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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사도신경10-마1장18절[이는성령으로잉태하사동정녀마리아에게나시고]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1.12|조회수57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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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

사도신경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지난 시간 우리에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것에 대하여 살폈는데,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으신 것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기름이 의미하는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는데,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 선지자 직분, 왕의 직분으로 세워졌으며,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은사들도 받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고, 타락의 결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지만 참된 하나님 지식을 갖추지도, 더듬어 찾지도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제사장 직분을 행하시고, 선지자 직분을 행하시고, 왕의 직분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더욱 깊어져 가도록 하기 위해서, 나아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고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있으면서 그분께만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제사상, 선지자, 왕의 직분을 수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직분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시는가 할 때 그의 낮아지심과 그의 높아지심으로 수행하셨는데, 사도신경을 보면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성육신,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심판주로서 다시 오심, 즉 재림에 대해 열거합니다. 그 중에서 성육신, 고난, 죽음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속하고,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재림이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 역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즉 높고 높은 분이 낮고 낮은 우리를 위해 친히 낮아지시고, 홀로 높아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높아지시기 위해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선 이런 모든 것을 은혜 위에 은혜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1:16).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내용은 이 가운데 예수님의 낮아지심, 그것도 성육신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성육신이란 신성으로 계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인데,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자신을 낮추신 일인 겁니다.

여러분,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기분이 나쁜 발언입니다. 인간과 가장 친근한 동물 가운데 개가 있지만, 개로 표현하는 욕을 할 때 사람들은 굉장히 기쁜 나빠합니다.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개, 벌레와는 분명 구분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벌레 혹은 동물에 속하지만 우리는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못한 피조물로 표현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쾌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개와 벌레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가지신 만물의 창조자요,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방금 벌레와 개 그리고 인간을 비교했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다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조물끼리의 비교조차 인간인 우리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피조물과 창조주의 비교는 어떻겠습니까? 이미 피조물과 창조주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큰 차이인 겁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신성으로 계신 그분이 인성을 취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자의 존재방식을 취하신 것입니다. “낮아지셔도 이렇게 낮아질 수 있는가?”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낮아지신 것입니다. 매우 신비로운 내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실 때 인간의 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의 몸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8절에 보시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자연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의 동거로 말미암아 아이가 생기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심은 그런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성경이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잉태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방식입니다. 자연적인 방법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 34절과 35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여기 보면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통해 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남편이 될 요셉에게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동일한 사실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대해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반응합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방식입니다. 자연적인 방식이 아닌 초자연적인 방식입니다. 남자를 알지 아니한 마리아를 통해 잉태된 방식,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기 때문에 죄와 연루되어 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죄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인 방식으로 출생하는 모든 자들은 아담의 죄가 전가되는데, 그것이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혹 자범죄를 짓지 않고 죽게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형벌은 면할 수가 없는데,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유아라 할지라도, 혹 뱃 속에서 아기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 존재로 형성 되어 있다 할지라도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포합니다(3:23). 그래서 다윗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출생만이 아니라 이미 잉태할 때부터 죄 중에 잉태를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자연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요, 인간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마리아 역시 죄인인데, 죄인의 몸 속에 잉태된 것이 그런 영향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조차 죄가 없다고까지 말하는 기이한 교리까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요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할 때는, 성경이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죄인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제외가 되는가?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모든 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고 할 때는 죄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는 분,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셔야만 했는가? 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실 때 죄가 없으셔야만 했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죄라는 문제가 자리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십니다. 죄인 역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분 앞에 선다는 것은 그분의 속성으로 볼 때 죽음의 결과 외에는 없습니다. 아니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하는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한 가지 방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시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라고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될 내용도 있습니다. 