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49장 13-21절
야곱의 아들들을 향한 축복 ③
지금 우리는 야곱이 자신의 열 두 아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살피고 있는데, 창세기 49장 1절의 말씀에서처럼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 말은 단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있게 될 일을 그의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것이 곧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모든 내용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미 우리가 살핀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내용은 외적으로 보자면 분명 책망이요, 징계요, 저주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책망을 통해서라도, 징계를 통해서라도, 저주하시는 말씀을 통해서라도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세 사람에게만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지파들, 그리고 다른 지파까지 이 말씀이 들려지도록 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구약 백성과 더불어 신약 백성에게까지 들려지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죄를 저질렀지만 넷째인 유다를 통해서는 책망과 징계와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책망과 징계와 저주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밝히시는데, 그것이 유다를 통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원수를 완전치 물리치실 것이고, 그 전리품을 왕과 그의 백성이 취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내용은 스불론(13)과 잇사갈(14-15), 단(16-18), 갓,(19) 아셀(20), 납달리(21)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태어난 순서로 하자면 유다 다음이 단이고, 그 다음이 납달리입니다. 이들은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 낳게 되는데, 창세기 49장의 내용은 그런 출생의 순서를 따라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불론과 잇사갈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앞서 언급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와 같이 레아를 통해 태어난 자들입니다. 때문에 본처를 통해 태어난 아들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레아 다음으로 라헬의 두 아들이 나와야 하지만 그들은 맨 마지막에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야곱이 성령의 감동으로 저들에게 알리고 있는 내용 자체인데,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태어난 순서로 하자면 열 번째로 태어난 스불론에게 다음의 말씀을 주십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뒤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게 되는데, 스불론 지파의 경우 요단강을 중심으로 북서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불론 지파가 해변에 거주하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해변에 맞닿아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셀 지파가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하나님의 속성상 성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혹 성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가지는 한계일 뿐이지 하나님 편에 어떤 실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본문과 관련하여 스불론이 해변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명기 33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습니다.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주석가들은 이것이 왕성한 해상 무역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오늘 본문이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해변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자손은 바닷가의 땅을 기업으로 가졌고, 상인이 되며 선원이 되고 무역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매튜 헨리). 그리고 그 경계를 시돈까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시돈은 이스라엘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 위쪽에 두로가 있고 그 위쪽에 시돈이 있는데, 그 지역까지 뻗어나간다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은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 잇사갈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잇사갈의 경우 스불론 지파와 맞닿아 있는데 위치는 스불론 지파 아래이며 요단강과 인접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 혹은 바다에서 볼 때 아래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야곱은 잇사갈을 향하여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이고, 노동을 거뜬히 견뎌낼 수 있는 체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길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신명기 33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스불론의 경우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고 하시는데, 잇사갈을 향해서는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한쪽은 왕성한 해상 무역 활동을 하는 자인 반면, 한쪽은 어디에 나가는 것보다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면서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는 자로 있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스불론이 왕성한 무역 활동을 한다면, 잇사갈은 내륙 활동을 통해 유익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는데, 건장한 나귀처럼 힘을 세지만 등에 지워진 안장과 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나귀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노예와 같은 그런 모습으로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명기 33장 18절에서 스불론과 잇사갈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때 이어지는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여기서 ‘그들’이란 스불론과 잇사갈입니다.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제사를 드릴 때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바다의 풍부한 것은 스불론이 왕성한 해상 무역을 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이방인이 가지고 온 예물과 관련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예물을 들고 거룩한 산에 이르러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것과 관련 있는데, 한 마디로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실제로 솔로몬 시대 때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값진 예물을 가지고 오는 일들이 있었는데, 신명기 33장 19절은 그런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잇사갈의 경우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장막 안에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19절 말씀과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19절은 ‘그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이라는 말은 단지 이방인만을 의미하는가 할 때 이어지는 바다의 풍부한 것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지만 스불론만이 아니라 잇시갈의 내용을 생각하면 좀 더 넓게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스불론이 이방인들을 불러 모은다면 잇사갈의 경우는 장막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웃으로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다의 풍부한 것이 이방인의 예물이라면,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는 유대인의 예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백성을 불러 여호와의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튜 헨리 주석에서는 이방인과 관련된 스불론의 내용이 마태복음 4장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주석하기도 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4-16) 즉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관련된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러면서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둘이 하나가 되는 그런 내용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 49장 자체를 통해 이런 내용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통해 들려주는 계시의 내용이 모든 것을 다 밝히고 있지 않다고 해서 본래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다른 내용이거나 변경되는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이 있는데, 그 뜻 가운데 일부만 계시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할 때 그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어디까지를 말씀하고자 하시는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세기 49장은 구약 역사 속에서 스불론이 차지하게 될 땅과 잇사갈의 성품처럼 보이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지만, 좀 더 드러내고자 하시는 바는 신명기 33장에서 모세를 통해 축복하고 있는 내용까지임을 함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깝게는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단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단은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라헬의 여종인 빌하를 통해 낳은 자인데, 오늘 본문 16절에서 18절까지가 그에 대한 내용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단 지파가 차지하게 될 몫이 결코 하찮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석가들 가운데서는 이 내용을 삼손과 연관시킵니다. 왜냐하면 사사라는 말 자체가 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단 지파에서 삼손이 그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하면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것처럼 그의 마지막이 다소 안타까운 모습으로 기록됩니다. 들릴라라는 여자에게 빠져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을 잃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까지 잃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새롭게 힘을 주심으로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몰려 온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다시 말해 살아 있을 때 죽인 수보다 신전을 허물어서 죽이게 된 수가 훨씬 많다고 기록될 정도로 놀라운 일을 행하지만, 뭔가 아쉽고 안타까운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은 그런 삼손의 이름을 언급합니다(히11:32).