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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0103설교 / 창세기45장16-28절 / 요셉이지금까지살아있으니가서보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01.03|조회수84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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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장 16-28절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가서 보리라

 

창세기 45장에 들어와서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힙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린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7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의 나이 17세 때 형들에 의해 팔렸다면 13년 이후 총리가 되고 풍년 7년에 흉년 2년째 되는 해이기 때문에 대략 종으로 팔리고 난 뒤 22년 후 쯤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밝힌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큰 고난을 주셨지만 그 고난은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으며, 요셉의 형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던 요셉이 없어졌기 때문에 평안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들춰내시며 저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밝히시기까지 참아내고 계셨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요셉의 형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죄악을 내놓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해 보자면 당장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도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오래 참으십니다. 오래 참으실 뿐만 아니라 회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하심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자로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기도 하십니다. 어려움을 주시고,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어려움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을 가지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무엇을 작정하셨다면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하시며 실행하기 위하여 친히 섭리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일이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 손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지난주 살핀 본문을 통해 참된 용서의 근거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 입장에서 형들이 자신을 팔았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을 따라 생각하자면 자신에게 형들을 해할 수 있는 권력이 생겼을 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하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였을 때 요셉은 그들에게 어떤 잘못을 돌리기보다는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은 억울하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총리로 세울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흉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가문이 어려움 가운데 놓일 때 그런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보존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이끄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까지 표현합니까?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판 자는 당신들이라고 하는 형들이지만, 그러나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저들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저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팔았기 때문에 근심하고 한탄해야 할 일로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요셉 입장에서는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요셉 자신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런 고난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따져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분명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좋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까?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저 사람이 나에게 해를 주는 것처럼 여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해를 주면서도 저 사람은 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잘못을 알든 모르든 하나님이 그 일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꼭 나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해야지만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자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들춰내시고 자신의 죄를 알게 하신다면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 왕 바로가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아버지 야곱 가정을 초청한 사실과 그 사실을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알리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16절에서 20절은 애굽 왕 바로의 말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애굽 왕의 자세가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면에서 요셉을 통해 애굽이 보존될 뿐만 아니라 애굽 주변에 있던 나라들도 보존되는 형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에게 유익함을 주는 인물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 그만큼 지금 애굽 왕은 요셉을 존중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에 대한 존중은 누구에 대한 존중까지 연결되느냐 하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까지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왕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꿈을 해석해 주고 꿈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줬다고 해서 애굽의 총리를 세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도 볼 때 파격적입니다. 애굽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나라의 정치를 보면 우파가 있으면 좌파가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 상대편을 끌어내리는 일이 있습니다. 왕정 시대라고 해서 그런 일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까지 붙들어주지 않았다면 순탄하게 그 일이 진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의 말로 인하여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것,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렸을 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만큼 요셉을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지금 요셉이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저들이 보기에도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인데, 이 모든 일이 누구로 말미암느냐 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좋을 때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일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주관하셔서 요셉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조차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때 얼마든지 이방인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믿지 않는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여러분,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다스리십니다.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하게 생활하기 위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적대적인 감정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안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볼 부분은 애굽 왕 바로가 수레를 가져다가 형제들의 자녀와 아내,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태우고 모셔올 것을 명하는 부분인데, 연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까지 배려하게 하시느냐 하면 노인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 생각하여 먼 길을 오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이방 왕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더욱 연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고아나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출22:22), 또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채권자 같이 하지 말고 이자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출22:25). 레위기 19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특히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은 네가 떨어진 이삭을 다 줍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게 하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임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연약한 자들을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잘못으로 인하여 속죄제를 드릴 때 어린 양을 바치도록 하시지만, 그의 형편이 어린 양을 바칠 수 없을 때에는 산 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을 것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연약한 자를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희도 그런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은 애굽 왕이 가나안 땅에 있는 것들은 아까워하지 말고 내버려 두고 와도 된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여기에 더 좋은 것이 다 너희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덜 좋은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 땅의 것으로 비교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분명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요, 그 복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 최고 상급으로 계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의 것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실제 삶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데도 여전히 이 땅에 연연하며 삽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보다 이 땅의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애굽 왕 바로 입장에서 가나안에 있는 것보다 애굽에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어떤 것도 하늘에 있는 것보다 좋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것을 새기셔야 합니다. 심지어 하늘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 자신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이 땅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감사와 인내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이 내용과 관련해서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으로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그의 하늘의 영광을 나누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기구를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최고로 즐겨봐야 잡동사니일 뿐이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것을 안전하게 할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근심하지 말고, 그것을 보지도 말고, 관심 두지도 말자. 축복된 땅에는 우리를 위해 준비된 더 좋은 것들이 있...다.”

