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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170219설교 / 오바댜1장10-16절 / 에돔에대한하나님의심판3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7.02.19|조회수15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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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110-16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3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처럼 에돔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부러워할만한 것들이 굉장히 많은 나라입니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지은 성 또한 견고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약탈함으로 축적해 둔 부가 있었고, 위기 가운데서도 언제든지 도와줄 것이라 확신했던 동맹국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들 안에 지각 있는 자도 있었으며, 용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그들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3절 말씀에 있는 것처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이런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마음의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엄중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교만의 근거라 할 수 있는 것들,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모든 것을 다 멸하시며 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네가 믿는 동맹국이 오히려 너희를 배반한 것이며, 그들이 침략하여 네 숨겨둔 보물을 가져갈 것이며, 지각 있는 자 그리고 용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돔의 경우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땅에 끌어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본문은 그들의 교만 외에도 한 가지 죄에 대하여 더 말씀하시는데,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형제 나라라 할 수 있는 야곱에 대한 저들의 자세 때문에 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10절을 보시면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그러니까 에돔은 형제 나라인 야곱에 대하여 포학함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형제라는 말을 주목해 볼 수 있는데, 이 말에서 우리는 에돔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도덕법을 주셨을 때 다섯 번째 계명인 부모에 대한 공경은 육신의 부모에 대해서만 공경하도록 하는 의미가 아니라, 형제 우애에 대해서도 분명 말씀하시는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이 잘 해석해 주고 있는 것처럼 단지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다시 말해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동료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무란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만 공경하도록 하는 의미가 아니라 형제와 그 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무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부모에 대한 공경과 형제에 대한 우애는 다른 모든 관계들보다 우선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말씀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이웃 사랑의 실천은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가족으로 묶어주셨다면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무로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은 어떻게까지 가르치느냐?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형제에 대하여 포학을 행했다는 것은 더욱 더 잔인한 행동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혹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도덕법으로서의 10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양심으로 법으로서 도덕법을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사실에 대하여 무지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형제에 대하여 포학을 행하는 것은 모든 사회 속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인간적인 행동이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형제에 대하여 가장 잔인한 행동을 했던 것이 최초의 사람 아담의 자녀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최초의 살인이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난 자식들이요, 그들은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제지간에 살인이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아담의 범죄 이후 곧바로 그 사건을 기록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4장에 있는 가인과 아벨 사건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정성이나 공로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살핀 바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렸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 인간은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일이 얼마나 분하였던지 가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안색까지 변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비록 당시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에 세긴 도덕법이 있었고, 그런 도덕법은 부모에 대한 공경뿐 아니라 형제가 우애해야 할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은 이미 그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분을 참지 못하되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쏟아내는,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뭔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가장 가까운 형제에 대하여 그 죄성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으로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알고 있어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능력한 존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딤후3:1-2). 자기를 사랑하되 어떤 모습으로까지 자기를 사랑하는가? 부모를 거역하면서까지 사랑합니다. 부모도 거역하는데 형제라고 해서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가족 우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가 있는 이상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7:9-10)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악한 자라 할지라도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자기 사랑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돔을 보십시오. 분명 야곱과는 형제 나라입니다. 형제 나라이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포학을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로 오시면 형제 나라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포학을 행하였는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여기 보면 네가 멀리 섰던 날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때가 언제냐?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를 뽑던 날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멀리 서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칠 것에 대하여 의논하였을 때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멀리 섰다는 것은 야곱과 에돔 족속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에돔의 마음에 야곱이 그렇게 멀리 느껴지는 그런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나라이지만 형제와 같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을 치려는 자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형제 나라라는 인식보다는 원수와도 같다는 인식이 그들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그들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만한 마음은 교만하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뭔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리적 위치나 부요함, 동맹국, 그 나라 안에 있는 지각 있는 자나 용맹한 자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힘, 내 지혜, 내 처세술 등!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란 하나님이 아닌 자기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도덕법은 어디로 향하게 하는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율법의 요약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 번째 돌판의 요약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것, 하나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 이것이 교만인 겁니다.

