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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0707설교 / 창세기12장5-9절 / 여호와의이름을부르더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7.08|조회수73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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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5-9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

 

하나님께서 갈대아인의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셔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실 때 단순히 육적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한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을 주겠다, 또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 역시 이 세상이 말하는 그런 복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은 철저히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람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할 때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그러니까 아브람을 비롯하여 선진들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의 모범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서의 이런 내용은 아브람의 인생 전반에 대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이 결코 육적인 것으로만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 땅에서의 삶을 외국인으로서, 그리고 나그네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부분은 5절 이하에서부터입니다. 우선 5절 말씀을 보시면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창세기 11장에 보면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올 때는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11:31) 물론 아무런 소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그 외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출발할 때보다는 훨씬 그 소유가, 또 얻은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하란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길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금 주어졌을 때 말씀을 따라 갔고, 오늘 본문 5절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한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됩나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땅이 아니라, 이미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 장소나 정해서 내 땅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는 것은 가나안에 오게 되었지만 정착할 곳이 없어서 그 땅을 지나 세겜 땅까지 갔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이고, 이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일이 실행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던 사람의 경우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심정으로 낯선 아브람을 주목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아브람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고, 반면에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할 때 저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에 왔지만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겁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다 뭐냐?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더욱 확인하게 해 주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 때, 또한 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모형일지라도 실제로 이루어져야 할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하신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전체적인 내용을 보시면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한 장소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옮겨가게 됩니다. 5절에서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고, 6절에서는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시면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고, 9절에서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사도행전 7 4절과 5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발 붙일만한 조금의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본성 그대로를 하나님에 표현하자면 너무 한 것 아닙니까!”라는 불평의 소리도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그러니까 가라고 명하신 땅, 그리고 그곳에서 낳게 될 자손이 심히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알리고 있는 겁니다. 아니 그 땅에서 심히 많아질 정도가 아니라, 이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까지 약속하고 계십니다. 비록 주어진 땅도 없고, 자식도 없지만 계속해서 동일한 약속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제단을 쌓을 수 있었던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예배했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배워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있지만 그 약속하신 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브람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가나안 땅에 가기만 하면 땅도 주실 것이고, 그곳에 정착해서 수없이 많은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약속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그곳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뭐냐? 곧바로 정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저들과의 갈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들고 가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아브람을 보십시오. 고향을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다시금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낯선 땅이요, 낯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과는 좀 다른 차원이지만 가나안 사람들 속에서 아브람은 진짜 외국인이요,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마치 홀로 남은 외톨이처럼 여겨질 수 있는 그런 모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와 나그네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아브람에게, 또한 자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심지어 자손을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아브람에게 이런 약속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도 더 분명한, 더 판명한 말씀을 더해 주심으로 아브람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음엔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12:1-2).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 주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런 약속의 말씀 앞에 아브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면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경배를 올려드렸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성취되지 않아서 믿을 수 없다가 아니라, 지금은 성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람의 믿음은 단순히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심어주고 계신 믿음은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약속하신바 하나님 자신, 다시 말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것,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의 내용이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이었는가? 히브리서의 표현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그러나 약속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혹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브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구약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남겨두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이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면 평안이 있고, 좀 쉽게 살 수 있는 그런 길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같은 처지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마치 낮선 곳에 와서 홀로인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평안보다는 불안함, 그리고 어려움 등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말하자면 말씀을 따라 산다고 할 때 성도의 인생길 가운데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원리와 세상의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진 믿음은 아브람처럼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소망을 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지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세상에 대한 소망이 전부인 것처럼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다른 것들은 내게 유익한 것조차 배설물로 여길 수 있다면, 저들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과 저들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 알고, 또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이 땅을 벗어나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당장 보이지는 않고 당장 주어지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속의 말씀을 붙든다고 할 때 붙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가 사라진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데 자녀가 갑자기 생기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현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환경이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내가 당장 믿음으로 주일을 좀 더 거룩하게 지키면 성적이 오르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주일에 나오라고 하지만 믿음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하면 회사에서 잘했다 칭찬해 주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치를 주고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믿는 자답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주변이 우리를 위하는 것으로만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3절 말씀처럼 복음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는 자도 있지만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축복보다는 저주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시대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상 결코 변경되거나 포기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아브람의 경우 이중적인 면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어려움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더욱 붙들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하신 것의 성취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그런 소망까지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가 소망해야 할 것은 철저히 전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유아에게 하듯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아와 같은 신앙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유아에게 하시듯 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소망을 두도록 하시는 말씀이 신약에는 없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렇게 물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경우 외적인 복도 있었지 않습니까? 이미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란에서 나올 때부터 더 많은 소유와 사람들을 이끌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약은 유아를 향해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외적인 복을 통해서 영적인 복을 알리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이시면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줄 알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외적인 복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외적인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셔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에 그 마음을 붙들어 매야 합니다. 이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을 붙들어 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비록 외적 현실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모든 현실을 극복하게 하며, 또한 그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참된 위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고 말씀하신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는 하고자 해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또 시작을 한다 해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포기는 얼마나 잘 하는지, 시작했다가도 포기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다가도 세상을 바라보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그런 우리가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취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주겠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 중 한 면에는 이런 교훈과 다소 먼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부분 이런 말씀만이 줄 수 있는 위로, 그리고 힘과 능력, 소망을 다른 것들과 대체하는 듯 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말이나 기도하자는 말이 마치 뻔한 대답이요, 식상한 것처럼 여기진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심리학, 긍정의 힘과 같은 내용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심리학이 아닌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성경의 정신과 상관없는 위로, 거저 사람의 마음만 헤아려주는 상담, 나 스스로 나를 위로 하는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그런 모습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고 있는 성도들조차 어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 말씀만으로 인내하고 극복하며 이겨내는 그런 일이 너무 낯선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아브람의 인생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면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보다는 현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교훈받아야 합니다. 낯선 땅이요, 낯선 사람들입니다. 단지 낯선 땅,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삶의 원리가 분명 다른 자로서의 삶입니다.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도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초점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자의 삶입니다. 때문에 결코 섞여 살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람의 경우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가 그 땅에는 없었습니다.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나안에서 홀로 싸우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영적인 싸움을 싸워나가야 했던 것이 아브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싸움을 싸우되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람과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사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사실이 아브람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기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비록 아직까지는 땅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땅을 물려받게 될 자식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아브람의 마음을 붙드셨기 때문에 그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내로서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여기에 성도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즉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고 할 때 그 일하심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을 주시되, 반드시 유익하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을 화합하게까지 하신다는 겁니다(4:2 참조).

