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7장 13-26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야곱 가문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가 대략 흉년 2년째 되는 해입니다. 요셉이 말한 것처럼 아직 다섯 해나 남아 있을 때(창45:11 참조) 야곱 가문은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 가문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시기 위한 것으로서 이 일을 위하여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던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형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완악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요셉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셨는데, 야곱 가문이 흉년 가운데서도 구원받고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종으로 팔린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까지 세우셨던 것입니다.
총리로 있던 요셉은 7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7년 풍년을 매우 잘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자기들만이 아니라 주변국에게도 정당한 대가를 받고 양식을 팔았을 정도로 잘 준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애굽 백성들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이때도 주변국들에게 줄 수 있는 나라로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그만큼 철저히 잘 준비를 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저히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통해 알리실 때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으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흉년의 강도가 7년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알라신 일을 가감 없이 실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에 요셉이 그렇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근의 때가 얼마나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있습니다. 우선 13절을 보시면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18절에서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라는 말씀이 나오고, 새 해라고 말하는 그 해에 애굽의 모든 토지가 애굽 왕 바로의 것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20). 그리고 그때 애굽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종자를 주어 땅에 뿌리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23). 그러니까 본문은 두 해에 대한 내용인데, 앞선 해에서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다음 해에서는 종자를 땅에 뿌리면 결실할 수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땅이 황폐해 있는 것이 아니라, 뿌려서 결실할 수 있는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기근이 더욱 심하다는 것은 아마도 흉년의 막바지 쯤 되는 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기근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야곱 가문이 애굽에 도착했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그나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땅이 있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을 떠났는데, 거기에는 가축이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미 요셉으로 하여금 목축을 할 만한 곳이 있다는 것을 들었고, 그래서 갔던 곳이 고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역시도 좋은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때 야곱 가문은 고센이라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즉 흉년이 시작된 지 2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애굽 땅에는 그래서 목축을 할 만한 곳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근이 점점 더 심해지면서 더 이상 비옥한 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풍년 때 흉년을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변국들에게까지 양식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백성들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잘 준비를 했던 겁니다. 다른 나라에게 주고, 또 자기 백성에게도 줄 정도, 한 마디로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식에 있어서는 애굽 백성이라 할지라도 거저 준 방식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돈을 주고 사 먹게 했고, 돈이 다 떨어졌을 때는 가축과 양식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심지어 돈과 가축까지 다 떨어졌을 때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팔고 양식을 대신 얻도록 했습니다. 양식 준비와 관련해서만 말씀드리면 그만큼 풍년 때 흉년에 대한 대비를 잘 했던 것입니다. 이웃 나라에게 팔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애굽 백성에게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럼 애굽 나라만 준비를 하고 애굽 백성은 전혀 준비를 하지 않았는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정당한 유추를 할 수 있는데, 우선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내용을 애굽 사람들은 몰랐는가 했을 때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양식을 거둬들이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흉년의 극심함을 생각한다면 풍년 때 거두는 양의 5분의 1은 세금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제시합니다(창41:33-36).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왕과 신하들은 찬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백성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5분의 1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그렇게 했다면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훨씬 적은 양을 받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흉년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소위 세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자신들의 생애에 있어서 경험해보지 못한 흉년을 7년이나 겪어야 하기 때문에 그 흉년을 대비하기 위해서 세금을 더 받아야 한다는 설득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 백성이 5분의 1을 냈다면 그들 역시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왕과 그의 신하들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굽 온 백성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도 풍년 때 흉년을 준비하는 일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애굽 나라만이 아니라 애굽 온 백성이 풍년 동안 흉년을 준비했던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같습니다. 애굽 백성들까지 돈으로 양식을 사 먹게 되고, 돈이 떨어졌을 때는 가축을 팔게 되고, 돈과 가축이 다 떨어졌을 때는 자신의 토지까지 팔게 되는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기근이 극심했다는 증거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 백성들도 흉년을 대비했지만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풍년 때 쓰는 것처럼 흉년 때도 그렇게 사용하면서 낭비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반면 본문을 통해 나오지는 않지만 야곱의 가문은 어떠할까요? 야곱의 가문은 애굽 왕 바로의 배려와 요셉의 지원으로 말미암아 부족하지 않게 먹고 마실 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창47:12)고 말씀하는데, 애굽에 올라온 그 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흉년 기간 동안 계속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의 요셉의 위치는 소위 2인자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야곱과 그의 가문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양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돈으로 양식을 살 뿐만 아니라, 돈이 떨어져 가축까지 팔게 되고, 심지어 토지까지 팔게 되는 그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애굽이라는 나라의 백성들은 극심한 기근으로 말미암아 자기 것을 다 팔아서 양식을 얻게 되는 형태이지만, 정작 애굽 사람들이 볼 때 이방인으로 있던 야곱 가문은 거저 얻는 그런 방식으로 있더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말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절과 8절도 보시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 온 집의 주로 삼지 않으시고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야곱 가문에 양식을 거저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 온 집의 주로,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그러한 계획을 하셨는가? 