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3장 1-34절
야곱의 아들들,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가다
창세기 42장은 흉년의 때 기근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에 있던 야곱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열 명이 아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보내게 되는, 그리고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금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친히 요셉에게 꾸게 하신 꿈의 내용을 성취하십니다. 바로 열 명의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절하고 있는 대상이 요셉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애굽의 높은 지위를 맡은 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부터 양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엎드려 절하였을 뿐입니다.
요셉은 이런 형들을 보면서 자신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애굽을 정탐하러 온 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저들로 하여금 곤란한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런 요셉의 자세는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저들이 과거 요셉을 팔았던 죄를 생각나게 하십니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주셔서 저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시므온을 제외한 아홉 명의 형들을 풀어주게 되는데, 그때 그들이 양식을 사기 위해 가지고 온 돈뭉치를 받지 않고 도로 넣어주게 됩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형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통해서도 요셉의 형들은 과거 요셉을 팔았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양식을 사러 가야 할 때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총리로 있는 요셉이 다음 번 양식을 사러 오기 위해서는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그래야지만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아버지 야곱이 반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대도 결국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사 오지 않으면 야곱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소유물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흉년으로 말미암은 기근이 극심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 1절 이하 15절은 바로 베냐민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요셉 앞에 서게 되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우선 1절과 2절를 보시면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여기 보면 ‘다 먹었다’고 되어 있지만 애굽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의 어느 정도 양식은 비축해 두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지체하면 야곱에게 속한 자 중 누군가 먹지 못할 일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시점에서 다시금 양식을 사오도록 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하게 됩니다. 3절에서 5절을 보시면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한 마디로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으려면 애굽으로 다시는 오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결코 갈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아버지 야곱은 왜 동생이 있다는 말을 했느냐고 따집니다. 6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그만큼 베냐민을 저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괴로운 일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반응에 대하여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도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말합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가족 사항에 대하여 묻기에 대답했을 뿐,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할 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유다가 아버지께 말합니다. 8절에서 10절입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10절에서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다면 벌써 두 번이나 갔다가 왔을 것이라는 말은 이미 갔다가 와야 할 상황이었지만 미루고 또 미루다가 이제 마지막 한계선까지 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반드시 가야 하는데, 여전히 아버지가 완고하게 거부하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혹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베냐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는 겁니다.
지난주에 르우벤의 말도 봤지만 르우벤의 경우 마치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장담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런 장담이 자신의 아들의 생명까지 담보로 내놓을 정도였는데, 이런 자세는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반면 유다의 자세는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만약 최선을 다했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고 말하기 때문에 르우벤의 자세보다 훨씬 낫습니다.
한편 야곱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상황으로 봤을 때 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고집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자신의 고집을 꺾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참고 견디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떤 면에서 자기 고집을 부릴만큼 부리다가 마지막에서야 꺾는 그런 자세를 보입니다.
어쨌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베냐민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데, 굉장히 괴로운 마음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인데, 그래서 야곱은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우선 11절에서 13절을 보시면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유향과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는 보통 때 그렇게 귀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흉년으로 말미암아 기근 가운데 있었고, 기근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선물을 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집에 있는 것 중 괜찮은 것들을 선물로 보내면서 애굽 총리의 마음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사 올 때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 있었는데, 그것까지 가지고 가서 오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14절과 같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자세를 볼 수 있는데, 11절 이하 14절을 통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어떤 일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할 수만 있다면 애굽 총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오해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그 오해를 풀려고 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베냐민만 데리고 가면 되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상황을 좋은 쪽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잠언 21장 14절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그러나 동시에 야곱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리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칼빈은 이 부분과 관련해 다음의 설명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업이나 일이 난관에 봉착하게 될 때는 언제나 야곱이 행했던 이 두 가지 일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기의 일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찾아낼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완수해 놓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신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해 보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진행되는 모든 일들이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진행되고 완성되어졌다고 보지는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신앙인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기원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 야곱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의 표현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공로주의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해야 되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의 표현으로 하자면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후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때 결과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달렸기 때문에 해야 되는 일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자칫 우리는 이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우리의 게으름을 감추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서 기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올바른 신앙의 내용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방편들을 사용하는, 거기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의 내용을, 과정은 나에게 달렸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렸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께 달렸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과정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명하시고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명령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와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거룩 하라는 명령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실제로는 이루는데, 그렇게 이루는 자신을 숨기시는 것처럼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 열심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없어야 말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라고 하시고,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력케 하시고, 열심을 내도록 만드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빌립보서 1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다음의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물론 야곱의 신앙을 되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점과 흠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렸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앙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본받고 교훈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특별히 14절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는 고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 했고, 또한 거기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자식을 잃게 하시면 잃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말하면서(에4:16)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왕 앞에 나아가고자 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결과가 영광스러울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난 이후의 영광을 지상적인 것으로, 또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난 이후 영광은 지상에서 누리도록 하시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신앙을 지키다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받다가 지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끝난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 영광을 받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바로 그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야곱이 말한 대로 아홉 형제와 베냐민은 모든 준비를 하고 애굽으로 가서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15절을 보시면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다시금 왔다는 것과 그들과 함께 베냐민이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집으로 오게 합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시면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그러니까 요셉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보고 싶어 했던 베냐민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래 전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기 때문에 이제는 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청지기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인도할 것을 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 입장에서는 낯선 곳으로 가는 것으로 인해, 그리고 지난 번 왔을 때 양식을 위한 돈을 지불했지만 그것이 그대로 자신들 자루에 들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본문 자체를 통해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 일도 요셉을 판 결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즉 모든 좋지 못한 일이 지금 요셉을 판 것과 연관시켜 생각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 그들은 도둑이나 첩자로 몰리기 전에 사실 그대로를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요셉의 청지기에게 지난번에 있었던 일과 관련해서 말하게 됩니다. 19절에서 22절을 보시면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자 요셉의 청지기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23절과 24절을 보시면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여러분, 이 부분은 굉장히 놀라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청지기로 있던 자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근심과 걱정으로 두려워하는 저들에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난번 양식을 사러 왔을 때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각 사람의 자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결코 두려워할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 재물을 너희 자루 속에 넣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제로는 누가 명하여 돈을 자루에 넣게 했습니까? 요셉입니다. 창세기 42장 25절에 보시면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즉 요셉이 각 사람의 자루 속에 지불했던 돈을 도로 넣을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요셉이 아니라 요셉이 섬기고 있던 하나님입니다.