 

계속되는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제단을 쌓고 난 다음에 제단을 쌓은 곳에 머물지 않고 장소적으로 볼 때 계속해서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그곳에서 단을 쌓아 감사의 제사를 드렸지만, 거기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다는 것이고, 거기서 또 다시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다시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9절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고 할 때 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런 반복되는 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왜 아브람은 계속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또 이동하면서는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단지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는 안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했다는 것은 단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한다고 해서 나그네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이 말하는 나그네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의 인생이 이 땅을 벗 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의 것을 모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75절은 하나님께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그네 인생임을 그런 방식으로 교훈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8절과 9절의 경우 바로 앞에 나오는 6절과 7절의 말씀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다시 보시면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그러니까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약속하신 바가 곧바로 성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성취할 것이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해 믿음으로, 또한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더란 것입니다. 즉 가는 곳마다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여 있고, 그래서 정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다른 곳에서 낯선 땅으로 오게 되더라도 그 삶의 방식만 맞으면 빨리 친근해 질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 성도인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종교가 같으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처럼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까지 오게 된 아브람의 삶의 방식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면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삶의 방식과 이미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아브람과 가나안 사람들의 차이 중 예배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분면 가나안 사람들 역시 그 마음에 종교성이 있고, 그 종교성을 따라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예배를 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비교를 해 보면 아브람과 가나안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직접적인 비교를 불가하기 때문에 엘리야 시대에 나타나는 내용을 통해 비교를 할 텐데, 열왕기상 18장을 보시면 이방 예배의 대표적인 내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열왕기상 18 25절부터 보시면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18:25-29) 여러분, 여기 보면 이방 예배의 대표적인 특징이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외적인 형식은 아주 화려하고, 또한 그 열심도 매우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 소리 질러 부르기도 하며, 또한 단 주위에서 뛰기도 하며, 심지어 그래도 응답이 없자 더 큰 소리 그리고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는 일까지 있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화려함, 그리고 열심도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830절 이하를 보면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30).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합니다(31). 그리고 철저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간구하게 됩니다(32). 그런데 그 간구의 내용을 보면 36절과 37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요약하면 철저히 주께서 말씀하신 그것에 의지하고 있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방 예배의 경우 외형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것이고,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명하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외형도 있고 내용도 있으며, 열심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일을 해 나가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배에 대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편에서 열심이 먼저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배 방식과 예배의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동했던 것은 바로 이런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신이 다른 것이고, 섬기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삶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인 반면,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 영광을 위해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자기가 유익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어 예배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만 예배하기를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삶의 목적도 다르며, 삶의 원리도 다르며, 삶의 최종적인 내용도 다른 자들인 것입니다.

물론 열왕기상에 나오는 이방 예배와 가나안에 살던 사람의 예배가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리상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종교가 대부분 같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람을 받을 수 있었는가? 없었던 겁니다. 아브람 역시 그들과 동화되어 살 수 없었던 겁니다. 아브람의 축복된 삶을 보면서 축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는 자들이었고, 이런 일 때문에 아브람은 계속해서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남방으로, 남방으로! 정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은 그렇게 옮겨가면서도 주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 위로의 말씀을 붙잡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의 내용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옮겨가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에 있어 소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역시 이런 아브람의 인생처럼 구별된 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구별된 자이기에 구별된 인생을 살아가셔야 하며, 그러한 삶은 결코 세상의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추구의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본향이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소망을 두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예배가 과연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인지도 돌아보셔야 됩니다. 거저 우리의 열심으로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의 말씀 가운데 드려지고 있는 예배인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인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이 과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도 돌아보셔야 합니다. 정말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서 여러분의 인생이 맞춰져 있는가?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먹고 마셔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가?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때문에 아브람처럼 옮겨 다니는 자가 드물다는 데 있습니다.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사는 자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의 인생 목적이 우리의 인생 목적이며, 저들의 삶의 자세가 우리의 삶의 자세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람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건성으로만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된다는 걸 배우셔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나아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만을 고집하는가? 말씀 때문에 세상의 손해를 손해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하며 사는가?

여러분, 세상은 우리를 반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가야 할 길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혹 영적 전쟁의 어려움 가운데 있고, 낙심할만한 일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말씀만으로 위로와 격려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적인 잣대는 우리로 하여금 좌절을 맛보도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를 따라간다면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내용을 풍성히 맛보도록 하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있지만, 마치 주의 말씀 앞에 곧바로 가나안에 간 것이 아니라 하란에 머물렀던 것처럼 그런 모습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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