첫 번째 돌판이 깨지니 두 번째 돌판 부분은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외적으로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또 실제로 사랑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 중에 보면 부모에게 잘 하고 형제지간에 우애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그런 방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통해 잘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불신자의 선은 하나님 앞에서 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히려 죄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7항 참조) 그들의 사랑도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사랑으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그들의 행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며, 말씀을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진 것도 아니며, 바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신자들의 경우 내용상 그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것들일 수 있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사용되는 그런 행위들로 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고백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죄가 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들 역시 저들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에 죄라고만 무조건 말할 것이 아니라, 분명 하나님 앞에서는 죄이지만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그런 행위를 통해서 마음에 심겨진 도덕법의 내용을 드러내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무시할 것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에돔이 형제 나라인 야곱에 대하여 원수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마음이 야곱에 대하여 형제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을 때, 그것도 양심의 법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그것을 주셨을 때, 이웃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원수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족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족속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이 그 마음에 없기 때문에 형제 나라라 할지라도 형제가 아니라 원수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형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이웃의 범주로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와 이웃,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은 최후 심판 때 마치 무엇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느냐? 열매로서 심판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첫 번째 돌판이 아니라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25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6)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말씀을 보면 이것이 두 번째 돌판 부분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37-40) 이것이 오른편에 있는 양에 대한 말씀이라면, 이후 왼편에 있는 염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것,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는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했을 때 성경은 여기까지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요한일서 4 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9에서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결국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 또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 사랑의 실천, 이웃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참되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역으로 이웃을 참되게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음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돔과 우리의 다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돔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교만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렇게 묻고자 할 수도 있지만, 유기의 원인과 정죄의 원인을 분명 구분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은 그들 자신의 죄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가졌고, 형제에 대해서는 원수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는가? 정죄를 당하지 않는가? 물론 성경의 한편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바가 있기도 합니다. 방금 살핀 마태복음 25장이 그것입니다.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실을 어디까지 끌고 올라가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너희에게 부음 바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너희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겸손이라고 할 때 여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했는데 겸손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안 한 것처럼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한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자리가 참된 겸손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은 결코 공로라는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천국 백성,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 백성, 이것을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이웃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특히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저들에게 심판이 있다는 것만 봐서는 안 되고, “왜 그들이 심판을 받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로 있어야 하는가?” 이런 부분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12절 이하 14절을 보시면 에돔의 포학이 실제적으로 어떠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데, 마치 권면하듯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면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여기 보면 형제의 날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재앙의 날, ‘패망하는 날, ‘고난의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 족속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재앙이요, 패망이요, 고난의 날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을 때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심판을 받되 구약 역시를 통해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들 입장에서 원수와도 같은 자, 그들을 통해 심판을 받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앗수르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고, 바벨론을 통해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사야 105절에 보면 앗수르 사람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그럼 에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들어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앗수르를 들어 사용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를 사용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이, 오히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는 자들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012절이 잘 말해주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들까지 사용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동일한 마음으로 사용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과 목적에 있어 선한 마음 그리고 공의로서 행하시지만, 도구인 저들은 악한 마음과 악한 목적으로 그 일을 행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에돔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막대기였다면 그들은 이런 면에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닌 이상 그들의 모든 마음과 목적은 악한 방향으로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과 관련해서는 앗수르와 관련된 말씀은 없고, 오히려 오늘 본문을 통해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이방 민족들의 침략을 받기는 하지만, 형제 나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데, 에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형제 나라를 도와야 했지만 돕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네 형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에 대하여 보고도 보지 못한 채 하지 않았느냐? 유다가 환난을 당할 때 너는 그것을 보고도 방관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방관한 정도로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기뻐하였다, 크게 입을 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이고, 조롱 섞인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때 심판을 당하는 그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하여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의 내용을 준행하는 것, 특별히 형제 나라에 대하여 어려움이 있다면 도와줄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유대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방인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이웃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누가 네 이웃이냐고 물었을 때 자비를 베푼 자, 다시 말해 유대인 입장에서 상종할 수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한 것처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 모두가 이웃의 범주 안에 있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아니 성경 전체 내용으로 보자면 원수조차 이웃에 속하는 자입니다. 이웃이 있고 원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들도 이웃에 속하는 자들이란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에돔은 분명 형제 나라이지만 그런 마음과 멀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도와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하지 않았던 것, 그저 방관하였던 것,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조롱하였던 것, 그것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13절도 보시면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여기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에돔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이방인들과 한패가 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그들과 함께 성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고난을 마음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에 대하여 손을 대었다고 지적하십니다.

14절에서는 어떤 것까지 말씀하시는가?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도망하는 자들을 네거리에 서서 막아 남은 자들을 원수에게 넘겨주는 일에 앞장섰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에돔은 단지 방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고 침략하여 재물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 칼을 들어 살해하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도망하는 자들까지 모든 탈출로를 막아 넘겨주는 잔인한 행동까지 일삼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은 에돔을 진멸하시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차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야수인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돔을 진멸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존재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까지 나타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교회 역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그 일에 올바른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소금인데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은 빛인데 등경 아래 빛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있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대야 되는데 대부분이 오른 뺨을 치면 같이 오른 뺨 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주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자들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은 말뿐, 자기를 위한 삶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에돔의 심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도 심판하신다면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판하셨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되 끊임없이 참된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참고 또 참으시면서 말씀하시지만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심판하신다고 해서 버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면 결코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목적이 무엇인가?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매 없는 백성이 아니라 열매가 있는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에돔에 대하여 오늘 본문 15절과 16절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나라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혹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막대기로 사용될지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보면 평안하다고 생각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갑작스런 파멸로 치닫는 나라들을 종종 보곤 하는 것입니다.

에돔이 바로 그런 나라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쉽게 말하면 너희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한 그대로 보응이 있을 것이란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신다는 표현을 16절에서 하는데 이것은 승리를 기뻐하여 축배를 드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방 나라들과 에돔은 승리의 축배를 들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때만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국인이 항상 마리시니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세상 앞에서 자주 당하는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시고 삼키면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만이 남느냐? 다니엘서를 통해 잘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처럼 큰 신상의 모든 나라들, 예를 들어 바벨론이든, 메대와 바사든, 헬라든, 아니면 로마든 다 망하지만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히 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31-45 참조).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피난처시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피난처가 있다는 것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는 것이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바로 이것을 찾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에돔과 같은 자로 있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선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드린다고 할 때 그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다시 말해 형제나 이웃 또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나 이웃이 아파할 때 못 본체 하거나, 고소해하거나 하는 것은 굉장히 악한 일입니다. 아니 원수라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를 악인과 선인이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듯(5:45) 모든 이들에게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6:7, 3:23). 그러나 무엇보다 부모와 형제에 대하여 더욱 돌아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있어 이웃이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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