이미 형들에 의해 팔리기 전부터 요셉의 꿈을 통해 그러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보자면 이미 이 일이 영원 전에 작정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다고 할 때 기근조차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려움 없이 그냥 평안하게만 하시면 안 되느냐는 생각을 가집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만 좋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근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바의 다양성을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생각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우선 기근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도록 만드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는 일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이런 부분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것만 있는가? 때로는 기근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만인가?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진노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여전히 오래 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건이지만 그 한 사건 안에 다양한 뜻을 품고 행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이 잘못 실행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의 지혜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실수하는 것인 양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지가 아니라 우리의 무지일 뿐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으로 인하여 온 세계가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이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13절을 보시면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다고 되어 있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황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애굽 땅 가운데서는 비옥한 땅이 있었지만, 그 땅조차 이제는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의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땅에 있는 것이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해 줍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이 땅의 것은 무엇이든지 변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것은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야곱 가문에게 양식의 풍족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기근이 극심하여 애굽 백성들조차 돈으로 양식을 사고, 돈이 없어 가축으로 양식을 바꾸고, 심지어 토지까지 팔아서 양식을 살 때 야곱 가문은 애굽으로부터 양식을 거저 얻는 자들로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 가문에게 축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새기셔야 합니다.
이제 13절 이하의 내용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돈이 떨어져 가축으로 양식을 바꾸는, 그리고 땅까지 팔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우선 14절에서 17절을 보시면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풍년 때 5분의 1을 거둔 것이 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고 또 따른다 하더라도 풍년 때 거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손해가 된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풍년 때 5분의 1을 낸다고 해도 5분의 4의 양은 이전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복을 내려주시되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풍년으로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흉년이 시작되면서 풍년 동안 모아둔 양식들은 소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애굽 안에서는 한해, 두해가 지나도 비축해 둔 개인 양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흉년의 극심함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심해져갔습니다. 바로가 꾼 꿈에서 보이신 것처럼 7해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흉년이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한편 7년 풍년동안에는 마음껏 사용하더라도 비축해 둘 수 있는 그런 풍성함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흉년이 되더라도 풍년 때처럼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그러나 흉년이 지속되면서, 그것도 점점 더 극심해져 가는 흉년이 지속되면서 결국 애굽 백성들조차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돈으로 양식을 사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졌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래서 양식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축을 양식과 바꾸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해를 견디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돈도 없고 가축도 없어서 땅까지 팔게 되는,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팔고자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18절과 19절을 보시면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이런 정책에 대하여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습니다. 풍년 때 5분의 1을 거둬들였다면 그 가운데 일부는 애굽 백성들에게 거저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혹은 애굽 백성만큼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금 싼 값에 양식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돈과 가축, 땅까지 심지어 땅조차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까지 팔아가면서 양식을 구하도록 할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정책에 대해서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할 때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애굽 백성들에게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알리면서 풍년 동안 흉년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렸을 것이고, 7년 흉년의 경우 7년 풍년을 집어삼킬만한 것으로 있기 때문에 흉년 때는 풍년 때처럼 살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실제로 풍년 동안 5분의 1을 거두어서 흉년 7년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애굽 백성들에게만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까지 양식을 공급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5분의 4를 가진 애굽 백성이 5분의 4를 다 쓰는 것이 아니라 5분의 1만큼만 흉년을 대비하는 데 모아두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 혹은 대비했지만 규모 있게 사용하지 못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요셉이 이러한 정책을 편다고 할 때 애굽 왕 바로의 뜻을 따라 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일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흉년에 대한 애굽 백성의 자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의 모든 것을 바로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지금 애굽 백성의 모든 재산, 그리고 그들의 모든 땅을 바로에게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서로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점이라는 사실도 있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칼빈의 주석을 참고 하여 말씀드리면, 어떤 이들은 요셉이 가난한 농민들에게서 그 나라에 곡식을 대는 전지까지 탈취한 것은 정말로 잔인성과 탐욕의 극치가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구매 방법이 정당하다고 할 것 같으면, 요셉에게 비난을 퍼부을 이유가 없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요셉이 그들의 빈곤을 이용하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을 이렇게 궁핍하게 만든 것이 요셉의 어떤 술수나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은 한결같은 공평과 성실로 왕의 업무를 대신 처리했을 뿐입니다. 