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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90714설교 / 창세기12장10-20절 / 아브람의연약함과하나님의보호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07.15|조회수1,11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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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10-20

아브람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께서 갈대아인의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처음부터 가나안으로 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중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부르셨고, 결국 가나안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와 보니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란에서의 삶을 생각해 보면 가나안 역시 이미 거주하던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정착할 수 없는 그런 곳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란에서의 삶과는 달리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가나안에서는 정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가나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브람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마치 저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나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브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 역시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어 살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아브람의 경우 저들과는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9절 말씀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는 말은 그가 여러 차례 옮겨 다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차례 옮겨 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아브람과 그의 삶을, 그리고 그가 믿고 있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으로 오기까지, 그리고 가나안에 살면서 얼마나 그의 삶이 저들과 구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상을 섬기던 아브람을 불러 가나안으로 오게 하시고, 곧바로 정착한 것이 아니라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게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어 그가 부름 받은 자로서 우상을 섬기던 자들과는 분명 구별되게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아브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있고, 그래서 더욱 외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시험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어디로 옮기든지 하나님 한분만을 예배했던 것이 그의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또 다른 시험이 찾아오는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와서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입니다. 10절에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가나안 땅에 왔지만 가나안 사람들로 인하여 정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 기근까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기근도 일반적인 기근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기근이었습니다. 정착도 하지 않았는데, 떠돌아다니면서는 수없이 많은 자기 소유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애굽이었던 겁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또 다른 시험이 찾아오는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와서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입니다. 10절에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가나안 땅에 왔지만 가나안 사람들로 인하여 정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 기근까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기근도 일반적인 기근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기근이었습니다. 정착도 하지 않았는데, 떠돌아다니면서는 수없이 많은 자기 소유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애굽이었던 겁니다.

일단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약속하신 땅에서 인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물론 인내로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소유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애굽으로 가는 것 자체에 어떤 불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혹은 하나님께서 명하여 오게 된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 자체에 어떤 불신앙적 요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경우는 기근이 왔을 때 애굽으로 보내어 먹을 양식을 구하도록 했고, 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애굽의 고센 땅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삭 당시 크게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26:2). 또한 이사야서에서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31:1)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삭의 경우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는 그런 명령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혹 명령하실 수도 있습니다. 명령하시되 모세를 통해 기록하게 하셨을 때 그런 부분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명령이고, 그때 애굽으로 갔다면 불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아브람의 행보를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순종이라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경우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개인적인 입장은 애굽으로 내려간 것 자체에 대해 불신앙적 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에게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백한 말씀이 있는 것처럼 아브람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하란에서부터 가나안으로 와서 이동한 과정을 본다면 아브람의 경우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것이기에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명령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곱의 경우처럼 애굽으로 양식으로 구하러 가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원망 불평한 것을 기록하고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가나안에 왔지만 가나안 사람들이 반기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착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각한 기근까지 찾아왔습니다. 과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가? 혹 기근이 끝나면 풍년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극심한 기근 자체로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원망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속이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되, 애굽에서 완전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잠깐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말 번역에서 거류라는 말은 어떤 곳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 번역인 개역한글에 보면 우거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는데, 똑같은 뜻입니다. 손님으로서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나그네처럼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비록 기근으로 인해 더 이상 가나안에 머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부득이하게 다른 곳으로 가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땅이요, 그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땅이기 때문에 다시금 돌아와야 할 땅임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되, 완전히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잠시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가까이 왔을 때 한 가지 걱정하는 것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3절을 보시면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적지 않은 실수를 보게 되는데, 한 마디로 자기 생명을 보호하려고 거짓을 계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래의 경우 아브람의 이복 누이로서 그의 아내가 된 사람입니다. 