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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사도신경08-마1장21절[예수-자기백성을구원할자]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19.12.27|조회수77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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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1

사도신경 예수(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지난 시간에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 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의 뜻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한 마디로 구원자인데, 어디로부터의 구원이냐 하면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구원자는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그런 구원자입니다. 혹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구원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원하고, 암담한 현실로부터의 구원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초점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죄인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을 가르침으로, 나아가 치유 사역을 통하여 전파하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초점은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할 때 어떤 대상을 염두 해 두고 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로부터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모든 사람으로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1절을 보시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예수님께서는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대상이 누구냐? ‘자기 백성이라는 대상을 염두 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백성이 있다고 할 때 자기 백성이 아닌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자기 백성이라고 할 때 불특정 다수를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기 백성이란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그것도 한번 택하셨다면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자들로서의 택자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할 때 자기 백성이라는 대상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정한 백성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누구를 위한 죽으심이냐 할 때 자기 백성들, 즉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그것도 불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분명 특정한 대상을 두셨는데, 그들만을 위한 죽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것에 대해 몇몇 구절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 3절에서 6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여기 보면 창세 전에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1:4). 시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그리고 공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선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미 하나님 안에는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섭리 속에서 펼쳐지는 죄의 문제,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 보내시는 것까지 그분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대상에 대하여 부르실 것까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부르시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 4절에 보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있다면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서는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즉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자로,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로 그 방향이 설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중심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부분은 이런 목적과 관련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어떤 대상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존재하기도 전에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선택하셨지만 그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결국 유기되고 말았다그러니까 선택에 대하여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보편 인류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누구든지혹은 모든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라는 구절도 있고, 또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누구든지’, ‘모든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에서 말씀하시는지를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길 원하시지만, 누가 그 구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이 있고 없고가 결정되는 그런 식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9으로 가시겠습니다. 선택을 말할 때 보편 인류라는 차원에서 말하는가? 아니면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표현인가? 우선 11절부터 13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여기 보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선택 안에 모든 사람을 넣으려면 야곱만이 아니라 에서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그들의 선, 악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선택과 유기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무엇이냐?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로 하신 자, 그러나 모두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미워하시는 대상과 다른 대상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혹 그런 하나님이라면 공평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논리일 뿐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14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한계인 것이지, 완전하신 하나님, 불의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과 16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긍휼이 여길만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렇지 않은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긍휼히 여길만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고, 그렇지 않는 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이 의미는 16절 말씀에서 더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원인으로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원인이시다. 그래서 앞서 선과 악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면 긍휼을 받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들은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실제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 에서도 악한 사람이지만 야곱도 만만치 않은 사람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는 것을 싫어하여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가 야곱입니다. 그리고 밭 죽 한 그릇을 가지고 장자의 명분을 산 자가 야곱입니다. 형인데 형에게 밭 죽 한 그릇도 그냥 주지 않는 자, 그런 점에서 형제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자가 야곱인 것입니다. 심지어 이삭의 축복도 가로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형은 털이 많고 자기는 털이 없어 털도 붙이고, 목소리도 변경시켜 가면서까지 그렇게 축복을 받아낸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리고는 도망갑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찾아가시고 말씀하시고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기로 했는데 사랑한다고 해 놓고 중도에 포기한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에서에 대해서는 그냥 내버려두면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악을 행하며, 죄의 길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결국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시기 때문에 결코 모든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도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시기 때문에 철저히 사람에게 원인이 있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 누구에게만 원인이 있느냐?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만이 원인으로 있습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선택이 있고, 그분의 뜻에 따라 유기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구별은 분명히 해야 하는데, 유기하셨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형벌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있습니다. 즉 그들 스스로가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는 것이지, 유기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인 것이지(6:23), 유기의 삯이 사망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이해 가운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몇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확인하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지예정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텐데,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 하나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근거로 선택을 말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심으로 모든 것을 미리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 구원을 받을지,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지를 아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바로 그렇게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지예정의 내용입니다.

