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2장 1-25절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가다
창세기 41장에서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그 꿈은 장차 있을 7년의 풍년과 그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7년의 흉년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어떤 사람도 바로가 꾼 꿈에 대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그 꿈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꿈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풍년을 집어삼킬 큰 흉년을 어떻게 하면 대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바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세워 다가올 모든 일에 대하여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초점이 애굽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는 야곱의 일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외적으로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 애굽을 위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있는 야곱 일가를 지키고 보존하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하여금 양식을 예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 이후의 내용을 통해서 서서히 밝혀지는데, 우선 창세기 42장은 흉년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있는 야곱의 일가도 어려워지게 되면서 애굽에 있는 양식을 구하도록 열 형제를 보내게 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애굽으로 갔다가 양식을 구하고 올 수 있을 정도의 먹고 마실 것은 있었지만 극심한 흉년의 결과 기근이 심했기 때문에 양식을 사오지 않고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생사의 위기라고 판단할 정도로 심각한 기근이 가나안 땅에 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악’이라고 할 때 물리적인 악이 있고, 윤리적인 악이 있습니다. 윤리적인 악은 쉽게 말해 죄입니다. 이 죄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할 때 죄조차 그분의 뜻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죄의 저자, 죄의 승인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죄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만 하나님 때문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물리적인 악은 간단히 말해 환난과 같은 내용입니다. 풍년 후 흉년이 왔다고 할 때 이 흉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실행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저자, 혹은 승인자로 돌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런 환난의 내용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내용 속에서 볼 때 시험의 형태로 찾아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하시는가? 웨스트민트서 신앙고백 제5장에 따르면 그들의 이전 죄들에 대해 그들을 벌주시거나, 그들에게 부패의 숨겨진 세력과 그들의 마음의 속임수를 발견토록 하여 그들이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지탱시키고자 하나님을 보다 가깝게 지속적으로 의지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나아가 그들로 미래의 모든 죄의 경우들을 대적하여 보다 경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여러 공의롭고 거룩하신 목적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고백합니다(5항). 그러니까 물리적인 악, 다시 말해 환난과 같은 시험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한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도 마찬가지이고, 야곱 당시 풍년 이후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흉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흉년을 주시는가? 정확한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처럼 이전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공의의 형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이들의 숨겨진 부패성과 그 마음의 속임수를 발견하여 더욱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끊으심으로 진정으로 의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공의롭고 거룩한 목적으로 위해서 하나님은 흉년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이런 흉년에 대하여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에 대하여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본다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람을 통해 주시는 유익들을 찾아가는 것은 다 믿음과 상관없는 행동으로 치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프면 성경은 기도할 것을 명합니다. 기도할 것을 명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좋은 믿음인가? 찾으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이런 경우 병원을 찾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을 아시고 의학이라는 것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도 무시하고, 병원을 찾으면서도 하나님이 이 일에 관여하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병원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함으로 병원을 찾는 것은 결코 믿음과 상관없는 행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도록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양식을 구하러 가는 일은 믿음과 상관없는 일인가? 만약 하나님을 제외시켜 놓고 있다면 믿음과 상관없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연단을 받은 야곱이 믿음과 상관없이 보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본문 1절에서 야곱은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까지 하는데, 믿음이 있다고 할 때 그 믿음은 단순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신앙으로만 자리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이 책망한 것은 무엇입니까? 애굽에 곡식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다시 말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오는 것을 보면서도 너희는 왜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속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은 열 명의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구해 올 것을 명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3절에서 5절을 보시면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요셉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야곱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야곱이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사실은 다릅니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먹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를 속여서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은 아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이 재난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재난이고, 요셉 입장에서도 재난입니다.
사람들은 재난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야곱의 자식들이 야곱을 속였을 때 진실은 아니지만 거짓에 속고 확신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나중에 요셉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요셉을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고난과 어려움, 재난과 같은 일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난조차도, 어려움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봐야 할 시각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재난이 왔기 때문에 재난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재난을 보고는 재난에 눌려 그것만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재난을 주신 목적, 재난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은 요셉에 이어 베냐민에 대한 편애를 가지고 있었고, 요셉에게 있었던 재난이라고 하는 일이 그에게는 굉장히 큰 트라우마로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결코 완전한 믿음의 상태는 아니었던 겁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믿음, 이것이 야곱의 믿음이요 오늘날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베냐민을 제외한 10명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 애굽의 총리는 요셉입니다. 형들이 팔았던 동생이 애굽의 총리로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것을 전혀 모릅니다. 6절 이하 8절을 보시면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일단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서 직접 애굽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함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나안 땅에서 자신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온 것입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형들을 보고는 알았지만 모른 체 합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복수를 위해서인가? 이후 내용을 보면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는 자신의 장자인 므낫세를 낳으면서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고난과 아버지 집에서의 일을 잊어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제는 형들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복수를 위해 모른 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저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또한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자신의 동생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 형들이 자기를 판 것처럼 동생에게도 좋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알고자 자신을 숨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성취의 내용을 보게 됩니다. 9절 초반부에 보시면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우리는 이미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꾼 꿈을 살핀 바 있습니다. 두 번의 꿈을 꾸었는데, 당시로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바로의 꿈을 해석할 때조차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가 꿈을 꾸었고, 그 꿈에 대하여 잊지 않는 자로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 꿈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고 있지만 그것이 계속적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미미하게 묻혀 있기 때문에 아예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일 경우가 많”은데(칼빈), 요셉이 꾼 꿈도 그랬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형들을 자신 앞에 무릎 꿇게 하셨을 때 그가 이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셔서 성취하고 계시듯 하나님은 오래 전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꿈을 꾸게 하신 그대로 지금 성취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말하지만 말한 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합법적 맹세를 하지만 합법적 맹세를 지키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때문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실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말씀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을 보면서 요셉은 자신에게 주신 그 꿈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다. 