조금 전에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단지 사람으로만 계시는 게 아니라,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한 자 중에 중보자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인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격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 몸을 취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완전히 버리시고 인성을 취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신성으로 계시면서 동시에 때가 되어 인성을 취하신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잉태된 것이다, 인간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다는 것만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렇게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두 본성을 취하고 계시다는 것까지 더불어 이해해야 할 내용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본성이지만 각 본성마다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이 인성이 된다든가 아니면 인성이 신성이 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고, 또한 신성과 인성이 혼합이 되는 일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동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이것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 하는 구절도 있고, 또 예수님의 인성을 증거 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증거 하는 구절들 몇 부분만 언급해 보면, 요한복음 1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육신을 취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는데, 그분을 보니 마치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처럼 있다고 고백합니다.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2장으로 넘어가시면 24절과 25절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한복음에는 이런 구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 4, 5장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그가 인간으로 오셨지만 단지 인간으로만 계시지 않음을 증거 합니다.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공관복음서를 통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서신서를 통해서도 분명히 증거 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증거 하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우리처럼 지혜와 키가 자라갔습니다. 신성이라면 자라간다는 표현이 말이 되지 않지만 인간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42절에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시험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심으로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나아가 주리기도 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렸다는 건 배가 고프다는 건데, 나중에 십자가 상에선 내가 목 마르다”(19:28)고 말씀하실 정도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를 느끼셨습니다. 물론 감정도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론 분을 내셨다는 표현도 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심지어 육체의 한계를 지니고 계시기도 하셨고, 결정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죽음도 겪게 됩니다. 신성으로는 죽을 수 있는가 했을 때 결코 죽을 수 없지만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죽으실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까지도 하실 수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임과 동시에 인성을 취하신 분이십니다. 때가 되어 인성을 취하셨을 때는 인성만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계신 것입니다. 그럼 인성을 취하기 전에는 어떤 존재로 계셨느냐? 당연히 신성으로만 존재하셨습니다. 신성으로만 존재하셨던 분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다시 말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실 때부터는 참 하나님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전이되거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연합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때로는 신성을 따라 하는 말이 있고, 때로는 인성을 따라 하는 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30절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따라 하는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따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요한복음의 6장을 보면 이렇게 말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이것은 무엇을 따라 한 말이냐 하면 신성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 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성으로선 분명 아버지와 하나이지만 인성으로선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하는 자로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신성으로서는 분명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2:3). 때문에 모르시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도 말씀하시느냐 하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13:32)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아는 것을 아들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를 아무도 모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인성을 취하셨고, 이때 인성을 따라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테스트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성이겠습니까? 인성이겠습니까? 당연히 신성입니다. 신성으로서는 율법을 주시지만, 인성으로서는 그 율법에 순종하는 자로 계십니다. 한 가지 더 확인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성을 따라 이해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인성을 따라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인성을 따라 이해를 해야 합니다. 신성으로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시는 분이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두 본성을 지니고 계시며, 두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결코 혼합되거나 전이되거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고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연합을 이루고 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해서 신성을 포기한 채, 신성을 버린 채 인성을 취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인성을 취하셨는가? 하나님으로서는 고난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살폈지만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대속제물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는 인간이 갚아야 합니다. 동물이 갚지 못합니다. 그럼 죄인 된 인간이 죄를 갚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갚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형벌이 아닌 방식이어야 합니다.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인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사람의 몸을 취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보내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처럼 사람의 몸을 취하셔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입니다. 다만 사람의 몸을 취하셨다고 해서 신성이 인성으로 변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신성이 인성 안에서 혼합이 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신성은 신성 그대로 있지만 신성으로 계신 분이 인성을 취하셔서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전이되거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연합되어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신성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 부과된 모든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이미 인성으로는 한계를 분명 지니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있으셨던 것은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성이 신성의 위격과 연합해야하는 것 역시 인성으로 이루신 그분의 순종이 하나님의 순종과 같이 무한한 공로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성 자체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성이 신성과 연합됨으로 인해 그것이 무한한 공로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방식, 자연적인 방식으로 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자연적인 방식, 사람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죄는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두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성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선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두 본성의 연합으로 인하여 신성의 무한한 가치가 그분의 인성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무한히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즉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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