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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사도신경16-마25장46절[저리로서산자와죽은자를심판하러오시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3.29|조회수2,934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546

사도신경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이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내용인데, 이것은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받았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십니다. 다스리되 원수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나아가 자기 백성들을 향한 목적, 즉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부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성육신을 위하여 내려오신 것을 초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역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이것을 승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금 이 땅에 내려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이때 사도신경은 저리로서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사도신경 바로 앞에 있는 말을 받는데,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난 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하늘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이 땅에 오신다는 겁니다.

이 재림에 대한 성경구절을 확인해 보면 사도행전 1 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금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 30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올라 가신 그대로 다시금 오실 것인데, 이때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구절들이 있습니다(ex. 살전4:16, 살후1:7 ).

그러나 방금 본 마태복음 2430절은 재림의 확실성만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은 어떠한가까지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임할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신비롭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우리나라 위에서 내려온다고 할 때 어떻게 우리나라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는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금 내려온다고 할 때 분명 이쪽에서 보면 저쪽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있어 땅의 모든 족속이 그 재림의 광경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비로운 역사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재림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볼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 또한 신적인 위엄으로,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매우 찬란한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면 마태복음 24 30절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44로 가시면 이렇게 말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첫째,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내려올 것이며, 둘째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갑작스레 이루어질 일, 생각하지 않은 때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 3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그 영광을 드러내시며 오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시는 것이 내가 몇 년도 몇 월 몇 일에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마치 도둑이 몰래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재림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재림의 때가 언제인지는 말씀해 주지 않았지만 재림의 때가 가까워오면 가까워올 수록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마태복음 243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첫째 여러 가지 난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 지진 등이 일어나는데(6-8), 이것은 재난의 시작일 뿐 끝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9). 왜 받느냐? 예수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런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배도하는 일도 나타나게 되며(살후2:3),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도 식어진다고 말씀합니다(12). 셋째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될 것입니다(11). 특별히 그들을 향하여 큰 표적과 기사를 통해 미혹할 수만 있다면 미혹케 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적과 같은 일에 대해 매우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기적이 좋은 것 같지만 성경은 기적이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주 강조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 유의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끝은 언제냐?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 된 뒤입니다(14).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수가 다 차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오늘날에만 있는 일인가? 과거에는 전혀 없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 이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일이 예수님 재림의 징조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도는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좀 더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이것이 어느 시대나 성도를 향하여 요청하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개인적인 종말, 즉 이 세상의 끝으로서의 종말이 아닌 라는 사람의 생명이 다하여 죽는 일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으로나 혹은 이 세상적으로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 마지막 부분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42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그리고 마태복음 25으로 넘어가시면 동일한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13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예수님께서 재림하실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시대든지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알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며, 준비해야 할 이유는 이런 종말의 징조가 항상 있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종말론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이기 때문에 항상 주님 오심을 예비하며 살아가는 자, 언제 어느 때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 그가 바로 신자요 성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깨어 있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은 단순히 재림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재림이 심판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5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31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1절에서 33절을 보시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하시는데, 하나는 양이고 하나는 염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46절을 말할 때 한편은 영벌을 받을 자, 한편은 영생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 모든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눠지게 되는데, 한편은 영벌에 들어갈 자이고 다른 한편은 영생에 들어갈 자로 나눠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영벌, 영생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재림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 다시 말해 영원을 결정하는 매우 무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1년만 감옥에서 지내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10년도 아니고, 20, 30, 그 이상도 아닙니다. 평생이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림을 통한 심판은 이 땅에서처럼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과 영벌인 겁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심판을 예비하는 자로서, 주의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본문으로 다시 오셔서 본문과 관련된 앞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32). 이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살아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다 불러 모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부활이라는 부분에서 말씀드릴 때 살펴본 것처럼 가장 먼저 죽은 자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은 그들의 몸이 변화될 것인데, 지금의 육체는 죽음을 향해 가는 모습이지만 부활로서 살아난 육체는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같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 서느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양과 염소처럼 구분을 짓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은 이런 구분이 마치 행위적인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34절을 보시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확하게 그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25:41-43).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을 받는 것(유효적 소명), 거듭나는 것(중생), 그리고 의롭다 해 주시고(칭의), 거룩하게 되는 것(성화), 그리고 결국 영화롭게 되는 모든 것(영화)은 누구로 말미암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쪽에는 어떤 원인과 조건도 제공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16:31)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2:8).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보자면 거저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공짜인 겁니다.

