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세기

210110설교 / 창세기46장1-27절 / 애굽으로내려가기를두려워하지말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01.10|조회수737 목록 댓글 1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6장 1-27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고 난 뒤 흉년의 해가 5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아버지 야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와서 살 것을 권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 역시 요셉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 애굽에 와서 살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배려하였는데, 오늘 본문은 이런 배려 속에서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는, 그리고 이주하게 된 야곱 가문의 명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라고 기록합니다. 앞선 장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은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총리로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식들의 말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요셉이 보낸 모든 물품을 보았고 특별히 아버지를 위하여 보낸 수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야곱 입장에서는 그를 보고 싶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5장 28절에 보면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떠나는 것이 야곱 입장에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8장에 보면 벧엘에서 꿈을 꾸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3-15) 이런 말씀은 이후에도 나오는데(창35:11-13), 단지 야곱에게만 약속하신 땅이 아니라 그의 조부 아브라함,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도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듣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그의 조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이삭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을 야곱은 들어왔습니다. 그런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브엘세바까지 오게 되었지만 거기서 무엇을 드리느냐 하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평소에도 희생제사를 드렸지만,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겠지만, 여기서는 좀 더 특별한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의 성취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의 경계 지역인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약의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의 제사와 관련해 믿음으로 드린 제사라고 말하는데, 이때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 합니다. 달리 말하면 판명성에 있어서는 신약에 비해 희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할 때는 반드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놀랍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받으실 수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정성의 문제로 푸는 사람들이 있는데,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라는 말 자체를 통해 공로가 거절 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차원에서(엡2:9), 그리고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란 차원에서(요1:13)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면 공로가 아닌 겁니다. 오히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제사, 그리스도 없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역으로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와 예배를 받으셨다면 거기에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졌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희생제사를 받으시고 응답하시는데, 2절에서 4절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조금 전에 벧엘에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그때는 꿈의 방식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라면 여기서는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이고, 또한 야곱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상 중에 나타나신 것도 사실이고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있어서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는 이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시되 그 말씀을 이상 중에 말씀하셨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말미암아 야곱의 마음이 좀 더 감명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 없는 성찬이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가톨릭의 성찬을 ‘생명력 없는 환상으로 영혼들을 참 하나님에게서 이탈시켜 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창세기 본 절 주석), 우리가 계시의 종결과 기록된 성경의 완성을 말함으로 더 이상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때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고 있는 고백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상 중에 말씀하시되 먼저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그만큼 내 말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지 않고 야곱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야곱의 이름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한편은 졌다는 의미고 한편은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겨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져 주셨기 때문에 이겼다고 말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자기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야곱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마도 야곱이 형 이삭을 만나러 갈 때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래서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랐던 것처럼, 여기서도 애굽으로 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 두려움으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실제로 3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움으로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벗어나는 것과 연관된 것으로 처음에는 죽었다고 생각한 요셉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속히 가서 보고자 했지만, 흉년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주하게 되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태가 많이 늙었기 때문에 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여행 도중 가장 사랑하는 라헬의 죽음도 경험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르시자 야곱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방금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약속의 땅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큰 민족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어야지만 큰 민족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약속의 땅이든 애굽 땅이든 얼마든지 큰 민족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엄밀하게 땅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땅이 뭔가 특별한 그런 곳은 아니란 것입니다. 땅 자체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함께 하시지 않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렸을 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팔려가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즉 가나안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약속의 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입니다. 본질이 어디 있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야곱의 아버지 이삭 때 큰 흉년이 왔습니다. 아브라함 때도 큰 흉년이 있었는데, 이삭 때 다시금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흉년을 피하기 위해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삭 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말씀이 있다면, 이삭의 경우처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면 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잠시 떠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 의뮨 들었던 겁니다. 이런 자세는 분명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상 중에 말씀하시는 바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무엇인 옳은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땅이라 할지라도 너를 그곳에서 큰 민족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는 이 말씀은 야곱이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질 일은 아닙니다. 야곱에게 약속하시는 외형을 띄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야곱의 자손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애굽으로 간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가나안 땅으로 다시금 오게 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곱은 이미 형을 속이고 난 뒤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성취하신 것을 실제로 자신의 생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이 야곱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요,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게 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에게는 분명한 확신으로, 그리고 큰 위로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앞날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마1:23).