 

이제 요셉은 바로의 명을 따르게 되는데, 본문 21절 이하 24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우선 베냐민에게 더 많은 것을 준 것은 동생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창세기 34장에서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도 형들보다 더 많은 음식을 줬는데, 형들에 대한 마음보다 동생, 그것도 같은 어머니 태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동생에 대한 더 많은 애정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만 칼빈은 이런 내용 속에서 베냐민의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영광에 있어서는 가장 많이 받는 자로 있다는 것을 말했는데, 이 내용 속에서도 우리는 그런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지금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 대한 배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까지 챙깁니다. 한 마디로 부모에 대한 공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기본적인 관계로 하자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고 이때 자식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늙어가는 부모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딤전5:8 참조).

 

다만 이런 사랑의 마음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때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나안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돌아오게 될 텐데, 왜 굳이 필요 이상의 것을 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는 동안 먹을 양식, 그리고 오는 동안 먹을 양식은 줄 수 있습니다. 옷 한 벌씩 준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에게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준 것이나, 아버지에게 보내고 있는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린 것, 암나귀 열 필에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은 것 등은 필요 이상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을 보면 모든 사정을 들은 아버지 야곱이 믿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보고 믿느냐 하면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믿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고 오는 길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보낸 이유는 가나안에 가서 형들이 말하게 될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가나안 땅을 떠나기 싫어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살았던 터전, 그것도 약속의 땅인데 어떻게 함부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옮기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다는 사실과, 거기에는 더 좋은 것이 있어서 흉년의 때를 피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알림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즉 요셉이 살아 있으며,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야곱 가문 전체가 와서 평안히 누릴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배려와 함께 요셉은 형들이 가면서 길에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하는데, 이것은 요셉의 살아 있음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 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서 결국 누구를 탓하게 되는 일로 번질까 염려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죄가 드러나면 대부분이 죄의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감추고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춰내는,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에 대한 변명과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이 있게 되면서 다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슨 의미까지 들어 있느냐 하면 요셉의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할 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변명과 비난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굳이 아버지께 형들의 잘못을 들춰내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것까지 포함하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 그것도 짐승에게 잡혀 먹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실제로는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슴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겠습니까? 요셉은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요셉이 고백한 것처럼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체로 있다고 할 때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요, 그렇게 행하신 것은 야곱 가문, 즉 하나님의 교회의 구원과 보존을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들이 아니라는 말은 그들에 대한 용서가 분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형들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도 보았습니다. 이미 용서했는데, 용서한 것을 다시 들춰내어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살아 있음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서 살아 있는지 자초지정을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부득이하게 거짓을 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 자체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시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짓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거짓 자체는 점과 흠과 죄악일 뿐입니다. 그러나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언제나 지혜로운 것이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정탐꾼을 숨겨 준 라합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숨겨줬습니다. 숨겨주면서 그들을 찾는 자들 앞에서 거짓을 고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생명을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에 있어 개혁자들은 소위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서 거짓 자체를 편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거짓은 거짓일 뿐입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답으로만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형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뉘우침을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저들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였습니다. 이미 용서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의 죄에 대하여 들춰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를 들춰내거나 상기시키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과연 용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용서의 한계는 어떤 면에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용서한 그 죄에 대하여 자꾸 들춰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했다는 것은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우리의 죄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자로서 우리를 대하실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실제 교회 안에서도 실천되어야 할 내용인데, 알려지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지만, 알려질 때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마18:15-20).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처음에는 형제의 죄를 알게 된 그 사람만 가서 권해야 합니다. 그때 죄를 범한 자가 듣고 회개하면 죄를 알게 된 사람도 더 이상 그 죄에 대하여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하나님이 용서한 죄를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금 권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게 되면 용서를 해야 하는데, 이때 우리는 그의 죄에 대하여 들춰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게 어렵습니다. 소위 낙인이 찍혔다고 하는 것처럼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그래서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없으니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도 이런 실천의 내용이 분명 열매로 있어야 합니다.

치리와 관련된 부분은 사실 매우 지혜로워야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죄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열 명의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어떤 식으로 말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용서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자신들의 죄를 밝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밝히지 않는 과정 속에서 결국 거짓이 섞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는 점과 흠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열 명의 형들과 베냐민이 가나안 땅으로 가서 모든 일을 아버지께 아뢰게 됩니다. 25절 이하 28절을 보시면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은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22년 동안 죽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말하게 한 내용으로 말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위해 보낸 수레를 보자 저들의 말이 사실인 줄 믿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요셉이 죽은 자로 있었습니다.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었다고 생각한 그를 통해 야곱과 그의 가문을 구원하시고 보존하려고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야곱과 그의 가문을 구원하시고 보존할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형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미워 요셉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런 그가 애굽의 총리로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를 통해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 보존이 될 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요셉의 꿈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뜻하셨던 겁니다. 그의 뜻이 어느 하나 다르게 실행되는 역사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그의 뜻대로 일어날 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의 구체성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와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과 길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을 향해서만 예배와 경배를 올려드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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