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9장 1-7절
야곱의 아들들을 향한 축복 ①
창세기 48장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한 축복입니다. 이때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축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정복하고 정착할 때 땅을 분배 받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후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안에 누가 있게 되느냐 하면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있게 됩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 그들의 이름으로 각각 한 지파씩 있게 되지만 요셉의 경우는 자신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를 담당함으로 두 몫을 차지하게 되는데, 창세기 48장은 바로 그런 뜻을 담고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태어난 순서로 하자면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장자로 삼아 그에게 더 많은 몫을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세기 48장 22절을 보시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라는 말씀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자신의 열 두 아들을 불러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르게 되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각 아들들에게 하는 내용입니다. 1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그러나 열 두 아들들에게 다 말씀하시고 난 뒤 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즉 지금 야곱은 그들이 당할 일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될 것이라는 측면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너희가 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28절에서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저들에게 축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복을 빌어준다고 해서 복을 비는 자가 복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을 비는 자는 도구일 뿐입니다. 실제적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성령님이 복의 주체로 계십니다. 당연히 예언이라 할 때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말하는 자는 야곱이지만 말씀의 주체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다시 1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면서 후일에 당할 일을 너희에게 이른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특별관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 만물을 다 만드셨다면 만드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가 관심을 두시는 대상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시면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었는데, 그 약속이 누구에게로 이어지게 되느냐?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만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약속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있었고 또 다른 자녀들도 있었지만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오직 이삭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이삭으로 하여금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지게 하셨는데, 이때도 에서가 있었지만 에서가 아닌 야곱으로 하여금 그 약속을 잇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열 두 아들에게 이 약속을 잇도록 하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는 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내용은 야곱의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축복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맞지 않는 듯 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다시 설명 드리겠지만, 어쨌든 그런 내용일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자기 백성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뜻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시면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1절에서 모이라고 말하고, 다시금 2절에서도 모이라고 말합니다. 왜 모이라고 하는가? 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누구로부터 듣느냐?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말하는 자는 자신이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입을 대변하는 자로 있을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은 사사로운 자기 집안 사정을 두고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를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언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저들을 복 주고자 하시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말하는 자는 목사요, 말씀 사역자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 사역자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즉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청중은 말씀 사역자의 입을 통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전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자신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들으라고 말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으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2절을 보시면 아들들에게는 ‘야곱의 아들들아’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본래는 야곱이었지만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창세기 32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야곱이 이겨서 이겼다는 뜻을 그에게 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을 때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단순히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봤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와 자비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과 관련해서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자신의 아들들에 관해서는 야곱이라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너희는 이스라엘로 바뀌기 전 야곱과 같은 자로 있지만,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들으라는 것입니다. 듣기 위해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축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말씀 가운데, 그리고 축복하고자 하시는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이 있느냐? 외적으로 볼 때 저주하시는 듯 한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3절 이하 7절의 말씀을 보면 이것이 어떻게 축복이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저주의 말씀이지 어떻게 축복의 말씀일 수 있느냐? 그러나 여러분,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11절부터 보겠는데,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신27:11-15) 그리고 26절까지 저주 받을 내용이 선포되면서 모든 백성이 ‘아멘’하도록 합니다. 이어 신명기 28장에서는 순종하게 될 때 복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열 두 아들로 이름 된 각 지파를 반으로 나눠 한쪽은 그리심 산에, 한쪽은 에발 산에 세우고 축복과 저주를 하지만, 저주한다고 해서 실제로 저주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함으로 너희는 저주 받을 일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으로 저주의 말씀까지 있는 겁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한다고 할 때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내용은 축복이라는 외형보다는 저주의 성격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주의 성격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는 저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도 복주시기 위한 방향으로써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3절 이하 7절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내용인데, 한 마디로 책망의 내용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책망을 통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 궁극적으로는 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책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히브리서 12장 8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친아들이기 때문에 책망하시고 징계까지 하시는 겁니다. 