물론 함께 계시지만 어려움 가운데 놓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처럼, 심지어 종으로 있으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 않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때문에 그런 일 속에서도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창세기를 살펴보면서 확인한 것처럼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려움이지만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무익한 일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익함을 위해 주시는 어려움, 그것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런 어려움을 주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주시면서 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앞서 야곱이 많이 늙었다는 것과 긴 여행이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라헬을 여행 중 잃었다는 말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만나지 못하는 죽는 일은 없다는 것까지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두려워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여러 면에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겁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하신 3절과 4절의 말씀은 이미 창세기 15장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인데, 구체성은 창세기 15장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이하 16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야곱 가문을 보내시는 이유는 결국 저들의 죄악을 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보여주고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로 넘어가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세워지면서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들보다 많고 강하기 때문입니다(출1:8-9). 오늘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애굽으로 넘어간 야곱의 자손은 70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얼마나 큰 민족이 되게 하시는지 애굽 사람보다 많고 강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애굽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받지만 출애굽기 1장 12절에 의하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심판하시고, 그런 심판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십니다.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무엇 하나 성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와서 가나안 땅을 심판하십니다. 공의의 심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역사들을 정하시고 아시는 자로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그리고 애굽에서 행할 일,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서 행할 모든 일이 하나님 안에는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은 있을 수 있습니다. 애굽 땅에 가서도 학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더 강하고 번성했는데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바뀔 수 없는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어려움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만큼의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구약의 말씀, 신약의 말씀을 주셨다면 그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약속의 말씀으로 야곱은 힘을 얻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우리말 번역에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칼빈은 이 단어를 일어났다고 번역합니다. 애굽에 가는 것이 두려움으로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애굽 왕 바로가 보낸 수레를 타고 가게 되는데, 여기 보면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가지고 간 것으로 기록합니다. 이미 1절에서도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선 장에서 바로가 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45장 20에 의하면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쉽게 말하면 가나안 땅에 있는 소유물을 굳이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어도 여기서 더 좋은 것을 소유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납니다. 이것은 애굽 왕 바로의 말을 무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애굽 왕 바로의 말이 거짓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분명 가나안에 있는 것보다 애굽에서 애굽 왕이 줄 소유물이 더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서는 흉년으로 말미암아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애굽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간 명단을 기록합니다. 7절 이하 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 르우벤의 아들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요 시므온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스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요 레위의 아들은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요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잇사갈의 아들은 돌라와 부와와 욥과 시므론이요 스불론의 아들은 세렛과 엘론과 얄르엘이니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 갓의 아들은 시뵨과 학기와 수니와 에스본과 에리와 아로디와 아렐리요 아셀의 아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와 그들의 누이 세라며 또 브리아의 아들은 헤벨과 말기엘이니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레아에게 준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육 명이라 야곱의 아내 라헬의 아들 곧 요셉과 베냐민이요 애굽 땅에서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요셉에게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 단의 아들 후심이요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이들은 라반이 그의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칠 명이라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야곱을 비롯하여 야곱의 열 두 아들과 딸, 그리고 그들로부터 낳은 손자들과 손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4명의 아내들이 있었는데, 중간 중간에 보면 그 아내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가 야곱에게서 낳은 자손들이라고 말하면 그 수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아내인 레아와 관련된 수를 헤아려 보면 33명으로 기록하지만 수를 헤아려 보면 32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야곱 자신을 여기에 포함한 수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야곱과 레아를 통해 32명, 실바를 통해 16명, 라헬을 통해 14명, 빌하를 통해 7명해서 도합 70명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야곱의 아내들의 경우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들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여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딸인 디나가 기록되어 있고(15), 또한 손녀(아셀의 딸 세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17).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7절에서 야곱의 딸들, 그리고 손녀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디나 외에 또 다른 딸이 있는가? 17절에 기록된 세라 외에 또 다른 손녀들이 있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 명 밖에 없다고 해도 단순가 아닌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손들을 열거할 때는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관용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3절에서 단의 아들은 후심 한 명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복수형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누구 누구의 아들, 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다 복수형입니다. 즉 자손들을 열거할 때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관용적 표현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앞서 야곱의 아내들이 빠져 있다고 했는데, 라헬의 경우는 베냐민을 낳다가 이미 죽었고(창35:19), 레아의 경우는 창세기 49장 31절에 의하면 그도 역시 가나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실바나 빌하도 가나안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아내들이 명단에 빠진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함께 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애굽으로 간 모든 사람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야곱에게는 자신의 소유를 맡아 관리할 수 있는 종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도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을 포함하여 그의 아들들과 딸, 그리고 손자와 손녀의 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수가 70명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의 경우 그 인원을 말할 때 75명으로 언급합니다(행7:14). 본문에 나오는 수에 대하여 출애굽기에서도 70명(출1:5), 신명기에서도 70명(신10:22)으로 언급하는데, 왜 스데반은 75명으로 언급하고 있는가? 칼빈의 경우는 사본가의 잘못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70인역 번역을 따라 설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70인역에서 본문에 나오는 70명을 75명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0인역의 경우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데,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랜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참고했다고 하는데, 스데반의 경우 70인역을 따라 75명으로 언급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70인역에서 오늘 본문 20절과 21절 사이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요셉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손자들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JS). 즉 사본가의 잘못도 아니고, 사본의 실수도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기록한 70명도 틀리지 않고, 스데반이 언급한 75명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을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번성하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초는 7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70명도 적은 수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그리고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실 것이라는 이 약속이 가나안에 있을 때가 아니라 애굽에 있을 때 성취하시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셔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라고 되어 있지만, 여전히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을 이끌고 계신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야곱 가문의 구원과 보존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번성을 위하여 애굽으로 보내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애굽과 같은 곳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때문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있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많으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못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 때문에 담대해야 합니다. 아무리 낮선 곳으로 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최성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7 창세기 46장 20절에 대한 70인역
    또 애굽에서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태어났는데 이들은 태양 성읍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 낳은 것이라 이것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아들이라 므낫세는 첩 아람 여인(시리아 여인) 쉬라에게 마길을 낳았고 마길은 길르앗을 낳았더라 그리고 에브라임은 수탈리암과 타임을 낳았고 수탈리암은 에뎀을 낳았더라
    (예수님이 보신 성경 70인역 창세기 번역본, 엘맨 출판사)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