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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220설교 / 창세기44장1-34절 / 주의종이그아이를대신하게하소서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12.20|조회수586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4장 1-34절

주의 종이 그 아이를 대신하게 하소서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사온 양식이 거의 떨어져 갈 때 아버지 야곱은 다시금 양식을 사 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양식을 사러 갔을 때 정탐꾼으로 오해 받은 일이 있었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 입장에서는 막내 베냐민에 대한 연민이 컸는데,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던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고 자기 곁에 두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지난주 본문 가운데 유다가 말하기를 지체하지 않았다면 두 번이나 갔다 왔을 것이라는 말을 한 바가 있는데, 그만큼 지체가 된 상황이었던 겁니다. 보내지 않으면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죽을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떠나보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애굽의 총리로 있던 요셉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동생 베냐민을 만났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자신을 판 형들보다는 같은 어머니를 통해 낳은 동생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마음은 형제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할 때 잘 나타납니다. 즉 요셉은 동생 베냐민에게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음식의 다섯 배를 더 줌으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던 겁니다.

 

이제 창세기 44장은 즐거운 식사 후 다음날이면 또 다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요셉이 꾀를 내어 저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1절에서 5절을 보시면 요셉이 청지기에게 명합니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몇몇 주석을 보면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시험과 관련해서는 나중에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지금 요셉이 은잔을 베냐민에게 넣은 것은 헤어져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기 때문에 동생 베냐민을 좀 더 자기 곁에 머물게 하기 위해 꾀를 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여기에 무엇이 나타나고 있느냐 하면 요셉이 형들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생 베냐민을 자기 곁에 좀 더 머물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거짓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요셉의 점과 흠과 죄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니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의 승인자도 아니십니다.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요셉의 시험이다,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요셉이 시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다소 주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점과 흠, 그리고 죄악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죄의 저자가 아니시지만, 죄의 승인자도 아니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죄조차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만드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요셉의 거짓을 결과가 좋다는 것으로 과정은 어떠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기 위해서 꾀를 내는데 형제들 각자의 자루에 각자의 돈을 넣게 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베냐민에게는 자신이 늘 마시던 은잔을 넣게 합니다. 이 은잔에 대해 요셉은 그가 늘 점치는 데 쓰는 도구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저들은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설정일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꿈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심으로 알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 자가 어떻게 은잔을 가지고 점을 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애굽 땅에 그런 자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의 점과 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그런 고백이 무색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을 동원하고 있고, 거기에 자신이 애굽에서 점치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은잔의 경우 점치는 데 쓰는 도구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것임을 부각시켜 그것을 가져간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거짓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가 어떻게 거짓을 승인하고 거짓의 저자일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이 시키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6절을 보시면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여기에 대해 형제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면 부인합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직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8절입니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지난번에도 양식을 위해 지불하려던 돈이 들어 있어서 그대로 가져왔는데, 어떻게 우리가 총리 집에 있던 은 금을 도둑질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9절을 보시면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여기에 대해 청지기는 좋다고 말합니다. 10절을 보시면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이미 종은 누구에게 요셉의 은잔이 들어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요셉이 누구를 가지 못하도록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니라 은잔을 훔친 그 사람만 종이 될 것을 말합니다.

이제 각자의 자루를 열어보는데, 나이가 많은 순서부터 열어보게 됩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면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사실 가져갔던 돈이 그들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불했던 돈이 다시 그들 자루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청지가가 찾고 있는 것은 요셉의 은잔입니다. 그리고 이미 43장에서 이미 청지기는 이전에 주었던 돈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돈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으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혹 지불했던 돈도 자신들 모르게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은잔도 그런 방식으로 들어와 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만큼 긴장하면서 각자의 자루를 하나씩 열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잔이 누구에게서 발견되느냐 하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겠습니까? 13절에 보시면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저들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고통을 맛보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에게 말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 시간 살펴 본 것처럼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미 두 번이나 갔다가 올 수 있는 시간만큼 끌고 또 끌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이르러서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셉에 대한 편애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후 아우인 베냐민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들의 경우 이전에는 요셉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지만, 본문 전체적인 내용 속에서 보자면 이제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 베냐민이 이제는 애굽의 종으로 남게 된 상황인 겁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습니까?

 

