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도신경

사도신경21-살전4장14절[몸이다시사는것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0.05.03|조회수800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데살로니가전서 414

사도신경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와 관련해서 지난 시간에는 용서에 대해서 살폈는데, 간략히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그리고 이 땅에서 부패성의 잔재로 말미암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지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 은혜를 아는 자로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입장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한 일이 있다면 그런 잘못에 대하여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가 잘못한 당사자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을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용서를 하나님께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지만, 그 말씀 속에 이웃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분명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영화에서는 기독교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기만 하면 사람에게는 아무런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 것도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보통 부활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살피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 가운데 한 가지가 부활 신앙이라고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몸이 다시 산다는 고백은 육체의 죽음을 전제한 말입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데살로니가 전서 414절 바로 앞에 있는 말씀, 13절을 보시면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잠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잔다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깨어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잔다고 표현할 정도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연결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몸의 부활에 대해 고백한다고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이 최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죽음 이후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인간이 죽는다고 할 때 그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죽음이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은 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 21절에 보시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씀은 육체의 죽음, 즉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뜻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 죽음입니다. 방금도 말씀드린 것처럼 육체의 죽음이요,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는 바로 이 죽음을 전제한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이든, 혹은 우리 육체가 죽음에 놓이게 되는 그런 죽음이든 다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곧 죽음을 야기 시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6:23).