창세기 2012절에 보면 아브람이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때문에 누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의 의도 속에는 거짓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의도가 아내임을 숨기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내라고 말하면 사래의 경우 너무도 아리따운 여인이기 때문에 남편을 죽이고 여인을 차지하고자 하겠지만, 누이라고 하면 오히려 그 여인을 얻기 위해 아브람을 대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그의 죽음을 생각해 볼 때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오히려 아내의 정조를 죄악 된 방법으로 배신하여 자기가 살고자 거짓된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아브람이 애굽 사람들에 대해 평가할 때 정당한 평가를 돌리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창세기 20장에 보면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 왕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 이때는 이름을 사라라고 불렀는데, 사라를 취하려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멈추게 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때 아비멜렉 왕이 이런 거짓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게 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의 답변이 이것입니다. 창세기 20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오늘 본문에도 보면 생명의 위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창세기 20장과 다르지 않는 생각을 그가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곳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느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취하고자 하는 자들이 아닐까 그 스스로 판단했던 겁니다. “남편이면 죽여 취하지만, 오라비라면 허락을 받아 취할 수 있으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4절 이하 16절을 보면 애굽 사람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후대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다시 말해 어느 정도는 아브람이 생각했던 것이 맞아 떨어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애굽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내라고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레짐작하여 그 스스로 지금 애굽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꼴인 겁니다.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보통 우리가 거짓 증거라 하면 단순히 남을 속이는 것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가 누이이지만 아내임을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춘 것, 그것 역시 거짓인 겁니다. 그러나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의 개요는 이웃의 선한 명예를 깎아 내리지 말고,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의 명예를 증거 해주고 증대해 주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남을 속이는 것만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이웃의 선한 명예를 깎아 내리는 것 역시 거짓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애굽 사람들에 대하여 지레 짐작한 것,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치 야만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의심이요, 근거 없는 비난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아브람은 거짓말을 하기 전부터 애굽에 대한 거짓된 생각을 그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남을 속이는 것으로서 거짓을 말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명예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음으로 이미 그 마음으로부터 거짓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아브람의 실수를 통하여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무엇보다 참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혹 의도에 있어서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짓 자체를 기뻐하실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시기 때문에 거짓을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말은 참이지만 의도에 있어 거짓이 있다면 그것 역시 거짓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말 자체는 참이지만 참된 말을 함으로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 거짓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하여 정당한 명예를 돌리지 않고 그 명예를 깎아 내리우거나 혹은 거짓된 말로 그 이름을 먹칠 할 경우, 그것 역시 거짓이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내용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거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험담하거나 하는 등은 어떤 의미에서 거짓을 증거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따라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참된 것을 말하되, 참된 것 이면에 숨은 거짓도 멀리 해야 하고, 나아가 그 말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세우는 그 일에 앞장서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의 불신앙적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을 두려워할 줄은 알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가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지 않는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죄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과인 셈입니다. 사실 그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오는 모든 여정을 생각해 봐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인생이었습니다. 아니 단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정도가 아니라,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갔습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애굽을 가면서 생각한 것처럼 실제 가나안 사람들이 그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들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갔던 것이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면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람은 전혀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보다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더 크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고민하여 해결해 보겠다는 심산으로 아내를 아내라 하지 말자고 거짓된 계획을 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가져야 할 내용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책임지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책임지시지만, 어떤 때는 무책임하게 내버려두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현상으로 볼 때 마치 내버려둔 것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상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왜 우리가 두려움 앞에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보다 때로는 현실의 문제를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기보다는 현실로 도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삶이어야 하는데, 현실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느껴지다 보니 결국 현실을 택하게 되는 죄를 범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신앙이란 어떤 면에서 믿음의 시험 앞에서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그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보니 더더욱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아브람이 나중에 이삭을 받치기 위해서 번제로 드리려고까지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가 있는가? 자기 목숨이 아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브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번제로 받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는가?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부활하게 하실 것을 믿었다고 증거 합니다. 지금은 죽음이 두려워 거짓을 말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되는데 바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시험하시고, 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현 시점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람만 그런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하다가도 우리의 목숨, 아니 우리가 조금만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참된 것보다는 거짓을 말하여 손해를 덜 보려고 하는 게 우리입니다. 누군가 갑자기 핵심을 찌르면 들키지 않기 위해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짓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선택하라면 세상이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생각할 틈도 없이 세상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가치가 크다고 느껴지면 더더욱 그러한 겁니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다고 생각한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가나안에 왔을 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자신의 구별됨을 드러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람을 받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옮겨 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이라는 곳으로 내려갔을 때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그에게 크게 다가 왔는 듯 합니다. 