그럼 마태복음 25장은 이런 내용과 충돌되는 것으로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간혹 보면 성경 속에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충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결코 오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살필 때는 어떤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피거나 혹은 전체적인 조명 속에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먼저 성경은 결코 행위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갈라디아서 2 16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그렇기 때문에 지금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의 행위는 구원에 대한 조건으로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분점은 갈라디아서의 말씀대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특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2:8)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에 따라 의인과 악인이 구분됩니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받는 자는 의인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행위라는 어떤 원인이 조금이라도 들어올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행위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처럼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태복음 24장 끝 부분과 25장 첫 부분을 보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데(24:42, 25:13), 바로 그 연장선에서 깨어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깨어 있는 삶이란 열매가 있는 삶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면서 주님 오실 것을 예비하는 자로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혹 너희에게 이런 열매가 없다면 주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로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경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선한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 열심의 결과로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웃 사랑의 실천은 무엇에 대한 증거인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거입니다. 다시 35절과 36절을 보시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분명 심판주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릴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의인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37절 이하 39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40절을 보시면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이기 때문에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즉 이웃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으로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선 이웃 사랑과 연결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반드시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을 베풀 때 드러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결코 머물러 있지 않고 이웃을 향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을 역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 없이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선 사업이나 그러한 것을 행하는 단체들이 있기도 한데,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주는 도구들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본래 인간의 본성은 죄악으로 넘쳐 납니다. 부패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철저히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패성을 제어하시고, 나아가 선을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구원과 상관없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있게 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열매란 반드시 하나님 사랑이 먼저여야 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웃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땅에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한 자들은 그것이 곧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웃 사랑의 실천을 공로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당연히 있어야 할 열매로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준비란 바로 이런 차원이어야 합니다. 한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흰 옷 입고 산에 가서 주님 맞을 준비하는 그런 준비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근거해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서 여러분이 준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모든 삶을 등진 채 살아가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을 사랑하되 그것이 내 공로라고는 전혀 여길 수 없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요, 준비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알도록 하는 것이 달란트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514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금 다섯을, 어떤 사람에게는 금 둘을, 어떤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 주인이 돌아오게 되는데 금 다섯과 금 둘을 받은 사람은 각각의 이윤을 남깁니다. 그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 23)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24절을 보시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그러나 여러분, 이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과연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굳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착각해도 너무 착각한 것입니다. 아니 착각한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달란트를 주실 때는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적은 일에도 충성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거저 굳은 사람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때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25:26-27)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주인의 의도는 원금 그리고 이자를 남기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굳은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해야 되지만 나는 그런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충성하지 않은 것이고, 네 잘못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달란트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바로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준비란 이윤을 남기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누가 더 잘 살고, 누가 못 사는가로 충성과 불충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섯을 받았다면 다섯을 받은 자로서 충성하는가? 둘을 받았다면 둘을 받은 대로 충성하는가? 하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성의 문제지 얼마만큼 받고 얼마만큼 남겼는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자로 준비한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 가운데 충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충성이 무엇으로 드러나야 하느냐 했을 때는 율법의 요구요, 말씀을 통해 누누이 알리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한 열매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부요하게 사느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는 것, 그것이 충성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근거하자면 일하고 온 종에게 주인이 먹을 것이 준비하라고 하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행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인 줄 알고 무익하다고 말하는 것,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공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학생이라면 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부모라면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직장인이라면 직장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준비란 어떤 기능적인 사람이 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서 서 있어야 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커서 뭘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맡기시든 그 일에 충성하는 자로 있느냐? 그리고 어느 사람 앞에서건 주를 대하는 마음으로 서 있느냐? 바로 여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준비는 바로 이런 면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고 오셔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인 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건 뭔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 오시는 그것만을 위해 종교적 행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전반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믿는 자로서 마땅히 모든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의인다운 의인으로 살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삶,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줄 아는 자로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디 믿는 자로서 주님을 기다리시되 철저히 주님 오심을 기대하며 고대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준비가 여러분 자신을 신랑 되신 그리스도 앞에 덜 부끄러운 신부로 갖추실 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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