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히11:33) 점과 흠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점과 흠은 있지만, 그의 어리석음도 분명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를 사사로 세우셨고, 사사로서 결국 블레셋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했다는 내용으로 소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단에 대하여 예언할 때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한다는 것은 이런 삼손에 대한 예언이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17절에서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 표현한 것은 계속되는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든 것인데, 뱀과 독사라는 말 때문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뱀 같이 지혜롭다는 그런 의미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과 연관해서 신명기 33장에서는 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신33:22) 그만큼 용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사기의 핵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에도 나오고, 사사기 맨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도 다시금 언급되는데,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즉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해 행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왕이 세워지기까지 누가 그 일을 담당했느냐 하면 사사가 담당했던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심판하시기 위해 사사들을 세우셨던 겁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사사 가운데 삼손이 있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 이후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시는데, 첫 번째 왕은 세상의 왕을 반영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을 세우셨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윗 왕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시는 영원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점과 흠이 있지만,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사로서 재판하고 심판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일 뿐입니다. 그가 사사로 있었던 시간은 2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린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측면에서 18절의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즉 단에게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지만, 그래서 그를 통해 원수를 물리치는 일이 있겠지만, 그는 진정한 구원자를 보여주는 자일 뿐 진정한 구원자는 아니란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은 갓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갓은 야곱의 일곱 번째 아들입니다. 레아의 여종인 실바를 통해 낳은 아들인데, 그에게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군대의 추격을 받는다는 것은 전쟁이 있다는 것이고, 전쟁을 통해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원수들로 인하여 압박을 받을 것이고, 그런 압박 속에서 도망하는 듯 보이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추격을 받는 자가 도리어 추격하게 되는,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우선 하나님께서 왜 저들이 처음에는 추격을 받게 하시는가에 대해 자신의 힘만 믿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갓 지파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니라 모든 지파가 가나안 전쟁 속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내용입니다.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지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알려주는 내용이 여리고 성 싸움입니다. 여리고 성의 경우 큰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 이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아이 성의 경우 작은 성에 불과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큰 성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작은 성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큰 성에서 승리했지만 작은 성에서 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교만하면 안 됩니다. 큰 성이든, 작은 성이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쫓기는 듯 하지만 반드시 승리를 주시기 때문에 이런 예언을 통래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교훈하십니다. 한동안은 고난 가운데 있겠지만 이런 말씀이 오히려 고난을 이겨낼 준비를 하도록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인내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교훈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소망을 가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18절에 이어 나온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18절은 분명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이 성취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9절을 그 연장선상에서 본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한동안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쫓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싸움을 싸우기는 하는데 패배하여 쫓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난 사건입니다. 죽음 자체만 보면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외형이지만, 부활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음을 이겨냈다는 것이 분명한 승리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셨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승리를 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살아감에 있어서 승리보다는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패배할 수 없습니다. 간혹 패잔병으로 있는 원수들이 우리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은 모든 전리품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는 패잔병들의 마지막 발악을 계속하겠지만, 결코 그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다만 갓에게 말씀하신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승리를 취할 수 없기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승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신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승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20절을 보시면 아셀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아셀은 레아의 여종 실바를 통해 낳은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말씀을 주시는데,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간단히 말하면 훌륭한 곡식을 풍성하게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외부의 식량 공급 없어도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이며, 왕의 수라상을 차릴 정도로 그 품질이 좋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24절에 의하면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으로 모세가 축복하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서는 이런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아들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단순히 물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만 풍성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가 많아지기를 축복하고 있고 나아가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오히려 아셀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평안함과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앞선 내용과의 연관성에서 보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되면 결국 평안함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아가 낳은 야곱의 여섯 번째 아들인 납달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21절을 보시면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납달리를 무엇에 비유하느냐 하면 놓인, 풀어놓은 암사슴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납달리의 경우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상냥한 말씨로 스스로를 지키고 방어하는 자들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불론과 관련된 내용을 살피면서 그들이 해변에 거주한다는 것과 특별히 신명기 33장에서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18), 그리고 그들이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도록 한다는 것(19) 등을 통해 마태복음 4장에 있는 부분까지 내다보는 것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다시 마태복음 4장으로 가면 스불론만이 아니라 납달리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4절부터 16절을 보았는데, 12절부터 보시면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2-16) 그러니까 스불론 지역만이 아니라 납달리 지역까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납달리 지역의 위치는 스불론 지역과 맞닿아 있으면서 바로 위쪽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를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는 것은 가깝게는 저들의 상냥한 말씨로도 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시는 복음의 소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여섯 형제의 내용은 가깝게는 저들이 차지하게 될 땅, 저들이 무엇을 하게 될지, 또 어떤 성품을 가지게 될지 이런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어디까지 내다보도록 하시느냐? 창세기 49장 자체를 통해서는 다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유다를 통해 말씀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몸 된 교회까지 내다보도록 하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숨겨진 채로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까지 말씀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 그들의 구원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까지 계시의 완성으로 주신 이 말씀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저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 자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예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의 말씀을 단 하나라도 성취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다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숨긴 채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몰래 변경하거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성취 안 해도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면 말씀하신바 그대로를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예언하셨고, 그 예언하신 바를 성취하셨다면 몸 된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붙들어야 할 말씀은 그가 주신 이 약속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것들을 보면서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말씀 속에서 적용하자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든 주의 백성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이르러 의로운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고, 공적으로만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려야 합니다. 바다의 풍부한 것으로,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로 예물을 드리는 것처럼 성령의 거룩한 열매로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것으로만 드리며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