물론 그것 역시 그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에 기인하지만, 어쨌든 죽음이라는 문제가 놓였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온통 죄악된 것 밖에 없었습니다. 신앙보다는 현실,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인간의 꾀, 양심의 법을 지키기보다는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아브람의 행보를 볼 때 창세기 121절 이하 9절의 내용만 보면 괜찮은 신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고전10:12) 말씀 앞에 항상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람이 아내와 함께 애굽으로 갔을 때 실제 애굽 사람들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처음에는 애굽 사람들에게, 그리고 애굽의 대신들에게 퍼져 그 대신들이 왕에게 아부라도 할 요양으로 왕에게 고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본 왕은 아브람의 누이로 알고 그를 후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브람의 실수와 죄악 된 행동에고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래를 취하려 하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17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어떤 재앙인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임을 알게 되는데, 18절 이하 20절을 보시면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결국 이번 일로 아브람은 그 스스로 매우 부끄러워 할 만한 모습으로 쫓겨나듯 애굽을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에게 복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복을 나누는 자로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을 나눠줄 때 너를 축복하는 자가 있고, 너를 저주하는 자가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적어도 아브람의 삶이 이방인들에게는 귀감이 되어야 하는 삶, 덕이 될만한 그런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할 삶이어야 했습니다. 비록 아브람 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기록의 형태로서 없을 뿐 율법의 내용은 모세를 통해 주신 후나 주시기 전이나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볼 때 믿음의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시험 앞에서 연약함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방인에게 귀감이 되지 못했으며, 덕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저들과는 분명 구별된 자로서 서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분명 그렇지 않은 자와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저들보다는 좀 더 나은 도덕성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있는 것처럼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1:4). 그 일을 위하여 무엇보다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나아가 율법의 두 번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정신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로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의 정신이 열매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을 위해서만 살아갈 뿐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기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손해가 되려고 하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말씀도 내려놓을 때가 다반사인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기도 합니다. 즉 부정과 부패는 믿지 않는 사람들만의 열매가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서도 맺혀지는 열매로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저들과 구별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실수와 불신앙적인 모습에 대하여 바로 잡아 이끄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것 또한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단지 아브람에게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방인들 위에도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고 죄 지으려고 하는 애굽 왕을 막으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 다스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위하여 일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바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만을 사랑하시고, 그 백성의 선과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래를 보호하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깨뜨리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시기 위해 사래를 보호하셨던 겁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람은 그 자신의 실수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흠집을 내고 있는 모습으로 있지만, 그런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역시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 하나를 모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취하신다고 해서 불신앙의 태도를 너무 쉽게만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니까 좀 연약해도 괜찮은 것처럼, 좀 실수해도 괜찮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 앞에 교훈을 받고 더욱 주님을 의뢰할 수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돌아가는 현상이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 73편의 내용처럼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불의가 횡횡하고, 의인보다 악인이 잘 되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까지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할 때 모든 초점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 바로 그들에게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일하시지만, 특별히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불의가 그렇게도 많은지, 왜 의인보다 악인이 잘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결국 악인이 아니라 의인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에게 있었던 소위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일이 가깝게는 악인들의 횡포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누가 있었는가? 사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럼 사단의 역사만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한 사건에 하나님도 계시고, 사단도 있고, 악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동일한 일이기 때문에 악인의 악함, 사단의 사악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죄악도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저들처럼 악한 목적, 악한 방식이 아니라 선한 목적과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 마지막 쯤 어떤 고백이 욥을 통해 나오게 됩니까? 이전에는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뵈옵는다는 고백까지 하게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사건 속에서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위 불행하다고 할 만한 일도 뜻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실수합니다. 우리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처럼 연약함을 보이기도하고,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올바르게 서 있으면 좋겠지만 자주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만 우리의 실수, 실패, 우리고 연약함과 죄악 된 모습을 때로는 드러나게도 하셔서 우리를 부끄러움으로 내모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부끄러워서 더 이상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가 아니라, 우리를 교정시키셔서 주의 뜻에 합당하게 세우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때로는 징계도 하시는데, 징계의 목적이 무엇이냐?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단지 시험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배워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있다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씀을 통해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역사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시되, 우리의 연약함, 실수, 죄악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과는 구별된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르심의 목적이 헛되지 않도록 친히 역사하시고 또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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