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2장 26-38절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오다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꾸게 하신 꿈은 애굽을 넘어 애굽의 주변국, 그리고 가나안에 있는 야곱 일가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있던 야곱 일가도 7년의 흉년 가운데 극심한 기근을 겪게 되었습니다.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 위기 가운데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애굽에는 양식이 넉넉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아들 10명으로 하여금 양식을 사오도록 보내게 됩니다. 이때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은 보내지 않는데, 왜냐하면 요셉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한 일이 그에게 굉장히 큰 충격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야곱은 모르고 있었지만, 또한 요셉의 형들도 모르는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 일가를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실 뿐만 아니라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워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애굽에 있던 요셉이 고향에서 온 형들을 보았을 때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야곱이나 동생인 베냐민의 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를 숨길 뿐만 아니라 형들에 대하여 애굽을 정탐하러 온 첩자인 것처럼 해서 거짓까지 동원하게 되는데, 이런 부분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행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봤지만 그는 애굽 왕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보통 요셉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로 설명할 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 하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인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는 부패한 인간이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이들 가운데는 욥과 같은 인물, 노아와 같은 인물에 대하여 완전한 자라는 표현을 한다고 해서 그런 자들에게는 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그러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아담의 타락 이후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악 된 모습 속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바로 요셉의 형들로 하여금 20년 전 요셉을 팔았던 그 일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요셉은 정탐꾼이 아니라면 다음에 올 때 너희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올 것을 말하면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과 양식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을 자루에 싸서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으로 갔던 형제들 중 아홉 명이 돌아오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내용과 애굽에서 일었던 일을 아버지 야곱에게 고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먼저 26절과 27절을 보시면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왜 요셉이 양식을 주면서 돈을 받지 않았는가? 왜 형들 몰래 그들이 가지고 온 돈을 도로 넣게 했는가? 아마도 자신의 형들이기 때문에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저들 몰래 돈을 돌려준 형식으로 있기 때문에 이후 내용 속에서 저들이 당황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되지만, 분명한 것은 당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혹은 저들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돈을 돌려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형들이기 때문에, 또한 고향이 있는 아버지의 소유로 돈을 받는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왔던 돈을 그대로 돌려준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은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부모와 형제들에 대하여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입장에서 자비를 베풀고 형제들 입장에서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쪽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거저 준 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게 됩니다. 28절을 보시면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지난 시간 정탐꾼이라는 의심을 받았을 때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너희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20년 전 동생 요셉에게 행한 바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요셉은 형들이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고 넣었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넣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저들은 요셉이 넣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돈을 도로 넣었기는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으로도 인해 그들이 하나님께서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넣은 것은 분명 사람이 넣었을 것인데, 그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들에 대해서 화를 품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정탐꾼으로 오해 받은 것,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양식을 훔친 꼴이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을 통해 지금 저들은 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2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저들의 영혼을 깨우고 계시는 겁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또한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갈아엎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대상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흔한 분별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신자들의 경우 자신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원수들을 비난하는 일로 일관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있는 좋지 못한 일을 통해 혹 자신의 죄악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면 자신의 죄에 대하여 반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에게 이런 모든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20년 전에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저들의 마음을 겸비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겸비케 만들고자 하실 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 혹은 당황스러운 일을 만나게 하실 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만 생각합니다. 마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물리적인 악에 대하여 주체로 계십니다. 얼마든지 그의 섭리 속에서, 그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주시는 목적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놓치게 되면 대부분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 것처럼 여기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매우 주의해야 될 부분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징계의 손길일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애굽으로 갔던 열 형제 중 아홉 형제가 가나안에 돌아와 자초지정을 아버지인 야곱에게 설명합니다. 29절에서 34절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이 부분은 지난 시간에 살핀 부분을 반복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지금 아홉 형제들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설득해야지만 앞으로도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올 수 있고, 또 갇혀 있는 시므온도 데리고 올 수 있기 때문에 저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설득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이 부분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각자 자기들의 자루를 쏟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당황스러우면서도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35절을 보시면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앞에서는 한 사람이 자루를 열어 보았다고 되어 있고, 여기서는 각 사람의 자루를 열어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 모두가 두려워하였다고 말씀하기 때문에 앞선 내용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루를 열어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라고 생각했지만, 각 사람의 자루에 자신들의 돈뭉치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까지 와서 아버지께 모든 사정을 다 고하고 난 뒤 각자 자기 자루를 열어보니 각 사람의 돈뭉치기 그들의 자루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아홉 형제들의 경우 28절과 같은 마음이 더욱 더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이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버지인 야곱도 돈뭉치를 보고는 두려워하였는데, 아버지 야곱의 두려움은 저들과 같은 두려움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잘못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미칠 일들이 결코 밝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움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형제들과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한 번 저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시기까지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죄에 죄를 더하면 죄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 무뎌지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두려움도 때로는 무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으시면 회개하기 전까지는 그의 마음에 평안이란 없습니다. 이 일에도 두려워하고, 저 일에도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은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의 두려움은 오해로 빚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홉 형제는 분명 양식에 대한 돈을 지불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돈을 주고 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양식을 훔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그 일로 인하여 미칠 화를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행동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분명 요셉은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돈을 도로 넣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이기 때문에(딤전5:8) 가족을 돌본다는 측면에서 형제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이 오해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즉 좋은 마음으로 행한 것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전달되기보다는 오해를 사서 두려움 가운데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선이 다른 사람의 불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예로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제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구제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나타냄으로 자신이 마치 도움을 받는 사람들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불편함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6:3).
