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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122설교 / 창세기41장37-57절 / 명철하고지혜있는요셉을총리로세우다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11.22|조회수1,11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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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장 37-57절

명철하고 지혜있는 요셉을 총리로 세우다

 

지난 시간 창세기 41장의 전반부를 통해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내용을 살폈습니다. 40장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주신 자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랑이 되기 쉽고, 거기에는 교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셉은 바로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네게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니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었습니다(창41:16).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기 위해서 꿈을 꾸게 하셨으며, 나아가 자신이 꿈을 해석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심지어 지난주 살핀 내용 속에서는 꿈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풍년과 풍년 이후 풍년을 집어 삼킬만한 흉년이라고 했을 때 그 흉년을 극복할 방법까지 말했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이 분명합니다.

 

이런 요셉의 말을 들은 애굽 왕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은 요셉이 해석한 꿈의 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이 제시한 해결책에 대하여 좋게 여기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 바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우선 37절 이하 39절을 보시면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얼핏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어찌 찾을 수 있을까!”라고 말하기 때문에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바로는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참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꿈의 내용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해석을 듣고는 왕의 답답한 마음이 뚫린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신하들도 꿈의 해석을 들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말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39절에서 왕은 요셉과 같은 자세의 고백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요셉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면서, 요셉에 대하여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한다고 할 때 그런 자세가 믿지 않는 이방 왕에게 그대로 인식이 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가 이방 왕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증거 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 된 우리는 결코 자신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새겨야 합니다. 만약 신자 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광을 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가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해서 우리가 소모되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곧 우리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함으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애굽 왕조차 요셉의 말로 인하여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때, 혹 신자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를 가지지 않을 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 모습인지도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불신자인 애굽 왕조차 요셉의 말로 인하여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런 면에서는 불신자인 애굽 왕보다 못한 모습으로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볼 때 신자로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참된 신자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뻔뻔한 것입니다. 뻔뻔하다는 것은 자신을 말씀 앞에서 전혀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은총으로 말미암아 불신자 중 나타나는 열매가 좋은 것일 때 우리는 거기서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이라면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하고, 뿐만 아니라 부끄럽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더욱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알기에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바로가 39절에서 한 이 말이 매우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서도 옳은 내용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할 걸음 더 나아가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의 총리를 삼겠다고 선포합니다. 40절에서 43절입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어떻게 조금 전까지 죄수로 있던 사람을 한 순간 애굽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총리로 세울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 사람이 볼 때 이방인입니다. 그런 그를 어떻게 애굽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총리로 세울 수 있느냐는 겁니다. 혹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함으로 그 마음의 답답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하들 입장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하여금 요셉을 총리로 삼게 하신 것이고, 또 그 과정 속에서 모든 신하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이보다 더 놀라운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요셉에게 있는 일을 보면서 놀라게 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을 보면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인 된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게 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신성으로 계신 분이 인성을 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한 형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창조주이신 성자와 한 형제가 될 수 있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마치 창조주 자신의 위치까지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요셉의 꿈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지위를 꿈꾸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 땅에서의 높은 지위보다 더 높은 지위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이 땅에서는 낮은 지위로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지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는 자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이미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는 방식을 버리셔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이 있는가, 없는가로 마치 하나님 안에서 성공의 여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산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상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는 것은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42절과 43절에서 왕이 자신의 인장 반지를 요셉의 손에 끼우고, 세마포 옷으로 옷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왕의 버금 수레, 다시 말해 으뜸 다음인 버금 수레에 그를 태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왕의 권세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권세가 요셉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의 권세가 요셉에게 주어졌지만 바로보다 높은 권세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보디발이 요셉에게 가정의 모든 것을 다 맡겼다고 할 때 보디발의 아내를 범할 수 있는 권세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즉 권세가 주어질 때 언제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한계 속에서 권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지금 바로가 요셉에게 준 권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왕 노릇할 수 있다고 해서 세상 권력도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롬13:1). 이 선을 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죄요, 악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 허락하시되 한 가지만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를 넘어서려고 한 것, 사단이 유혹한 말에 의하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거기에 악이 있는 것입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데, 그 선을 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선들을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 안에서만 행해야지 말씀 밖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조금 전에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베드로전서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3-16) 특히 16절에서 우리에게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를 방종 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주셨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선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열쇠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회, 즉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회에 천국열쇠권을 맡기셨습니다. 그럼 맡기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권세가 사라지고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회가 맡은 천국열쇠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의미로 천국열쇠권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할 때 바로를 넘어서는 권세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애굽 왕은 어떠합니까?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13:1) 때문에 애굽 왕 바로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그가 말씀이라는 선을 넘어가는 모든 것은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혹 바로가 자신의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세를 넘어서는 그런 요구를 한다면 그때는 위에 있는 권세라 할지라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행5:29).

