길을 걷고자 하지 않습니다. 좁은 길보다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넓은 길은 분명 저주의 길이요, 죽음의 길인데 열매로서 맺고자 하는 것은 그것만 맺고자 합니다. 다 요셉의 형들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한번만 꾸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동일한 꿈을 꾸게 하십니다. 9절을 보시면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하나님께서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꾸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셉 역시 형들이 그 꿈을 무시했지만 다시금 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고했을 때의 반응은 여전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면 형들의 반응과 야곱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무엇보다 형들의 반응은 이 계시의 말씀 앞에 꺾이는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후 말씀으로 비춰볼 때 살기가 등등할 뿐입니다. 그만큼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을 행하는 자로 있게 됩니다.

반면 야곱은 한편으로는 그 꿈에 대해 꾸짖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해 둡니다. 일단 요셉의 꿈이 헛된 야망에 불과하다면 그가 꾸짖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꾸게 하신 분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꾸짖게 된 것은 어떤 면에선 형들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꾸짖은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온당치 않은 것인데, 왜냐하면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을 모든 자손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아마 그는 자기 아들들이 너무나 악한 것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위장함으로써 위험을 맞이하려고 맞을지도 모른다. 이는 그 꿈을 노여워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들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교만심 때문에 동생에게 복종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분쟁을 진정시키려는 욕망에서 거짓으로 자기 아들을 꾸짖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리에 대해 노여워하는 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노력 하에 진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은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이런 이해 속에서 보자면 야곱은 그들의 아들들에게 정당한 권면을 해야 했습니다. 이 꿈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다면 그것을 비방하는 것은 악한 것임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란이 일어날까 하여 그것을 숨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는 자로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가 말씀을 가리는 자로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경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혹 내가 말씀을 드러내고 지킴으로 좋지 못한 상태가 될 것 같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자로,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이 있는 곳에 언제나 화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2장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 복을 나누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물론 이 때 복은 갈리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입니다(3:8). 그런데 복음이 있을 때 그 반응을 창세기 12 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복음 앞에 축복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복음 앞에 저주하는 자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드러내고,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반길만한 것으로만 있지 못합니다. 때로는 저주스러운 말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살았다고 할 때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온전히 주의 뜻만 이뤄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모두가 좋아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압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드러내기보다는 말씀을 감추듯 살아갑니다. 예수는 믿지만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말씀을 지킨다는 이유로 선한 싸움을 싸우질 않습니다. 다 숨길 뿐입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낸다는 것이 항상 주의 말씀을 숨기는 자로서 있다면, 그래서 진리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으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맞는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고자 하시는 일을 미리 알리신 내용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로 하여금 꿈을 꾸자, 비전을 가지자는 것으로 해석이 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람에게 알리신 바를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요셉을 통하여 중단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런 복된 내용을 받는 자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기심과 그들의 질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차버리는 자로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악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분명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편애, 요셉의 고자질도 핵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 핑계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범하는 자로 있었고, 잘못이 드러났지만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탓하는 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은총은 그에게 말씀을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을 때 그 말씀을 받는 자로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요셉이 그런 꿈을 꾸고자 해서 꾼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간절히 바랄 때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그런 일이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꾸는 꿈조차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의 꿈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꿈 안에 요셉의 의지가 있느냐?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의지가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겪게 합니까? 이후 말씀을 보면 시편 105편에 말씀이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리게 되고, 팔려 종으로 있다가 거기서도 억울하게 감옥에 까지 갇히게 됩니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란 이런 삶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하도 하듯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가운데서도 연단을 받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바로 여기여야 합니다. 가장 복된 자리, 정말 우리가 꿈꿔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주의 말씀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주의 말씀을 이루는 자리가 아닌데도 하나님이 주신 꿈,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인간의 욕심이 앞서는 자리일 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복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이루는 자리, 그리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땅에서 말씀대로만 걸어가면서 연단을 받는 그 자리가 우리의 전정한 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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