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8장 1-22절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한 축복
창세기 48장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축복하기에 앞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것으로 먼저 삼습니다. 5절 말씀과 같이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먼저 하게 됩니다. 이것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이 내용은 단순히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아 자신의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게 될 창세기 49장에서는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무엇과 연관된 것인가 하면 나중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분배받을 때 요셉 가문에 다른 지파에 비해 두 배나 받게 되는, 다시 말해 장자의 명분과 관련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12지파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요셉의 이름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갑니다. 요셉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한 지파씩 들어가게 되면 13세파이지만 땅을 분배 받을 때는 레위 지파가 제외되기 때문에 12지파가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를 담당함으로 두 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과 연결해서 역대상 5장 1절과 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육체의 순서로는 르우벤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은 누구에게 있느냐 하면 요셉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에 비해 두 배의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기서 주권자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는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5장과 관련해서는 이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왜 르우벤에게 있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돌아갔는가? 르우벤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와 셋째도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의 주도 하에 한 성을 완전히 멸망시킨 일이 있었는데, 분명 옳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원인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사람 편에서 볼 때 저들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몰라도 그도 역시 점과 흠과 죄가 있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유다의 경우는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하였습니다. 모르고 했다고는 하지만 모르고 했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역대상의 기록자는 다윗을 염두 해 둔 것이지만,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은 다윗 안에서 무엇까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느냐 하면 모든 인류 가운데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다볼 수 있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유다도 죄 없다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실행되는 일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르우벤의 죄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잃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요셉은 남다르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받은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장자의 명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받았습니까? 배고픈 형에게 거저 준 것이 아니라 밭 죽으로 거래해서 받았습니다. 동생이 배고픈 형에게 거저 줄 수 있고, 또한 거저 주어야 마땅하지만 장자의 명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때는 거짓까지 동원하면서 복을 빼앗는 형태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명분과 그에 합당한 축복을 거두시지 않습니다. 죄가 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셨기 때문에 죄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병들게 되고, 그 소식을 들은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 오게 되는 모든 과정은 단순히 인간의 도리로만 풀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 가문에게 복을 주시되, 장자의 명분으로서 복 주시는 그런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보시면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창세기 47장 28절에 의하면 그의 나이 147세입니다. 이미 기력이 쇠할 때로 쇠한 상태인데,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요셉이 듣고는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 야곱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존중하고 공경한 것처럼 우리 역시 윗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좀 더 일반적인 내용으로 적용하자면 몸이 아프고 불편한 사람에게 병문안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가르친다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데리고 간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후 내용 속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게 되는데, 요셉 역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자신의 두 아들이 축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잠시 언급했지만 야곱만이 아니라 요셉도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50장에서 자신이 죽을 것이지만 가나안 땅에 가게 될 때 자신의 해골이라고 가지고 갈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셉이 일찍 애굽으로 오게 되었지만 애굽에 왔다고 해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거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더 좋은가? 애굽의 총리로 있어서 평안하게 사는 것보다 하늘에 예비 된 처소가 더 좋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소망을 자기만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동일한 신앙을 자신의 자녀들이 가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요셉은 병든 아버지를 찾아 뵐 때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물론 요셉이 자기 부친을 그처럼 간절하게 뵙고자 하며 그처럼 신속하게 자신의 효성을 발휘하려 한 이유는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을 더 큰 특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자기 자식들을 데려온 것은 마치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나라에서 해방시켜서 그들의 원 둥치에 되돌려 놓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애굽인들의 버림을 받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이 교회의 거룩한 몸의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모든 영화와 재물보다는 그들이 그러한 비난을 받는 편을 더 원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바도 이것입니다. 특히 부모로서 자녀에게 어떤 소망을 가진다고 할 때 너무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공부 잘 하길 원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원하고, 또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직장 혹은 좋은 직업을 가지길 원합니다. 또 그렇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더 중요합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학교, 좋은 직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면서도 온통 세상적인 마음으로 자녀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병들었을 때 왜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갔는가? 한편으로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지 않습니다. 언제 아버지가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칼빈이 설명한 것처럼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몸이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모든 영화와 재물을 버려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적어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을 가진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야곱은 그 소식을 듣고는 불편한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언약하신 내용을 언급합니다. 