꿈대로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따질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오히려 저들을 애굽을 정탐하기 위해 온 사람으로 몰게 됩니다. 9절 하반부를 보시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형들의 정체를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것, 그것도 정탐꾼인 것처럼 거짓말을 해가며 시치미 떼는 것, 과연 정당한가? 우리는 요셉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가는 일들이 있지만, 모든 기준은 하나님과 그의 법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만을 기뻐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사기와 거짓을 금하십니다. 때문에 요셉의 이런 자세는 결코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에게 무슨 특별한 조치를 취하셔서 그가 일반적인 행동 법칙에서 어긋나되 잘못은 없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신실한 자들의 신앙적인 행동 가운데는 합법적으로 선례가 될 수 없는 그러한 것도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거룩한 조상들의 행동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규정하는 법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명령에 입각해서 신실성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셉이 사실과 다른 무엇을 위장했다는 점이 결코 우리에게 동일한 행동을 시도하도록 하는 변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이 사사로운 본을 받아서 제 멋대로 하나님의 법칙을 뒤엎으며 그 결과 거기에 금지된 행동을 방자하게 행한다면 그는 당연히 그의 오만에 대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요셉의 이런 자세는 이후 내용에서 조금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10절 이하 17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앞서도 말했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은 아버지 야곱은 잘 계신지, 그리고 자신의 동생 베냐민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자 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방향을 결국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지만 너희 말을 입증하는 것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떤 표현이 있느냐 하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5절 중간에 보시면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고 16절에서도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여러분, 우리가 합법적으로 맹세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 사람들이 자신의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듯 동일하게 맹세합니다. 이것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왕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유일한 참 신으로 섬기는 자들에게는 분명 배치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애굽에서 살면서 저들의 언어 습관을 그대로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만큼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참된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핑계꺼리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한 것은 분명 그의 잘못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15절에 이어 16절에서 이런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악에 젖고 나면 거듭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죄에 대한 경계를 하지만 죄를 짓고 지으면 그것이 익숙해져서 죄인 줄 모르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한번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한번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는 것,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요셉이 애굽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의 부주의함, 경계해야 할 바를 경계하지 않은 탓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악습에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이제 18절 이하를 보시면 정탐꾼이라고 하여 옥에 가둔지 3일 만에 풀어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18절에서 20절을 보시면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앞서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한 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아무런 증거 없이 생명을 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제시하는데, 너희 말이 사실이라면 한 사람만 옥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너희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가서 너희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 말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저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21절을 보시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내용이 아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닥친 일로 인하여 최소 20년 전의 자신들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팔 당시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주변에 앉아 음식을 먹던 사람들입니다. 그때만 해도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들이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요셉을 형들에게 애걸하였습니다. 꺼내달라고,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외침을 저버렸습니다. 오히려 그들끼리 앉아서 음식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지금 여기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 이런 괴로움이 임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요셉의 형들과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릅니다.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이런 저런 괴로움을 주십니다. 괴로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과거의 어떤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게 하십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경우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뒤엎으십니다. 모든 죄를 다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 20년 전의 죄도 생각나게 하셔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것입니다. 칼빈은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뜻에서 외적인 채찍 못지않게 그의 성령의 은밀한 작용을 통해서 그들이 오랫동안 은폐해 두었던 그 죄악을 억지로라도 의식하게 하셨음에 틀림없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시면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르우벤의 경우 형제들이 요셉을 해할 목적을 가졌을 때 생명을 해하지는 말자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중에는 일단 살려서 아버지께로 돌려보낼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좀 더 나은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요셉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는 모두가 자신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르우벤의 경우 아버지께로 돌려보내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좀 더 나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형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들 스스로 악한 목적과 방식으로 죄를 지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죄는 그들로부터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동일한 일 속에서 하나님은 선한 목적과 내용으로 그 일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저들의 대화를 요셉을 다 듣고 있었는데, 23절에 보시면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앞서 요셉과 요셉의 형들은 같은 언어로 대화한 것이 아니라 통역을 세운, 다시 말해 요셉은 자신이 애굽 사람인 것처럼 저들 앞에 서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총리로 있는 요셉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요셉 앞에서 요셉과 관련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요셉은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 나가서 울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시면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살펴본 내용은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게 된 내용입니다. 저들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지만 거기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애굽으로 찾아온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깁니다. 숨기고 저들을 정탐꾼으로 몰게 됩니다. 심지어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합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자신을 미워해서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기에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은 자신에게 행한 형들의 잘못을 용서했지만 형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아직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본문을 통해 형들을 시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런 의도라 할지라도 거짓을 도입하여 정직과 멀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 왕 바로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더더욱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요셉이라 할지라도 애굽에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애굽화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20년이나 더 되는 죄에 대하여 그때는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있었지만 이제는 죄인 줄 알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분명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오래 전의 일이라고 해서 넘어가도 괜찮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모든 죄를 다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떠올리시는 것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기억나게 하신다는 것과, 그것을 위해 어떤 괴로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이 그들의 죄에 대하여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하여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20년 후가 아니라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지금,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권면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오히려 선한 양심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화 되는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지만 구별된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