은잔이 발견되고 난 뒤 애굽으로 다시금 돌아와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14절을 보시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여기서 유다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후 유다가 말하게 되는 내용 때문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요셉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5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이미 말했지만 요셉은 거짓으로 형들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정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의 점과 흠, 죄악이 나타나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점과 흠, 죄악을 사용하셔서 선한 결과를 나타내시는데, 유다의 말과 형제들의 자세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면 유다가 겸손하게 자신들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후 내용 속에서 베냐민의 죄에 대해서는 경감시켜 주기를 간청하기 위한 자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자신들이 훔친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리고 누군가 넣은 것이 분명하지만, 이 일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벌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지금 저들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저들을 벌하고 계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면 할 수 있는 한 변명과 다른 사람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아담은 아내 탓,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하나님 탓을 했습니다. 하와는 뱀 탓을 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지금 열 명의 형들 마음은 자신의 죄를 시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저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요셉을 팔았던 것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벌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하여 요셉의 거짓조차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한 사람만 종이 되면 된다고 말합니다. 17절을 보시면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아버지도 양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은잔이 들어있지 않은 형들에 대해서는 보내고자 합니다. 은잔이 들어 있는 자만 여기에 남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시험하게 되는 여지가 있는데, 처음에 은잔을 베냐민에게 넣은 것은 베냐민을 자기 곁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이제 베냐민만 애굽에 남도록 하겠다고 할 때는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습니다. 과거 자신을 팔았던 형인데, 동생 베냐민에 대해서도 여전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바뀐 바가 있는지 알고자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전에는 자기들만 생각했습니다. 요셉을 팔 때만 해도 요셉에 대한 측은함, 그리고 아버지가 받게 될 충격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즉 어느 정도 그들의 자세가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분명 바꿔주셨는데, 18절 이하 34절에 나오는 유다의 말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먼저 18절을 보시면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찾아내셔서 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베냐민과 관련해서 그리고 아버지와 관련해서 간청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들어주시길 간청합니다. 특히 유다는 총리로 있는 요셉에게 존경과 경의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를 ‘주’라 칭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종’이라고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주는 바로와 같다고 말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인정합니다. 이런 자세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만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롬13:1 참조).

계속해서 유다는 베냐민이 아버지에게 어떤 자로 있는지를 말합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현재 자신의 아버지 야곱은 많이 늙었고,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베냐민은 아버지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에게 형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랑한 형은 죽었고 그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에 대한 마음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 베냐민을 데려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가 아버지께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그가 없으면 아버지가 어떻게 될지를 아뢰게 되는데, 21절 이하 31절입니다.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 우리가 내 주께 말씀드리기를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간단히 말해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버지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30절에서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말은 아버지가 베냐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게 해 주는 표현입니다. 그가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분명 극심한 슬픔 가운데 있게 될 것이고, 슬픔에 못 이겨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가 말한 내용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분명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될 때 부모로서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부분도 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죽은 자로 인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소망 없는 무신론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뮤얼 러더퍼드라는 개혁자는 딸 아이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한 여성에게 편지하면서 아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 것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말씀으로 권면하기도 합니다. 아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또한 하나님께서 아이를 잠시 당신에게 맡긴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뿐만 아니라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품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 또한 언급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소망 없는 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유다의 말, 즉 베냐민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아이의 없음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식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되 그 슬픔이 너무 극심하여 자신이 죽을 정도가 되는 그런 슬픔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들은 소망이 없는 게 아니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퍼할 수 있지만 소망이 있다는 것 때문에 슬픔에 있어서는 절제할 수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한편 우리는 앞선 장에서 야곱이 베냐민을 보낼 때 다음의 말을 한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43장 14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자식을 잃게 되면 슬퍼할 수 있겠지만 야곱이 베냐민을 보낼 때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물론 실제로 베냐민을 잃게 되었다면 이런 각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면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각오한다고 해서 다 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나타나기까지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미 이런 각오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유다가 말하는 내용이 정당한 내용으로 있는가?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아버지 야곱의 슬픔이 극심할 것이라는 것을 과장법 식으로 말한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슬퍼하여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슬픔이 크기 때문에 베냐민만큼은 보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매우 괴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베냐민을 데리고 올 때 자신이 아버지께 말했던 내용도 말하면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잡아두기를 간청합니다. 32절에서 34절을 보시면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의 희생적인 마음을 볼 수 있는데,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붙잡혀 있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동생 베냐민을 무사히 아버지께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이런 유다의 자세로 말미암아 요셉은 자신을 밝히게 됩니다. 창세기 45장 1절에 보시면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그리고 2절에서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어떤 면에서 유다의 말이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밝힌 것입니다. 실제로 18절에서 34절까지의 유다의 말을 보면 온통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은 희생되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보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의 계보를 통해 태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점을 부각시켜 유다의 남다름을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유다의 남다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무엇을 보시고서 그것 때문에 어떤 결정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지예정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차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놓게 계신가 하는 부분입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요셉을 팔고 난 뒤 저들의 행실과 관련해서는 나오는 바가 없습니다. 한 가지 기록된 내용이 있다면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의 남다름보다는 유다의 어리석음, 그의 죄악됨을 밝히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변화된 것입니다. 바뀐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악 기억나게 하시고,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시인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남다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계보 속에서 오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다의 계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하셨을 때 본래는 어리석은 자요, 죄 밖에 내놓지 못하는 자이지만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성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인하여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미워할 때 그를 웅덩이에 던져 넣으면서도, 그리고 엉덩이 안에서 요셉이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눈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겁니다. 변화시키십니다. 주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로 유다가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다고 할 때 나 중심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로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철저히 우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만 생각하셨다면 어떻게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던 내용처럼 십자기를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유익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바를 그의 몸 된 교회가 동일하게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유다의 자세를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다른 사람을 유익케 하는 것이라면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사랑을 나타낼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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