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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사도신경06-롬14장8절[우리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12.08|조회수344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로마서 148

사도신경 - 우리 주

 

사도신경의 두 번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살피고 있는데, 지난 시간에는 좀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독생자라는 사실,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에서는 외아들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한 분이 상황에 따라 어떤 역할을 하는 그런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분이시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닌 그런 한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해야 하는데, 성경은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아리우스라는 이단이 말하는 것처럼 아들의 경우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낳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이게 가르쳐주고 있는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가 스스로 계시다면 성자도 스스로 계시고 성령도 스스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부가 영원 전부터 존재해 계시다면 성자도, 성령도 영원 전부터 존재해 계십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모든 속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돌려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다만 속성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동일하게 돌려지지만, 성부는 성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구별하는 것이 성부는 전 신성의 근원,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신 분,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으시는 분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로서 성자의 경우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 두 번째 부분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생각했던 것처럼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폈지만 성부만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신 것이 아니라, 성자도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 근거구절로 요한복음 13절을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읽어드리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이때 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만이 아니라 섭리하기도 하십니다. 히브리서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즉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도 하십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자 하나님 역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의 주인이라고 할 때는 우리의 구속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그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구별하여 세우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속은 우리를 끝까지 보존하시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것까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한번 구속했기 때문에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서 1으로 가시면 본래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8절부터 23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한 마디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였는가?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불의한 자요, 불의함으로 진리를 막는, 그래서 경건하지 않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21절 이하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고 증거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라는 표현을 합니다.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칼빈은 종교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소위 종교심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바가 있는 것처럼 사람이 사는 곳에 종교가 없는 지역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알만한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가?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란 하나님을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기기 싫다고 말하는 게 사람의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싫다. 심지어 20절에서는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고, 외적으로도 핑계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란 분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핑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복음이 들어오기 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지옥에 갑니까?” 당연히 복음을 듣지 못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지옥 가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들 마음에 종교심, 그리고 이 모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못 들었다는 것으로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하는 짓이라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는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불의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맨 처음 아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외적인 어떤 모습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424절 말씀과 같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요, 영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이때만 해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였고, 그만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오고 난 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영의 일을 도모하기보다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되었으며, 의외 진리의 거룩함은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도 두려워하여 숨게 되었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보다는 핑계를 대고 남 탓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탓까지 돌리는 그런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하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던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5 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7절 앞부분도 보시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그러니까 죄가 들어온 뒤부터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사망인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나인 줄 알지만 처음부터 내가 나의 주인인 적이 없었습니다. 본래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망이 나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 때문에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주인은 따로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사망이 우리의 왕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누가 나의 주인이냐 하면 사망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느냐 하면 아무리 잘해봐야 사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는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보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좀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데 무지 착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기분대로 하고, 참는 건 얼마나 못하는지 인상 쓸 대로 쓰고, 때론 욕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착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이상 그들의 왕은 사망입니다. 때문에 최종적인 자리에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아무리 못해도 결코 사망으로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로마서 517절을 다시 보시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사망이 우리의 왕이 아니라, 이제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렇게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일차적인 다름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종이냐? 사망의 종이냐? 아니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자냐? 신자의 다름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해서 우리가 왕이 아니라, 사망이라는 주인에게서 생명으로 들어온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로마서 5 21에 보시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사망이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는 것은 우리가 왕이 아니라 은혜가 왕이요, 그 은혜의 주체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왕, 우리의 주인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요,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서 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차적인 다름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데 있지, 그 주인을 모시는 내가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의 경우 사망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잘하고 잘해도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지만, 신자는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결코 사망으로 갈 수 없는 자들, 반드시 생명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자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라고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할 때 단지 주인만 바뀌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6으로 오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1절과 2을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본문에 대해 세세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사망이 주인일 때는 죄에 대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6을 보시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죽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나를 지배하던 죄,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때문에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말씀을 보면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왜 부활하셨는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2절과 13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이런 면에서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은 죄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이요, 특별히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훈,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며 사는 자들의 마땅한 바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48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왜 주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왜 우리가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 의지가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나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의지가 있어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 몸도 주님의 것이요, 내 영혼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9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때문에 신자의 지혜로움은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알고, 그분의 뜻과 그분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것, 여기에 신자의 지혜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명기 4 5절과 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5절을 보시면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왜 하나님께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느냐? 그 가르침대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6절입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여러분, 세상적으로 똑똑해서 지혜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지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쪽은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거기에 참 지혜와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머리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순발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의지해야 할 자리, 여러분이 믿고 따라야 할 자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저쪽 길을 간다할지라도 말씀이 이쪽이라고 하면 이쪽 길을 가야 하는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하는 것을 지혜와 지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에겐 실수가 많습니다. 내 주인이 예수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사는 그런 못난 모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주인은 바뀌었는데 외형은 주인이 바뀌지 않은 듯 보일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란 사실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사기 위해 무엇을 지불하셨냐 하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적어도 우리의 가치는 독생자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생자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신 겁니다. 그런 가치를 지닌 자를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내어버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더더욱 아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23장에 보면 발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쉽게 말해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이루시되 변경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구약에 보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버린 일이 있다면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참 이스라엘은 아니었던 겁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참 이스라엘,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일이 있는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해도 그냥 넘어간다, 어떤 잘못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징계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종만이 생명이요, 불순종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삼으셨는데, 어떻게 사망으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징계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징계해서라도 순종의 길을 가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이 여기 있는 겁니다.

비교해서 말씀 드리면 육신의 부모는 징계를 할 때 사랑의 마음도 있지만 때로는 분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징계 가운데 죄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를 자녀답게 만들기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만 징계를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린문답 제1문에 보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저는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 그것은 바로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누구의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인이면 결국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결과 되는 것은 생명이 아닌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인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됩니까? 그분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앞에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셔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답답해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셔야 합니다. 오히려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것이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에게 감사와 찬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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