요셉의 청지지가 요셉 곁에 있으면서 하나님 지식을 가지고 되었는지, 그래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청지기가 요셉이 명한 것을 요셉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분에게 주체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41장에서 바로가 표현한 것과 동일합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난 뒤 바로가 어떻게 말하느냐? 39절에서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스스로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창41:16, 25, 28).
이런 측면에서 청지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요셉이 하나님을 주체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명하였지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라는 측면을 분명히 드러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의 말이 사실임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청지기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주 본문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저들이 걱정하고 염려했던, 그리고 두려워했던 돈의 출처가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요,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지난주 요셉이 행한 바와 관련해 형제 사랑이라는 점을 말씀드렸는데, 이 청지기의 표현을 통해 우리는 요셉이 고백했던 부분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41장 16절을 보시면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꿈을 해석하는 자는 요셉이지만, 요셉으로 하여금 꿈을 해석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겁니다.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돈을 돌려주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명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선물을 주신 겁니다. 달리 말하면 양식을 먹되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먹은 양식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요, 선물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물이 그들에게는 걱정이 되었고 염려가 되었고 두려워하는 일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과거 요셉을 팔았던 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물조차 두려워하게 하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조차 선물로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선물답게 누리기 위해서는 결코 죄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너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 후 애굽에 있던 시므온을 데리고 옵니다. 이것 역시 그들에게는 위로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저들 입장에서는 시므온이 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안심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집으로 들어가 요셉을 기다리게 되는데, 25절 이하 34절까지는 요셉과 함께 요셉의 형들, 그리고 동생 베냐민이 식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일단 지난주부터 확인하게 되는 요셉의 관심사는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입니다. 여기서도 아버지 야곱이 평안한지 묻게 되고, 또한 함께 온 베냐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베냐민을 자신의 눈으로 볼 때 동생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눈물이 터져 나와 급히 울 곳을 찾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 결과 음식을 차릴 대 요셉에게 따라, 형제들에게 따라, 또 거기에 있던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게 되는데, 여기서 몇 가지를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방금 읽은 본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 꾸게 하신 꿈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6절에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그리고 28절에 ‘머리 숙여 절하더라’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29절에서 요셉이 베냐민에게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데, 외적으로 보자면 자신이 형들 그리고 베냐민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형태이지만 요셉은 은혜의 진정한 주체가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은혜를 베푸시길 원한다고 했을 때 단순히 자신이 음식을 베푸는 정도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해 주시기를 구하는 뜻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요셉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형들, 그리고 동생인 베냐민에게 대접합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들이지만 이제는 그들과 함께 식사 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자비를 베풀고 또한 형제 사랑의 실천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식사 자리에 앉힐 때 나이 순서대로 앉히는데, 음식을 주는 데 있어서는 막내인 베냐민에게 더 많은 분량을 주게 됩니다. 아마도 형들에 대한 마음보다 동생, 그것도 같은 어머니 태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동생에 대한 애정이 더 많아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칼빈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베냐민의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영광은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은 어떠합니까? 높은 자가 더 높아지고 많은 자가 더 많아집니다. 소위 없는 자가 있는 자가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 자로 하여금 있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낮은 자로 하여금 높은 자로 만드십니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자로 하여금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힐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지금 요셉을 판 열 명의 형들에게 역사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시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고난을 받게 하신 이유도 여기 있으며, 이후 애굽의 총리로 있게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형들처럼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죄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 친히 역사하십니다. 때로는 죄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도 하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기도 하십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드문드문 맺게 하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 벗어나게도 하십니다.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영광을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선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앉히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무엇보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