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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사도신경15-시110편1절[전능하신하나님우편에앉아계시다가]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2.16|조회수81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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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01

사도신경 -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살폈는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2) 셋째 하늘이라고 칭하는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왜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때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말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의 완성이라는 측면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완성을 위해서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특히 이 일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결이 되는데, 사도신경의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는 것,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 하늘에 오르신 것,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위해서인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권세를 가지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지셨지만, 인성을 취하신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에 대한 권세를 받으셔야 했는데 그것을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조금 더 집약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의미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왕권을 넘겨받는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처럼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에 대하여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성으로는 이미 전능하신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때는 성부도 그렇고, 성자도 그렇고, 성령도 그렇습니다. 성부만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성자, 성령께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성의 본질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분으로서 하늘에 올라가시고 이제는 그의 우편에 앉아계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 받아 대신하여 통치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일차적으로 인성에 대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는 말씀을 종종하시는데,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 18이 대표적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그리고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 9절과 10도 보시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이 말씀 앞에는 하나님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비하의 신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승귀의 신분을 알리시면서 9절과 10절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제 그분이 받게 되었다는 뜻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 우편이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그렇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고, 형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가 어디에 앉아 있다는 표현을 사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귀라는 말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얼굴이나 손, 귀와 같은 형상은 없지만 마치 인간으로 비유하면서 그것을 통해 어떤 뜻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얼굴은 주로 은혜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보호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귀는 우리를 향하여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말하는 내용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분이 이 모든 만물의 왕이라는 사실과 왕으로서 이 모든 만물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예수님께로 위임이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읽은 시편 110편의 말씀은 다윗의 시편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왕국과 관련하여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왕권, 그리고 그분의 제사장직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1절 말씀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여기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느냐 할 때 내 주에게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다윗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 주입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때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오늘 본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22:43-45) 그러니까 지금 다윗이 내 주라고 말하는 이 부분은 다윗 자신에 대한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시편 110편의 말씀은 다윗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말씀이고, 그 내용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나님께서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느냐? 시편 110 2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여기 보면 권능의 규라는 말이 나오는데 라는 말은 홀, 지팡이라는 단어입니다. 왕권의 상징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왕권을 넘겨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다스리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가 원수에게까지 입니다.

보통 원수라 할 때 일반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예정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기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창세기 315절 원시복음과 연관해 볼 때 인류로 하여금 죄를 조장했던 사단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고 할 때 세상의 모든 만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자들, 나아가 영적인 존재인 사단까지도 다스리신다는 그런 의미인 겁니다. 때문에 사단은 예수님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단은 하나님과 상벽을 이루는 그런 존재로 인식할 때가 많은데,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욥기에 나옵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하려 할 때 누구의 허락이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가?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결코 대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사단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한 가지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은 1절에서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인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3 15로 가시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 말씀은 원시복음입니다. 왜 원시 복음을 주셨는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기에 앞서 사단을 먼저 벌하실 때 이 말씀을 하십니다. 한 마디로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모든 죄와 사망의 세력을 물리치셨고 죽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하심으로 더 이상 죄에 대해 살지 않고 의에 대해 살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실제 우리 삶 가운데 보이는가? 너무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심각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면 마땅히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이제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습니까? 여전히 죄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처럼 그렇게 죄에 대하여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게 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로마서 7으로 가시겠습니다. 21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1-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있어 마땅한 바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바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 있느냐 하면 한편으로는 선을 행하길 원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악이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한 법이 있어 하나님의 법과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사는 신자들의 현 주소입니다.

그럼 왜 이것이 신자들의 현 주소인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 거룩하다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의인으로, 성도로 불러주고 계시지만, 여전히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나라가 임했지만, 그래서 그분의 통치 가운데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자의 수가 차기까지는 미완성인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단의 권세를 짓밟으셨지만 택자의 수가 차기까지는 한시적으로 마치 마귀가 이 땅의 권세를 가진 것인 양 내버려두시고 욥기에서처럼 요구를 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사단의 경우는 주의 백성을 넘어뜨릴 목적으로 그런 요구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응하시는 겁니다.

 

이런 사단의 권세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느냐? 에베소서 2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여기 보면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본래 모든 통치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중의 모든 권세를 가진 것처럼 표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마귀를 무엇에 비유하는가 하면 우는 사자로 표현합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자! 반면에 성도는 우는 사자 앞에 있는 양과도 같습니다. 능력으로 보자면 마귀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회가 사단 아래 들어갈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만물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그의 권세로서 이 사단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의 머리를 밟으셨지만 영광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서 그분의 통치권으로 계속해서 사단을 밟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 권세 잡은 마귀 앞에서, 그리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단 앞에서 그의 백성이 빼앗기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결코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통치는 특별히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보존하시는 은혜의 통치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편 110 3을 보시면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어떻게 해서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주께로 나아올 수 있는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 받은 자로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 스스로가 거룩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4에 이렇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그분이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씻어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셨느냐?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통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통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만물에 대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통치하고자 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통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의 통치 역시 자기 백성들을 위한 통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만물의 통치를 통해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통치를 은혜의 통치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과 관련해서 성경의 몇몇 말씀만 찾아보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0 27절 이하 29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여러분이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만을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성의 내용이 뭐냐? 한번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영생을 주시기록 작정하셨다면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현 주소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죄악 된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태신앙이지만 어릴 때부터 듣고 들었던 말씀이 있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계명으로 치면 어느 한 계명도 제대로 지키는 바가 없습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이런 모습에 대해 사단은 그러고도 목사냐? 그러고도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사단의 어떤 말이라도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한번 영생을 주시기로 하셨다면 반드시 주시기 때문에, 심지어 사단의 권세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한 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029절에서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아버지보다 크지 않으며, 크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로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하다면 당연히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나 자신을 보지 마시고 모든 만물보다 크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빌립보서 1 6도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우리에게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있다. 그리고 그분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상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신앙은 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할 때 믿는 나 자신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이랬다, 저랬다 하는데,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변하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반드시 완성시키시고야 말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 38절과 39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무엇에 대한 확신이냐?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을 어디에 근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831절에 의하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그러면서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주셨는데, 아들과 함께 다른 것 아까워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아들까지 주셨다면 주신 아들이 이룬 모든 것이 헛되지 않아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만큼은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아무리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해도,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모든 만물의 통치권을 가지신 자가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다스리길 원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렇게 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그분의 권세로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는 신앙고백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여러분의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 앞에서 더욱 견고한 믿음이 되셔서 합니다. 분명한 확신 가운데 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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