왕명에 대하여 어김없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토지를 판 것이 저들의 요청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주겠다는 것을 닥치는 대로 마구 받는 것도 옳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극심한 궁핍 가운데 있게 될 때 거기서 헤어나려는 사람은 어떤 악조건에도 굴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요청을 한다고 해서 그의 궁핍을 기회고 그를 탈취하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애굽인들은 자진해서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요셉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 요셉을 비난하도록 하기 위한 내용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근이 극심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염두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풍년 동안 준비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야지만 양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에게 보이신 꿈이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지만, 그래서 대비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대비하지 못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한계가 나타나고 있으며, 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땅 대부분이 바로의 소유가 됨으로 요셉은 애굽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이동시키게 됩니다. 21절에 보시면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그러니까 땅을 다 팔게 되면서 그 땅이 애굽 왕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땅에서는 떠났지만 새로운 땅을 주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땅을 팔았기 때문에 거주할 곳 없이 아무렇게나 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있다고 보게 될 내용에서처럼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거기서 얻게 되는 것은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백성으로 하여금 성읍들을 옮겼다는 것이 무자비한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내용이 제사장의 토지에 관한 것인데, 22절을 보시면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여기서 제사장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애굽의 신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애굽 백성보다 애굽의 신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더 악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정책에 따라 그들의 토지를 보존하신 것처럼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토지를 팔지 않아도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이교도인 왕도 자기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예배에는 각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 또한 거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제공했던 것입니다. 미신적인 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도록 돕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로마서 15장 27절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제 요셉은 애굽 땅에 새로운 토지법을 세우게 되는데, 23절 이하 26절입니다.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본문을 요셉의 포악함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내용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저들을 위한 토지법을 세우는데, 토지가 이미 바로의 것으로 있지만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그리고 토지에 뿌릴 종자도 제공합니다. 뿌려서 거기서 추수하고 되는 5분의 1은 바로에게 상납하고 나머지 5분의 4는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양식으로 삼도록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애굽 백성에게 좋은 결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즉 요셉을 지금 주라고 부르고 있는데, 요셉이 자신들을 살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기근으로 말미암아 죽을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요셉의 정책으로 인하여 그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애굽 백성 스스로가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을 요셉의 포악한 어떤 정책으로 볼 수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기근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의 애굽 내 상황을 보게 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그만큼 기근이 더욱 극심했다는 겁니다. 잘 준비했다고 할 수 있는 애굽 백성들조차 그들의 돈, 그들의 가축, 그들의 토지까지 내놓아야지만 양식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바로를 통해 꿈으로 보이신 것이 얼마나 사실로 있게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근의 극심함을 겪고 있지만 끝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본문에서는 땅에 뿌릴 수 있는 종자를 주고 그것으로부터 거두게 될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7년 흉년이 끝난 겁니다. 흉년 때는 거둘 수 없었지만 흉년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 생을 한번 돌아본다면, 우리 생을 통해서도 풍년의 때가 있고 흉년의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90편의 고백대로 하자면 우리 인생은 수고와 슬픔(시90:10), 다시 말해 흉년의 때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다양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흉년을 마칠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흉년으로 말미암아 애굽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할 정도였지만, 야곱 가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흉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흉년 속에서도 피할 길을 예비해 두셨던 겁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고,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할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결국에는 모든 흉년의 때를 마치게 하십니다. 고난을 지난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바라보면서 이 고난의 때를, 이 흉년의 때를 인내하면서 지혜롭게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아무리 극심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어려움이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극심한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랑을 반드시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반드시 나타내시고, 나타내시는 만큼 우리로 하여금 유익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세상 앞에서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합니다. 염려의 문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염려할만한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하면 빌립보서 4장 7절의 말씀처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때 염려를 주께 맡기면 주님께서 우리의 염려꺼리들을 다 없애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없애는 경우도 있겠지만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씀합니다. 외적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문제는 그대로일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런 문제 가운데서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흉년이라 할지라고 그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평강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전혀 평강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으로 평강을 맛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위하심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