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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0307설교 / 창세기49장22-28절 / 야곱의아들들을향한축복④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03.07|조회수91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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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장 22-28절

야곱의 아들들을 향한 축복 ④

 

지난 시간에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로부터 열 번째 아들까지의 내용을 살폈는데, 기록의 순서는 순차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자신이 아들들을 축복하기를 기뻐하셨는데, 가깝게는 가나안 땅과 관련된 것이거나 혹은 저들이 무엇을 하게 될지, 또 어떤 성품으로 나타나게 될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디까지 나타내기를 뜻하셨는가 할 때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까지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창세기 49장을 통해 그 모든 것을 드러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시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에게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부분은 야곱의 마지막 두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야곱이 가장 사랑한 라헬에게서 난 자들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과 열두 번째 아들입니다. 요셉과 관련된 내용은 다른 아들들에 비해 좀 깁니다. 거의 유다에게 말씀하신 분량과 비슷합니다. 22절부터 26절까지가 그 내용인데, 우선 2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가지가 무성한데, 그 가지의 나무가 어디에 심겨져 있느냐? 샘 곁입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무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샘 곁에 있는 나무가 물과 영양분을 잘 흡수해서 잘 자라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와 같아서 많을 열매는 맺는 그런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자녀들과 관련된 것인데,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씩 해서 두 몫을 차지하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 17장에 보면 이 내용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 있는데, 14절 이하 18입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처음에는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주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속한 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한 제비, 한 분깃으로는 좁다고 말하자 개척해서 소유를 늘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요단 동편에 미리 몫을 가진 므낫세 반 지파는 제외 되는데, 그만큼 요셉의 두 아들을 통해 낳을 자들이 많게 될 것이요 그들이 차지하게 될 땅 또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이 23절인데,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장차 있게 될 미래의 내용보다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즉 요셉이 여러 환난을 당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했다고 할 때 요셉에게 환난을 준 자들을 의미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요셉을 학대한 자들이요 적개심을 가지고 해하려고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저들의 적개심과 학대가 있다고 해서 요셉을 완전히 꺾은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실제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워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살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어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후 종살이를 하다가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 하고자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옥살이 가운데서도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즉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옥중 죄수를 다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확인했던 것처럼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는데, 처음 종으로 팔리기 전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번의 꿈을 통해 보여주신 대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을 꺾기 위한 온갖 어려움과 환난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꺾이지 않도록 힘을 주셨는데, 오른 본문 24절과 25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사람들은 요셉의 탁월함을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해서도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지만 요셉의 활이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한 마디로 그가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시고 반석이신, 그리고 목자 되신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손이 요셉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적개심을 가지고 활을 쏘면서 학대하는 저들에 대하여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만 열 명의 형들이 요셉을 판 사건에 대하여 야곱이 알았는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내용을 말할 수가 있는가? 사실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하는 내용들은 과거의 일도 있고 미래의 일도 있습니다. 과거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와 관련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모든 일까지 다 알고서 예언하고 있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요셉에게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분명 과거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는 것을 알고서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애곱 입장에서는 요셉이 여러 가지 환난을 겪고 난 뒤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다는 차원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자신의 아들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이 그의 후손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할 때 지금 요셉에게 주시는 말씀이 요셉의 과거에만 적용되는 말씀인가? 미래의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가? 일차적으로는 요셉의 과거의 일도 담고 있지만 미래의 일과 전혀 상관없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요셉 지파와 관련해 요셉과 같은 환난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기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런 내용은 특별히 그리스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모형이라는 말은 실물을 반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물의 모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모형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즉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특별히 인물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대상은 분명 원죄를 가지고 있고 자범죄 또한 짓고 있는 자들입니다. 간혹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때 성경이 그의 죄를 밝히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는 점과 흠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 역시 수없이 많은 환난을 당하지만, 다시 말해 본문을 통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는 일이 있지만, 그것에 의해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그러하다면 몸 된 교회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수없이 많은 환난 가운데 있고 또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난 속에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수없이 많은 환난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또 넘어지는 일도 있을 수 있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는데, 왜 그런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 반석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20편 6절과 7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편 146편 3절에서 5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가 이런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에 어떤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것입니다.

 