2절 이하 4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가나안 땅 루스는 벧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본래 가나안 땅 이름이 루스였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난 뒤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또한 자신의 아버지 이삭에게 하신 약속과 전혀 다른 약속이 아닙니다.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은 백성이 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게 될 그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여럿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롬9:7) 육신의 자녀라고 해서 다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제외 되는 것이고, 에서와 야곱에서도 에서는 제외가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땅 자체를 위해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바라보게 하시는 땅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생각해 봤던 겁니다. 하늘에 있는 도성이 그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곳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자들이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본향인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언급하는 것은 자신이 축복하고자 하는 바가 이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동일한 축복을 요셉에게,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이지만 내 것이라고 말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가 그것이었고, 이삭에게 약속하신 바가 그것이었고, 또한 자신에게 약속하신 바가 그것이었다. 때문에 그 약속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은 애굽의 재물과 영화를 받고 있는 가운데 있지만 자신들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과 축복을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따라 부름을 받았다면, 그래서 아브라함이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상에 있는 것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지상에서의 삶을 살면서 지상의 것이 우리를 유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갖가지 유혹이 우리에게 있고, 그런 유혹 앞에서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넘어질 때는 하늘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잠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고,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구약 백성보다 더 분명하고도 밝히 드러나 있는 말씀 앞에 있기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봤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고 난 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이것은 이후 요셉을 대신하여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 담당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비록 애굽에서 자랐고 애굽 사람처럼 자랐지만 3절과 4절의 약속이 너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네(요셉) 자녀를 내(야곱) 자녀로 삼을 테니 애굽 사상을 계승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신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상속받아라.”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야곱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야곱이 선지자로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그들을 축복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49장에서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한 자는 야곱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를 말씀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는 것이 요셉의 어머니에 대한 내용입니다. 7절을 보시면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왜 갑자기 야곱은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요셉의 어머니의 이름이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자극제가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고 칼빈은 해석합니다. 본래는 가나안이 아닌 밧단아람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까지 왔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가나안 땅에서 죽었던 것처럼 너와 네 두 아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 이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애굽에 살고 있고 애굽 백성처럼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요셉의 어머니까지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에게 어머니 라헬이 자극제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구약의 선지들의 이름들이 열거 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4-5) 그리고 이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이 언급되고 있고, 그 외 구약의 여러 인물들이 언급됩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으로 넘어가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여러분,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이 여러분에게 자극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점과 흠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점과 흠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도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과 살인과 거짓 등 밧세바 사건이 일어나기 전 좋은 모습을 쌓다가 한 순간 다 무너뜨려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도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즉 저들의 좋은 내용을 통해서는 좋은 그것이 교훈이 되는 쪽으로 자극을 받아야 하고, 혹 저들의 좋지 못한 내용을 통해서는 그것이 반면교사가 되어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면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점과 흠도 없는 온전하고 완전한 모범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8절 이하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인데, 여기서는 축복한 내용과 야곱이 형인 므낫세보다 동생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은 것, 그리고 요셉의 경우 그것이 못마땅해서 바꾸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내용이 나옵니다. 우선 축복의 내용 자체로 들어가기에 앞서 8절 이하 1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5절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는데,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왔다는 소식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지금 현재 야곱의 상태가 눈이 어두워 볼 수 없기 때문에 확인 차 묻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을 야곱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야곱은 두 손자에게 입 맞추고 끌어 앉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고백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놀랍고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일조차 기대 이상으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낙심하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야곱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도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으로 실행하십니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잠시 좋지 않은 듯 보이는 일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가장 큰 영광을 위하여 잠시 잠깐의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결국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의 과잉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한번도 은혜의 결핍 속에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주실 때조차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함께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시험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예비해 두셔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까지 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미쁘심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고전10:13)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내 상황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의 