책망하고 징계해서라도 돌이키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책망과 징계가 아니라 그냥 복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고 할 때 이 타락의 성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왜 책망해야 하는지, 왜 징계해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책망과 징계가 싫습니다. 누가 저주의 말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책망과 징계가 없으면 안 됩니다. 책망이 있어야지만, 징계가 있어야지만 그나마 통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책망도, 징계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책망도, 징계도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아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책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징계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면 우리 편에서는 그것을 싫어할 것이 아니라 신명기 27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런 책망과 징계에도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의 처음 세 아들을 향한 내용을 살피겠는데, 우선 3절을 보시면 르우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태어난 순서로 하자면 르우벤은 야곱의 첫째 아들, 장자입니다. 특히 르우벤에게 돌려지는 표현은 보면 아버지 야곱의 능력이요, 기력의 시작이요,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본래 장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장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본래는 르우벤이 그러한 자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4절의 일이 있기 전에는 야곱에게 힘이요, 기력의 시작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력은 점점 쇠하여 가지만 자신의 일을 이어 받는 자이기 때문에 마치 새롭게 시작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보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때문에 장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여겨질 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4절의 이유 때문입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물의 끊음 같다는 것은 물이 끊을 때 그 표면이 요동치는 것처럼 르우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안정되지 못한 면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히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창세기 35장 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자신에게 친 어머니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한 것이기 때문에 근친상간에 해당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의하면 이 일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다고 할 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죄를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 장자권을 빼앗기게 되는데, 본래는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한 자요, 탁월할 수 있었지만, 이 일로 인하여 그 탁월함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주에 역대상 5장 1절과 2절을 언급한 바가 있는데, 거기 보면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데, 거기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육체의 순서로 하자면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할 때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런 논리로 하자면 도대체 유다에게 돌아가고 있는 이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유다의 경우는 다말과 동침한 사건이 창세기 38장에서 낱낱이 기록될 정도로 부끄러운 일임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간단히 말해 그도 역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주권자가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이 죄의 문제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라고 말한다면 유다에게서 주권자가 나올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게서 주권자가 나온다는 것은 결국 외적으로는 죄를 원인으로 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 즉 이 말은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실행되는 일인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때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돌아갔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렇게 뜻하시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셉의 남다름 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의 탁월함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실행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르우벤의 죄 때문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이 마치 무고한 자가 억울하게 당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기자에게 미치는 형벌이 유기자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즉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선택하신 반면 누구는 유기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으로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곱이 첫째 아들이 르우벤에게 이러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면 그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르우벤에게 주신 것은 죄에 대하여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나아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도록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이 말씀이 축복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느냐? 바로 이런 목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단지 책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망을 통하여 올바른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장자의 명분은 빼앗기는 형태로 있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받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무엇이 있느냐? 책망이 있습니다. 때로는 징계가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7절에 의하면 저주까지 선언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저주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저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형식을 통해 돌이키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있는 말씀처럼 교훈과 책망을 통하여 바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저주라는 말을 영원한 저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똑같은 단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저주는 일시적인 저주일 뿐입니다. 유기자들이 받는 영원한 저주가 아닙니다. 즉 일시적인 저주를 통해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저주조차 말씀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저주와 같은 형벌을 주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목적이 무엇인가? 돌이키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주조차 ‘아멘’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책망과 징계, 그리고 저주가 결코 무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데 있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혹 책망을 할지라도 달게 들어야 합니다. 징계를 할지라도 원망해서는 안 되고, 더욱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혹 저주와 같은 말씀을 할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영원한 복을 위한 것인 줄 알고 인내하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지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탁월함을 빼앗기는 그런 일들이 있겠지만,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징계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둘째와 셋째를 향해 말합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 부분 역시 르우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잘못을 들춰내시는데, 바로 세겜 성 학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34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들의 누이 디나가 강간을 당함으로 거기에 대한 복수심에 성을 진멸한 사건입니다.
