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사도신경 -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살폈는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는 율법의 저주라고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을 항상 행하여 지키지 않는 자의 저주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을 때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 사시면서도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담 이후 아무도 율법을 항상 행하여 지킨 이가 없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는 분으로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십자가 형벌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를 지시고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 때문입니다. 이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 내용 속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그의 고난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받으신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으셔야 했는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공의를 만족시키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 번역에서는 빠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본래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해석에 대해서는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지만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마치 지옥으로 내려갈 정도의 극심한 괴로움과 고뇌를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왜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강화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강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 구절로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강화를 말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19절을 보시면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되어 있지만, 이 말씀은 이어 나오는 20절 말씀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그러니까 19절에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 다시 말해 갇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노아를 통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할 때 지옥 혹은 연옥의 의미가 아니라, 감옥에 있는 영들, 다시 말해 갇혀 있다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그런 의미로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었는데,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활에 대한 내용을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내용은 20절이지만 3절과 4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구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있어 왔다고 할 때 그분의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까지 이미 구약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부터 부활에 대한 신앙이 분명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알려주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내용인데,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부활 신앙이 분명 있었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점으로 부활 신앙이 그 이후에만 주어진 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부활 사건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구약 백성들에게 부활 신앙에 대하여 심어주셨습니다. 동일하게 그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이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 시대 때도 동일하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비록 실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구약 시대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제사법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코케이우스란 인물이 구약과 신약을 이해할 때 죄 사함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결코 옳은 진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구약이나 신약이나 구원에 관한 모든 교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이 동일하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은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앞에 있었다고 해서 달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5장 5절 이하 8절을 보시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구약의 예언대로 죽었다고 살아나셨다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신 것을 당시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고 증거 합니다. 게바를 비롯하여 열 두 제자, 그리고 이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8절에서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이때 ‘내게’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입니다.
바울의 경우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본 것으로 증거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 가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처음 소개 되고, 22장과 26장에서 반복됩니다. 그러니까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었던 체험이 너마나도 분명했던 겁니다. 물론 이때 체험 신앙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하고, 우리는 분명 주의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조차 모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7:22). 기적의 역사만큼 체험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체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른 신앙 위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경우 단지 체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 것으로 말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을 통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본 것으로 말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즉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은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증거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도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말하자 그는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부활을 보이셨습니다. 그 앞에 나타나 손과 발을 보여주셨고, 자신의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이시면서 손을 넣어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이것이 바로 믿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인 것입니다. 보지 못했으나 마치 본 것처럼 확신이 들고, 증거 할 수 있는 것! 바울이 봤다고 할 때는 바로 이런 성격까지 다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일차적으로는 실제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봤다고 할 때는 믿음 안에서 보는 방식까지 다 포함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부활은 거짓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이요, 사실이란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절했다고 다시금 깨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죽으셨습니다. 진짜로 죽으셨습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셨습니다. 그리고는 삼일 만에 다시금 육체와 영혼이 연합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많은 증인들이 있으며, 심지어 믿음의 방식 안에서 여전히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12절로 넘어오시면 여기서는 부활이 전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이것이 단지 불신자라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라는 데 다소 충격적입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는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러면서 부활이 없게 되면 무엇이 문제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러니까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 헛된 것으로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심지어 17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쉽게 말하면 그의 부활이 없다면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택의 내용이 헛될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죄 사함이 있는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19절을 보시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다고 믿는 자들은 결국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고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자인 겁니다.
결국 성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오는 은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이 다인 줄 알고 이 세상의 삶만을 바라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고, 나아가 하늘에 있는 성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지만 장차 있을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가장 불쌍한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저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이런 소망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다. 삶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 땅의 삶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삽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과연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삶에 몰두하다보니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법을 모릅니다.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인생을 실패하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기까지 합니다. 주일성수, 오전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때로는 주일까지 어기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대한 기대는 가지지만 하늘을 향한 소망은 전혀 가지지 않는 것처럼 비취지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믿는데 나타나는 양상은 마치 부활 신앙이 없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다시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강하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 보면 ‘첫 열매’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나사로를 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게 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금 살리시는 그런 기적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분명 죽었습니다. 그러나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첫 열매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부활 앞이든, 그분의 부활 뒤든 모든 부활의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사로의 부활의 경우 살아났지만 다시금 죽었습니다. 부활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런 부활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부활이란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다시금 사는 것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부활의 맛을 봤다고는 할 수 있지만, 예수님보다 앞서 부활했다고 해서 그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될만한 그런 부활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런 부활은 언제쯤 일어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입니다. 그때 죽은 자가 다시금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은 자들만 있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5장 52절을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 소리가 울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이 다시금 살아나게 되는데, 그때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금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죽었다가 살아날 때의 부활체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과 같은 육체로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죽을 때와 똑같은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본질의 육체이지만 신령하게 변화가 됩니다. 본질은 같은 육체이지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 재림 때 죽은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때 주의 백성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한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금 살아나는 것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들 역시 죽었다가 부활한 몸과 같은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뿌리가 어디 있느냐?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는 것, 그리고 죽지는 않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자처럼 그 몸이 변화하게 되는 뿌리가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에게만 첫 열매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잠자지 않는 자들에게도 실제로는 첫 열매로 계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 ‘잠자는 자들’이란 표현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죽은 자들에 대해 잠자는 자들로 표현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잠을 자고 난 뒤 깨어나는 것처럼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비유적인 의미에서 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를 하면 부활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증거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부터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부활에 대한 내용은 거짓이 아닙니다. 사실이요 진실입니다. 이미 그것을 증명해 주던 많이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믿음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증거 하도록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없으면 결코 부활에 대한 내용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에만 소망을 두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저들에게는 다음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소망이 일절 없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말해 부활신앙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러 가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 땅의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땅의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는 이 땅의 것을 주실 때도 감사함이 있지만, 주신 것을 거두실 때도 감사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만 살펴보고 정리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부활의 유익은 무엇인가? 더 이상 사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망을 이긴 자가 되고, 죽음을 정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망을 이기고, 죽음을 정복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의에 참여하게 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데, 이것이 부활의 유익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의에 참여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지금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게 합니다. 로마서 6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옛 본성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이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것과 같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새로운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무엇보다 이 세상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지 마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앞으로 살아갈 곳에 비해 하나의 점보다 짧은 시간입니다. 인생을 생각하면 80에서 90세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입니다. 영원에 비해 이 세상의 삶이 길다면 얼마나 길겠습니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고난을 단지 핍박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말씀에 근거하여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 손해를 봐야 할 것이 있다면 손해를 보는 것, 그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학생들도 있지만 앞으로 대학을 가고 되고 이후 직장을 선택하여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월급 400만원 500만원을 주는데 주일을 지키는 게 힘이 드는 직업과 비록 월급은 200만원이지만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어디를 고르시겠습니까? 세상은 당연히 월급이 많은 쪽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을 따라 우리의 세상적인 본성을 죽이는 자, 그리고 부활신앙에 따라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는 주의 말씀이 있는 곳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월급은 적아도 주일을 지키는 쪽인 것입니다. 사람은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잘했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양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잠시 나그네로서 지나가는 삶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