실제로 로마서 8 29에 보면 이런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여기 보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먼저 나오느냐 하면 미리 아심, 즉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미리 정하셨다는 선택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은 선택하실 때 미리 아시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선택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냐? 결국 사람이 어떤 원인과 조건을 가지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미리 아심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이렇게 논리를 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말할 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때 저들은 하나님은 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줄 아시기 때문에 선택하신다는 논리를 폅니다. 혹은 참된 믿음은 선한 열매가 있다고 할 때 저들은 하나님은 저 사람이 선을 행할지, 악을 행할지 아시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자를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얼핏 보면 선택을 말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선택의 근거가 무엇이냐 했을 때 결국 사람이 선을 행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다는 데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들의 논리는 사람이 어떻게 행할지를 미리 보시고 결정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원인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9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만이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만이 궁극적인 원인이지, 이것 외 어떤 것도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지예정을 주장하는 자들, 이들을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는데, 그들은 결국 교회 역사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한 가르침이란 것입니다.

그럼 로마서 829절과 같은 말씀은 어떤 의미의 말씀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근거가 되어 미리 정하시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미리 아심이 원인과 조건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미리 아심이란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 속성이 하나님의 의지와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시기도 하십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십니다. 못하시는 게 없으십니다. 그러나 못하시는 게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능력을 행하시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때 전능하사라는 말의 의미를 살필 때 이미 말씀드린 것입니다. 소위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라는 말을 통하여 모순을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그런 모순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의지와 상관없이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전지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29절의 말씀은 미리 아심이 원인, 조건이 아니라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모순 없이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미리 아시지만 그것이 저들에게서 원인과 조건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미리 아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정리 해 두어야 할 내용은 예지가 조건과 원인으로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예지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내용을 보면 어느 때는 예지를 예정 혹은 작정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속성 간에는 무엇이 앞서거나 무엇이 뒤따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간혹 예지가 앞선다고 말할 때도 있는데, 이때는 작정할 바에 대하여 미리 아신다는 측면에서 예지가 앞선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약간 복잡할 수 있지만 이런 이해들을 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그럼 성경이 모든이라는 말을 쓸 때는 어떤 의미인가? 앞에서 로마서 1013절과 디모데전서 24절의 예를 들었지만, 디모데전서 24절만 가지고 조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2 4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낱낱이라는 의미에서의 모든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든인가?

일단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한다면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으로부터 실패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는데, 그 구원에 실패가 있다면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이란 존재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의 뜻과 사랑은 모든 자를 위해 베풀었지만, 그 혜택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원을 모든 자에게 주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구원을 받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고, 그렇게 믿을 때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무한한 가치와 대가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 세상의 죄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로부터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엇 무엇을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하신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완전하신 분, 조금의 실수도 없으신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모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이지만, 그 결과는 믿는 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의 모든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의 모든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모든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전서 21절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받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이고, 그때의 의미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모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위가 없는 자, 낮은 자, 가난한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임금,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즉 차별 없이 구원을 베풀기 원하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누구든지 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택자 모든이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혹은 아무나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 가운데 자기 백성을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철저히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그것도 모든 자가 아니라 제한된 자들로서의 택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오셨고,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바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 그것도 특정한 대상인데 그들만을 위해 오셨고, 그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물론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기로 하시고 유기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아시지만,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가 없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증인으로 사는 삶은 모든 사람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이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오셨고, 그리고 죽으셨다면 지금도 일하시는 그 모든 성격은 자기 백성들만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즉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질 때 그 믿음을 붙드시는 분이 누구신가? 어려움 가운데서 소망을 잃을 위기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낙심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바로 지금도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번 택하신 자들은 그 구원에 있어 중도에 포기가 될 수 있는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것도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부터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는 죄악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막을 수는 없음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구원 받은 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길이지, 구원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나 죄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방해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는 겁니다. 야곱에게 간섭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건, 우리에게서 원인을 찾았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실이 우리에게는 한없는 감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마땅히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감사가 넘치셔야 할 것이고, 단지 감사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을 따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리로 더 나아가는,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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