한 가지 24절의 번역과 관련해 비교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에서는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쓰던 개역한글에서는 “...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단 요셉이 환난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분명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한 가지는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를 전능자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개역개정은 그런 의미로 번역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를 요셉과 동격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난다고 할 때 그리스도가 그런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요셉 가문에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다 가문을 통해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 10절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목자가 요셉이라고 할 때 앞서도 말했지만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23절과 24절은 요셉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환난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데, 환난의 시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야곱 가문을 위해 요셉을 세운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우실 것이라는 그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는 영적 이스라엘의 반석이시요 목자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은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시편 23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만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고 해서 힘든 일이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양떼인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환난 가운데 있는 야곱 가문을 보호하시기 위해 요셉을 세우신 것처럼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우실 것인데, 그가 나의 목자인 이상 내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이것이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떼의 고백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5절에 보시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 요셉의 활이 오히려 굳세며 그의 팔에 힘이 있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했다면,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요셉을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도움의 근원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야곱은 하나님을 언급할 때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아버지, 야곱 자신을 일컫습니다. 24절에서도 ‘야곱의 전능자’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네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야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에는 야곱의 공로, 요셉의 공로라고 말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복의 내용이 있는가?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 그리고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 그 내용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에서는 하늘의 복에 대하여 햇빛과 비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지하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런 복을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생명과 연관된 복을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은 자손에 대한 것으로, 요셉 가문의 번성과 관련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복으로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놓치고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외적인 것 그리고 세상적인 것이 복이 아니라 화(祸)요 재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복을 말씀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복을 제외시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움의 근원이 누구냐, 복의 근원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움의 근원이 아니시냐?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아니시냐? 그런 차원에서 이런 복을 빈다고 할 때 하나님이라는 분을 기억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26절에서는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우선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복의 내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복의 내용은 사실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 그리고 이삭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 또한 야곱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과 이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의 본질과 내용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복을 외적인 것으로 담아 말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사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야곱이 자신의 축복이 선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는 자신이 자신의 조상들에게 축복받은 바 이상으로 더욱 더 효과적으로 요셉을 축복했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 축도의 효과가 멀지 않다는 점을,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마치 말씀으로만 먹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약속들의 결과를, 자주 연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족장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번창했던가? 해안의 모래와 하늘의 별에 비길만한 무수한 자손이 어디에 따로 있었던가? 그러므로 야곱이 그 동안 숨겨 있었던 그의 축도의 결과가 마치 깊은 바다에서 떠오르듯 나타날 충분한 시기가 도착했다는 점을 공언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약속하신 바의 실제적인 성취가 가깝다는 측면에서 낫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과 신약에 대하여 판명성의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는데, 구약에 비해 신약은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바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부분들이 희미한 것처럼 있습니다. 알려주시기는 하시는데 실체처럼 뚜렷하게 알려주시는 것처럼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모든 것이 뚜렷하게 밝혀집니다. 지금 야곱이 자신의 선조들과 비교해서 낫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판명성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요셉을 향한 축복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할 때 이 요셉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그 형제 중 뛰어난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뛰어나다는 단어는 ‘ryzIn:’[나지르]라고 해서 나실인, 즉 구별하다는 그런 의미의 단어입니다. 실제로 신명기 33장 16절에 보면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라는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단어 자체는 같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언제 구별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언제 뛰어난 자가 되었습니까? 그가 국무총리에 올랐을 때입니까? 제네바 바이블이나 매튜 헨리 주석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렸을 때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형들에 의해 팔린 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요셉을 형들로부터 구별시키셨습니다. 뛰어난 자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요셉을 구별시키시고 뛰어난 자로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별시키십니다. 단련하십니다. 그래서 뛰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고난은 방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더욱 구별시키시고 뛰어나게 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요셉을 향한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의 자손이 번성하게 될 것이고, 그를 야곱 가문을 위한 목자처럼 있게 하시는데, 바로 그런 내용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알린다는 것입니다.

 

요셉에 이어 마지막으로 베냐민을 향해 말씀하시는데, 27절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여기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인 내용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배경이 사사기 19장과 20장입니다. 사사기 19장은 레위인과 자신의 첩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 첩 또한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행음하는 그런 자이기 때문에 당시 도덕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고 자신의 본가로 도망갔다가 레위인의 설득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강간을 당하여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지파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자신의 첩이 강간당하여 죽자 격분한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열 두 토막으로 잘라 각 지파에게 보내게 되고, 그 일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가 전쟁하게 됩니다.

물론 정확하게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때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나마 위로를 주던 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처럼 그도 역시 야곱이 가장 사랑한 라헬을 통해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선 내용에서 야곱이 얼마나 베냐민을 아끼고 사랑했는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야 되는 과정 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부정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 28절에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미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내용 속에서 그들을 향하여 부정적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조차 축복을 위한 것으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시는 바는 부정적입니다. 어떤 면에서 저주의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통해서라도 복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실제로 신명기 33장으로 가시면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내용 속에서는 정반대처럼 말씀하시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12 말씀입니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즉 창세기 39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결국 어디로 가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냐? 신명기 33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저주하시는 모든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책망 받을 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되고 거기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의 모습은 마치 멸망하기 직전 소돔의 모습과 너무나도 방불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이런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어디로 이끌고자 하시는가? 모세가 베냐민 지파를 축복한 신명기 33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자신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하게 되는데, 28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그런데 여기서 ‘각 사람의 분량대로’라는 말 때문에 마치 이 사람은 이렇게 축복 받을만하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축복 받을만하니까 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사람에게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마태복음 25장에 있는데, 달란트 비유에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25: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을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또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둘 달란트를 받을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는 재능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릴 때 모든 사람에게는 비록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할 때 이런 축복을 받을만해서 받는 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누가 자신의 분량으로 따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 한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량대로 따지자면 다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열 명의 형을 보십시오. 그들은 동생인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축복 받을만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들춰내시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회개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분량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심지어 유다는 어떻습니까? 몰랐다고는 하지만 며느리와 동침하여 아이까지 낳게 됩니다. 이런 모습인데 어떻게 축복 받을만한 분량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유다를 향해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분량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표현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주시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사람을 향해서 다를 수 있고, 저 사람을 향해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뜻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 뜻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예언의 성격으로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도, 그들의 아들들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과 같이 감추어진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고 무엇보다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있기 때문에 말씀의 빛을 따라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첫째 아들부터 셋째 아들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베냐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왜 하나님께서 부정적인 듯 한 말씀을 하시는가? 주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복이기 때문에 복 받을만한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말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든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여 부르셨다면 구별된 자로서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구원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나태하게, 혹은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주해서라도 돌려놓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안다면 결코 나태함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시는 바를 알고 그것을 위하여 좀 더 전심전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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