 

42절과 43절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요셉과 같은 이런 화려한 모습을 해도 좋은가에 대한 문제인데, 분명 화려한 모습, 호화로운 외적인 모습을 하는 것은 그렇게 덕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도는 외적인 장식에 있어서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의 경우는 자기 복장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애굽 왕의 권세를 받은 자로서 애굽 백성 앞에 서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저들의 관습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절제할 수 있는 가운데 있다면 덕의 원리를 생각하여 절제하는 것이 분명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제 44절과 45절을 보시면 요셉에게 준 권세가 어떠한지를 다시금 분명히 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리고 요셉의 이름을 애굽 식으로 바꿔 부르게 합니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사브낫바네아’란 이름은 ‘비밀의 계시자’란 뜻이라고 합니다. 은밀한 것은 열어 보인 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네아’의 의미가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구원자’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지금 바로는 요셉의 애굽식 이름을 통해 그가 행한 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이면서 그에게 주어진 권세가 정당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총리로서 애굽을 다스리게 되는데, 46절 이하 49절은 풍년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창세기 37장의 경우 요셉 나이 17세입니다. 그가 형들에 의해 팔리게 된 나이가 17세 때의 일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17세가 되었을 때 팔렸다면 13년 동안 종으로, 죄수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3년의 훈련 기간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셉을 단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0세가 되었을 때 총리에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총리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7년 풍년 동안 바로 앞에서 편안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애굽 온 땅을 순찰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해결책을 따라 흉년을 준비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권세를 받았다고 해서 그 권세를 남용하지도 않았고, 그 권세로 인해 나태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 그대로 실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실행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풍년 이후 풍년을 집어삼킬 흉년이 올 것을 철저히 준비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 50절 이하 52절은 흉년이 찾아오기 전, 다시 말해 풍년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아들을 주셨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5절에서 요셉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였고, 그에게 온의 제사장, 그러니까 온이라는 땅의 제사장인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는데, 7년의 풍년 기간 동안 그를 통해 두 아들을 낳게 하신 겁니다.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런 요셉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고자 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 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그 뜻은 ‘잊어버림’입니다. 무엇을 잊어버리는가? 5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오랜 기간 동안 고난의 삶을 살았었는데, 그 삶이 그에게 있어 좋은 기억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의 시발점이 바로 형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또한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 일에 대하여 원망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좋은 기억으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난 뒤 평안함을 주셨을 때 더 이상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자기를 판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히 고백하는데, 어쩌면 여기서 자신의 고난을 잊어버렸다는 고백이 그런 고백까지 하게 만든 계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요셉을 단련하셨는데, 이 말은 단련 받아야 할 만큼 요셉의 신앙이 처음부터 완성의 모습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잊어버릴 수 있는, 특히 형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그래서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둘째는 낳고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뜻은 ‘창성함’입니다. 52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서는 잊고, 이제 하나님께서 머물게 하신 곳에서 수고를 하였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더하셔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수고에 대한 열매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장된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고난을 거두십니다. 거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을 잊지 만드십니다. 뿐만 아니라 단련하기 위한 고난이기에 그것을 거둔다는 것은 결국 단련하신 바를 이루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복 받을 만 한 자가 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구속하신 목적,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드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어떤 약속까지 하시느냐? 요한계시록 21장 3절 이하 7절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무익한 것이 아니라 유익함을 위해 주시는 고난이기 때문에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고난이 있을 때 고난만 봐서는 안 되고 고난을 잊게 만드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고난으로 인해 어렵고 힘들 수 있지만 고난을 통해 주고자 하시는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열매 맺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로마서 8장에 있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우리에게 보장된 것은 뭐냐? 영광입니다. 영광을 위해서 잠시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그것도 영원토록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잠시 잠깐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풍년 이후 꿈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흉년이 들기 시작합니다. 53절 이하 57절을 보시면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우선 풍년과 흉년 전에 그 소식을 애굽 온 지역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흉년을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흉년이 들기 시작하면서 각 나라마다 기근이 있게 되었는데, 풍년 이후 흉년의 소식을 모르는 자들은 많은 부분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준비해 둔 것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할 때 요셉에게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요셉은 풍년 동안 비축해 둔 양식을 애굽 사람들에게 파는 형식으로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나라들에게도 그런 방식으로 양식을 공급하게 됩니다.

이것은 저들로 하여금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만약 양식을 거저 주게 되면 거저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사고파는 방식으로 양식을 공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방식과 더불어 성경은 우리에게 거저 받은 것에 대하여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등을 돌볼 것을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어떤 형제나 자매가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데 거저 말로만 위로를 전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려운 자에게 거저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행20:35).

 

하나님께서는 지난주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해석했을 때 꿈을 해석한 그대로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흉년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들이 양식이 없을 때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양식을 미리 확보해 두도록 하셨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위해서 애굽으로 하여금 양식을 비축해 두도록 하시는가? 가나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흉년이라는 고난을 주시지만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예비해 두시는 바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환난 중에서도 우리는 인내해야 하고, 인내하면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롬5: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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