미쁘신 말씀까지 거짓인 것처럼 반응하는 일이 많습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다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된 것처럼 여기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인 것처럼 그렇게 반응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게 되는 때가 오면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그것조차 은혜더라는 고백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때는 감당하지 못하는 자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최후 심판 자리에 섰을 때 우리의 모든 인생을 돌아보면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제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게 되는데, 15절과 16절을 보시면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요셉의 두 아들을 향한 축복이지만 그것이 곧 요셉을 위한 축복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부모에게 있어 가장 큰 축복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축복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인 축복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야곱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가 그것입니다. 복을 비는 자는 야곱 자신이지만 실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복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 이 말은 자신은 철저히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조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아 마땅한 분이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자신의 생에 있어서 자신을 어떻게 길러주셨는지를 고백합니다. 즉 자신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출생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한번도 자신을 떠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늘 곁에서 말씀하시고 교훈하시고 그러면서 좋은 것을 먹이시면서 길러주셨다는 겁니다. 혹 무서운 이리가 나타나 위협하는 일이 있다면 그들을 물리쳐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평생의 삶을 돌아보면 많은 부분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리고 말년에 좀 평안한 삶을 보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부분이 없었다는 겁니다. 단순히 말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실제 야곱은 그의 인생 속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축복의 내용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 달라는 것과 세상에서 번식되기를 원하는 것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야곱의 양자가 되어 12지파의 근간이 되는 것과 그들의 이름 아래 수없이 많은 주의 백성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못마땅해 하는 일이 있는데, 13절과 14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요셉은 장자 므낫세를 오른편에 세우고 차자인 에브라임을 왼편에 세웁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른손으로 에브라임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17절 이하 20절입니다.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아마도 요셉의 경우 아버지 눈이 어두워 실수인 것처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로 잡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혹 형 에서와의 관계에 있어서 에서보다 동생인 야곱 자신이 영적인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 그것에 대한 반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야곱은 성령의 지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49장으로 넘어가시면 1절에서 후일에 당할 일을 보인다고 말씀하면서 열 두 아들에 대한 예언적 성격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저들의 장래 일에 대하여 알리시는데, 핵심은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을 크게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므낫세도 한 족속을 이루어 크게 될 것이지만 에브라임의 경우는 므낫세보다 더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왈가불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 그러하다면 그 뜻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는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 편에 뭔가 더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인간의 어떤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자신의 기쁨을 따라, 자신의 자유로움을 따라 뜻을 정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어떤 것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실제로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누가 더 나빠 보입니까? 에서보다는 야곱이 더 나빠 보이지 않습니까? 나타나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을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다고 한다면 거기에 무엇을 섞어 마치 우리에게 어떤 원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다만 선택이나 유기조차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으로 말미암지만, 죄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정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사람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계속해서 야곱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얼만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줄 것이라는 것인데, 여기 보면 요셉에게는 다른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것 역시 앞서 다른 형제보다 요셉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인데, 실제로 나중에 보면 세겜 땅이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갑니다(수24:32 참조).
문제는 세겜 땅을 야곱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단 창세기 33장 19절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고 난 뒤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렀을 때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살 수 있도록 그 땅의 적은 부분을 돈으로 산 내용이 있습니다. 칼과 활이란 무력에 의해 빼앗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는 33장의 내용을 여기서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어 창세기 34장에서는 디나 사건이 나오는데, 그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시므온과 레위를 중심으로 대학살이 있게 됩니다. 그럼 이 사건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때도 우리는 야곱이 세겜 땅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들의 만행으로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칼과 활로 빼앗았다는 것은 33장에서 정상적으로 산 것도 아니고, 34장에서 악행의 결과로 빼앗았다는 그런 의미로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장차 있을 미래의 일로 생각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 세겜이라는 지역이 요셉 자손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그때는 칼과 활로 빼앗게 되는, 그러나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결과 자기 백성에게 주어지는 그런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창세기 48장은 야곱에 요셉을 축복하되 요셉을 통해 두 지파 몫을 받게 되는,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의 양자로 삼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속하게 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축복하는 자는 야곱이지만 실제로 야곱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입을 통해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그런 복을 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말씀하신 복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 복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기 백성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자라나게 하십니다. 환난의 내용이 있다면 그런 환난 속에서도 건져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야곱의 입을 통해 고백되고 있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의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이 축복의 내용을 사모하며 소망하는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