여기서 한 가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망, 죽음을 생각할 때 죄로 인한 죽음이 마치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입니다. 그럼 죽음은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할 때 그런 반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육체의 죽음이라고 할 때 성경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죽음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때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창조된 이후 결코 죽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혼은 창조된 이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죽음은 소멸 혹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마태복음 10 28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말씀하십니다. 혹 여기서 하나님께서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신다고 하시니까 소멸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때의 의미는 지옥에 넣는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말씀 외에도 누가복음 16장에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내용을 통해서도 천국에 있는 자나 지옥에 있는 자가 다 그 영혼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입니다. 간혹 의학에서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인가?” 논쟁을 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준으로 보자면 당연히 우리 입장은 뇌사상태일지라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 이상 죽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기본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부활이라고 할 때 죽음이라는 문제가 전제되어 나오며, 죽음은 결코 사라지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썩어질지라도 영혼은 여전히 영원히 존재한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가지고 계셔야 할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으로 오시면 예수님께서 다시금 재림하실 때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3을 보시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과 관련된 내용을 알지 못함을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왜 알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느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내용의 배경을 보면 데살로니가 지역의 교회들 가운데 성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슬픔은 어떤 슬픔이었는가? 보통은 나와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맡게 되면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슬퍼합니다. 지금 데살로니가 지역의 교회들이 이런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이 땅에서 볼 수 없다는 추모의 슬픔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내용을 통해 보자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슬픔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확신에서 나오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그러니까 너희의 슬픔처럼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1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그러니까 순서로 볼 때 주의 재림이 먼저이고, 그런 다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예수님 재림 때 살아있는 자들보다 앞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도의 부활, 즉 죽은 성도의 부활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이 분명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의 경우 그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확대하여 적용하자면 비록 이 땅에서 헤어지는 슬픔은 있겠지만 그런 슬픔이 마치 소망 없는 것처럼 비춰지는 그런 슬픔도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의 성도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 정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지만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슬퍼하되 과하게 슬퍼하는 경우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과도한 슬픔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이별이 아프고 슬픈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픔과 슬픔이 과도하게 나타나 마치 죽음이 끝인 것처럼 그렇게 슬퍼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성도에게 있어 합당한 자세는 아니라는 것을 잘 배우셔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인정 없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별에 대한 슬픔은 있지만 그 슬픔이 너무 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부활이라는 소망이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2으로 가시면 11장에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더불어 범죄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간음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충신 우리아를 죽음에 내몰게 됨으로 살인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서 나단이 와서 책망하는 것이 12장입니다. 그런데 그 책망 가운데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14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물론 나단의 책망에 대해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는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그럼 14절과 같은 일은 있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논리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려고 하는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지만, 정리해 둘 것은 다윗이 회개했다는 것과 그런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셨지만 이 일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할 목적으로, 경책하도록 할 목적으로 아이를 죽이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불의함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결정에 대하여 훗날 아이를 낳고 난 뒤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을 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합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여기 보면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던 겁니다. 살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헛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레 만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가셨습니다(18).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상황 속에 있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하겠습니까? 한없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혹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높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는 아이를 위하여 간구했습니다. 간구하되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심어린 마음이요,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했던 겁니다. 그러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다윗은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는 다시금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차려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0). 어떻게 이를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어떻게라는 질문을 실제로 신하들이 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러분, 지금 이 말씀으로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다 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의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 울지 않았다는 이런 말씀은 단순히 인간미가 없다는 식으로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위하여 기도하되 금식하고 밤새도록 기도하였다는 것을 통해 그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로는 더 이상 다윗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혹 우리의 울음이 단지 육체의 이별로 인한 슬픔 이상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는 내게로 올 수 없지만 내가 그에게로 간다고 말함으로 다시금 만나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는 바로 이런 면이 더욱 부각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때문에 너무 과도한 슬픔이 마치 소망이 없는 자와 방불하다면그것은 하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전반적인 이해 때문에 여러분에게 권면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살아계실 때 여러분의 부모님, 그리고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더욱 잘 하셔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가톨릭의 경우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의인의 영혼이 있는 천국과 악인의 영혼이 있는 지옥 사이에는, 죽은 후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는 없지만 천국에 바로 갈 수 없는 소죄가 있는 영혼이 있어서 그 소죄를 속죄하기 위해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얼마 동안 단련하고자 머무는 장소가 있다고 믿는데, 그곳이 바로 연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범죄자들과 같아서 스스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무엇보다 먼저 헌금 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단의 제물을 통해서 그들의 보속은 경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정해 죽은 자들을 위한 위령 미사 등을 통해 하나님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된 교리는 이미 다윗의 말로도 충분히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연옥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4으로 가셔서 16절과 17을 보시면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있게 됩니다. 그때 하늘로 올라가심 그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 이렇게 주께서 강림하실 때 먼저는 죽은 자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됩니다. 영혼은 죽이 않기 때문에 죽지 않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을 하게 되어 다시금 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후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 때 살아 있는 자들은 단지 그 모습 그대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 그대로를 가지고 있게 되면 결국 우리가 나이를 먹듯이 그렇게 쇠약해져 가는 모습으로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육체로 변화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에서 어떻게 말씀하느냐? 50절 이하를 보게 되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0-53) 지금의 상태에서 영혼은 영원하지만 육신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이란 죽은 육체가 다시금 살아나되, 지금의 육체의 본질과 동일하지만 영원히 산다는 의미에서 다른, 바로 그런 육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재림 때 살아 있는 자들 역시 그 몸이 변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것 역시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고린도전서 154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그러니까 부활체의 특징이 뭔가? 부활한 몸,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변화하게 될 몸은 첫째로 썩지 아니하는 몸입니다. 둘째는 영광스럽게 몸을 입게 됩니다. 셋째는 강한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넷째는 신령한 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썩는 것이고, 욕된 것이며,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육신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하게 될 몸과의 연합은 결국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영화로운 단계까지 나아가게 되는 그런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바로 여기를 향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죽을 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완전성화의 단계가 아니라 영화되는 단계, 그 자리가 우리가 소망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님을 기다리라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고대하면서 사는 삶.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2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것이 우리의 신앙 내용이요, 여러분들이 고백하셔야 할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지금까지 부활을 생각한다고 할 때 그럼 성도만 부활하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예수를 믿지 않은 죽음 사람 역시 부활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영혼도 영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게 될 때 저들 역시 그 육체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부활과 성도가 아닌 불신자의 부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그러니까 동일한 부활인 것 같지만 저들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그 목적하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부활이냐? 영생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부활입니다. 반면 저들은 어떤 부활이냐? 영벌을 위한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 29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나아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부활은 그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즉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그분의 부활이 성도의 부활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아닌 것이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우리를 그의 몸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의 부활은 결코 그리스도가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택자들만을 위한 오심이요,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도 택자들만을 위한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들의 부활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이 바로 저들의 부활의 근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오시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영화롭게 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