본문의 경우 이것과는 다른 측면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을 숨겨서 행한 선이 선 그대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오해를 하게 만들고, 그런 오해가 저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의도이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편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 야곱은 탄식하게 됩니다. 36절을 보시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우선 야곱은 모든 탓을 아홉 명의 자식들에게 돌립니다. 즉 너희들 때문에 요셉도 잃고 시므온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 말대로 베냐민을 데라고 간다면 그도 역시 위험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원망합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나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아니라 해롭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해롭게 하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유익하도록 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지금 야곱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 자신 입장에서는 요셉을 잃었고 시므온도 없어졌습니다. 또한 베냐민까지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형제들의 잘못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들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야곱의 잘못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바가 전혀 없고 모든 탓을 자녀들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잃었다고 생각하는 요셉은 지금 애굽의 총리로 있습니다. 시므온은 어떻습니까? 인질로 잡아 놓았지만 그것은 형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일 뿐 결코 죄수처럼 취급받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냐민의 경우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안전하게 될 부분으로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야곱의 무지함, 그리고 믿음의 연약함은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탓합니다. 원망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혹 실제로 요셉이 죽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만 하시는가? 주신 것을 거두기도 하십니다. 거두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이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두시는 그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복을 받아야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요셉과 관련해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요셉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욥의 고난 이후 2배나 되는 지상의 복을 받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종교개혁자들이 순교한 것은 선이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은 지상적인 복으로 결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임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지 나사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상에서의 복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복인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의 이런 자세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아버지 야곱의 반응에 대하여 첫째 아들이 르우벤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절을 보시면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잘못을 확인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장담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4장 15절에 의하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뜻이 있다면, 주께서 원하시면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교만일 뿐입니다. 지금 르우벤은 이런 교만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교만의 결과인데, 바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아들을 죽여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은 누구에게 달리 문제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삼상2:6). 그렇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르우벤이 하고 있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요, 그만큼 자신 만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 아버지 야곱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38절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르우벤의 장담도 문제이지만 르우벤의 말에 대하여 야곱의 불신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 시므온은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시므온을 생각하자면 보내야하겠지만 요셉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로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에 대한 편애가 이제는 베냐민에 대한 편애로 있었고, 결국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는 것으로 르우벤의 제안을 거절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오늘 우리가 살핀 모든 내용 속에서 수없이 많은 점과 흠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만,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고백이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후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고백하는 내용을 통해 더욱 대조적으로 드러납니다. 창세기 45장 5절과 7에서 8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고통과 고난을 주시지만 고통과 고난조차 교회의 유익함이 된다는 인식이나 고백이 지금 야곱이나 그의 아들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조차 믿음의 연약함과 자신의 점과 흠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중에 바로 앞에서 자신의 연수는 자신의 조상보다 짧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그만큼의 고난을 통한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야곱은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본 것입니다.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저들을 연단하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시련을 주시고 시련을 통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연단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야곱의 아들들의 잘못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요셉을 사용하기도 하시는데,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이 생각해 낸 바에 대해서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한 방법이지만, 그래서 요셉일지라도 점과 흠을 내놓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점과 흠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시는 분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점과 흠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신다는 것 때문에 점과 흠도 괜찮다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점과 흠도 괜찮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요셉의 형들의 마음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려운 일로 인하여 요셉에게 행한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이 교훈하는 바는 점과 흠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점과 흠은 멀리해야 할 것으로 있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죄는 멀리해야 할 것이지, 괜찮다는 것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죄를 버리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의를 세우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기 때문에 죄를 죽이고 의를 나타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지혜로워야 하는데,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불편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 목적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 선을 행했다는 거기에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선을 행했을 때 그 선이 상대방에게 유익함으로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혹 불편함이 된다면 불편해하지 않고 유익이 될 수 있는 선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선이 그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물리적 악조차 선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교훈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렇게 일하실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조명할 필요가 있고,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올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 놓고 때로는 이 땅에서의 즐거움도 맛보게 하시지만 때로는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더욱 돌아볼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