우선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라고 할 때 단순히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라는 의미보다는 그들이 죄악을 저지르는데 있어서, 잔인하게 살육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으로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칼빈의 경우는 ‘칼’로 번역된 단어를 ‘거주지’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거주지 안에는 잔인함의 도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성품이 잔인하다는 것이고, 그런 잔인함이 서로 잘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인데, 이때도 ‘영광’이라는 단어에 대해 칼빈은 ‘혀’라는 의미의 단어로 봅니다. 즉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혀야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행한 일은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잔인한 행동이요,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혀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꼭 실제적인 피를 흘려야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욕하거나 무시하는 말 등도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야고보서에 의하면 이 혀에 대하여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서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약3:8). 심지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하면서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까지 말씀합니다(약3:6). 그만큼 이 혀를 잘 사용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이 혀는 더욱 죄악을 저지르기 쉬운데, 아마도 시므온과 레위 중 누군가 먼저 자신의 누이가 좋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 분을 내면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같이 한 결과 세겜 성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것인데, 그렇게 혀로 마음으로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 줄을 끊었음이로다”는 부분에서도 칼빈은 소의 발목 힘 줄을 끊었다고 번역하지 않고 벽을 무너뜨렸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고,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가? 결국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는 이 모습은 사실 가인의 자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 보면 라멕이 자신의 아내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자신에게 조금의 해를 가하면 그것의 몇 배로 갚아주어야 하는 것이 인간 본성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라멕은 유기자입니다.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 가문에 들어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는 어떤 사람입니까? 약속의 자녀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분노로 한 성을 멸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런 면에서는 유기자의 열매와 다를 바 없는 열매를 맺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7절을 보시면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원한 저주의 선포가 아니라 일시적인 저주의 선포입니다. 이 저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성품을 바꾸고자 하십니다. 심지어 지금 이 말을 열 두 아들이 함께 듣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쉽게 분을 내는 마음을 주의하고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심판관의 자세보다는 ‘고치려’하기 때문에 매를 ‘아끼는’ 것을 거부하는 의사의 자세를, 곧 병들어 있는 두 환자를 고칠 뿐 아니라 해독제를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병이 옮아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타인들이 잔인성을 경계하도록 하는 의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실 저들에게뿐 아니라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너무 쉽게 분을 내는 마음이 있고, 또한 악한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교훈 받아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책망의 소리를 높이신다면 우리는 책망을 달게 들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주를 선포하신다면 그 저주가 영원한 저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시기 원하십니다. 고치고 치료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수술까지 감행하시는 겁니다. 단지 약을 먹여 치료할 수 있는 정도가 지났기 때문에 때로는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그런 수술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마지막에 언급된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는 말씀은 실제로 성취가 되는데, 우선 시므온과 관련해서는 그들이 누구의 땅에서 살게 되느냐 하면 유다 지파의 땅에서 살게 됩니다. 여호수아 19장 1절에 보면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9절에도 보면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 그러니까 시므온 지파의 경우 자기들이 받은 땅에만 산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땅에까지 흩어져 살게 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역대상 4장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42절과 43절인데, “또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이시의 아들 블라댜와 느아랴와 르바야와 웃시엘을 두목으로 삼고 세일 산으로 가서 피신하여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고 있더라” 세일 산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돔 지역입니다. 그러나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세일 산에서 살게 되는 일이 있는데, 이런 내용들이 오늘 본문의 성취와 관련 있습니다.
나아가 레위 지파도 흩어져 살게 됩니다. 이들의 경우에는 한 지파가 아니라 다른 모든 지파에게로 흩어져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지파의 경우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뒤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 받게 되지만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살아야 할 거주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각 지파별로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것은 여호수아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주와도 같은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레위 지파가 맡은 직무는 제사와 하나님 지식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흩어 각 지파에게로 보내시는가? 하나님 지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칼빈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스라엘 온 땅의 어느 구석이든 유능한 교사가 부족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를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3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면에서 이 사실을 온 지파에게 알리기 위해서 레위 지파를 흩으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 받지만, 진정한 기업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이 레위 지파를 통해 확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흩으셨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흩으신 것은 죄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형벌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더란 것입니다.
광야 40년이 정확하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내게 됩니까? 그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불순종의 결과 형벌로서 광야 40년입니다. 그러나 그 형벌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시는데,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저들의 죄 때문이지만, 죄로 인한 형벌조차 하나님은 저들을 낮추시고 저들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분명하게 알리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의하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모든 형벌이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책망도 마찬가지고,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 책망이요, 형벌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외적으로는 형벌이요, 저주와 같습니다. 그러나 형벌과 저주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런 면에서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 형벌을 주시는가? 왜 저주를 선포하시는가? 그런 형벌을 통해, 그런 저주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형벌과 저주를 선포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런 방향이기 때문에 28절에 그들에게 축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책망과 징계, 그리고 저주까지라도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인 줄 알고 달게 듣고 우리 자신을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부분에 있어서는 회개하고, 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자신을 말씀에 비춰가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를 살피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구원도 변경될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변경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워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