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장 1-12절
첫 표적,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보이신 사건으로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그가 비록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지만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핵심 된 내용입니다.
간혹 본문을 통해 순종이라는 점을 주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첫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종과 관련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순종이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나아가 우리의 순종에 대한 자세는 누가복음 17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인 줄 아는 자로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은 예수님께서 첫 표적으로 물을 가지고 포도주로 변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1절과 2절을 보시면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되어 있지만 어떤 날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고 하신 날을 기준으로 삼을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오신 날을 기준으로 삼을지, 아니면 가나에 들어와 계신지를 기준으로 삼을지가 명확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날을 기준으로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가 있을 때 마침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은 분명히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마리아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통해 마리아의 친척 중 한 사람이 이 혼례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마리아가 신랑이나 신부 집안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소와 관련해 갈릴리 가나라는 동네는 요한복음 1장에서 활동하시던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갈릴리 가나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나사렛 근처에 있던 가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적지 않은 주석가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친척이든 가깝게 지내든 그나마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어렵지 않게 혼례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가나 지역 혼례 잔치 자리에 예수님이 청함을 받았고, 거기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는데, 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3절에 보시면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어미니 마리아가 이 혼례잔치에서 단지 손님으로만 온 것이 아니라 혼례잔치를 베푸는, 혹은 혼례잔치를 돕는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가 먼저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도주를 나르는 하인이 먼저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을 누구에게 고했느냐 하면 마리아에게 고했다는 점에서 단지 손님으로 이 혼례잔치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혼례잔치를 베푸는 집안의 친척 혹은 매우 가까운 사이로 혼례잔치를 베푸는 혹은 혼례잔치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예수께 이 사실을 말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하인으로 하여금 사오도록 하거나 친한 이웃집이 있다면 그 집에서 빌리도록 하거나 밤이 늦어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경우 충분하게 준비되지 못한 점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더 이상 포도주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께 말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 특히 5절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명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둔다면 아직까지 공생애 사역에서 기적을 베푼 일은 없었지만 기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가?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아이를 잉태하기 전 가브리엘이라는 천사를 통하여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 이하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물을 때 천사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동정녀 몸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되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에 대하여 천사가 그 지역에 있던 목동에게 알리시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고 하였는데, 마리아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눅2:19). 뿐만 아니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와 예물 또한 받았습니다(마2:11). 그리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에 대하여 말한 내용도 들었습니다. 시므온의 경우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라고 하였고, 안나의 경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2:38). 그리고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는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마리아는 바로 옆에서 확인하였습니다. 그 예가 열두 살 때의 일로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다가 예수가 없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성전에서 선생들과 묻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예수의 말을 듣는 자들이 그 지혜와 대답에 대하여 놀랍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생애 전 기적을 행했는지, 행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때가 되면 비록 육신으로는 자신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달리 말하면 마리아는 육신으로는 자신의 아들로 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드러내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얼핏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말에 대하여 거절한 것처럼 비춰집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을 보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이런 결과에 비춰 생각해 본다면 지금 4절에 나와야 할 가장 적절한 말은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습니다.”는 식의 말이 나와야 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4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3절에서 포도주가 없다고 말할 때 마리아의 생각과 4절처럼 말씀하신 예수님의 생각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인성을 따라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관계를 매우 존중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5:17). 따라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구보다 철저히, 그리고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율법을 범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이때가 예수님의 나이 12살 때의 일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난 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아들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찾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말하기 위하여 왔을 때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육신의 가족 관계를 무시한 것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인성으로는 분명 율법에 따라 누구보다도 부모에 대한 공경을 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 부분에 있어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성을 따라서는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육신이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이런 식의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넬 때 그들의 성별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해서 ‘여자여’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마15:28, 눅13:12, 22:57, 요4:21),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내용,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할 때 지금 예수님께서 4절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인성으로서가 아니라 신성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씀은 당신이 단지 육신의 어머니로서 나에게 요청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알았기에 그 사실이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할 때 육신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는가? 육신의 어머니로서의 권위와 상관없이 그렇게 말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보자면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육신적인 관계로 나아와 요청한 것이라면 그 일은 내가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기적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공생애 첫 표적을 나타내십니다. 기적을 보이셨다는 것은 그 일이 결코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는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를 찾는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분명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또 기적을 통해 그의 능력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그가 어떤 분이신지 나타나지만, 기적 자체만 주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기적을 베푸시는가? 기적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주목되지 않고 기적 자체만 주목된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다시 말해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왔지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가지고서 요청하는 바가 있지만, 단지 육신적인 관계로 나아와서 요청하는 것이라면, 기적 자체만 주목하게 되는 것으로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난 뒤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은 기적이 주목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도 보면 기적을 행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알아봤자 마리아와 물을 채우고 그것을 나른 하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다입니다. 기적만 주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는 말씀은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보다는 좀 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혹 ‘내 때’라는 말을 기적을 베푸실 때로 이해해서 본래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간청함을 통해 그 때를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굉장히 악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간청에 따라, 혹은 기도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가변하신 하나님이고,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단순히 기적 자체를 베풀 그런 때가 아니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기적은 베푸시겠지만 그것이 내 때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내용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라는 것은 어떤 때인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갈4:4)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종종 ‘때’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의 죽음을 염두 해 두시고서 말씀하실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의 모든 성취가 그의 생애에서의 순종과 그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종종 마지막 때를 말씀하실 경우가 있는데,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성취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을 베푼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성취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기적 자체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시고 난 뒤 종종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기적 자체가 주목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겁니다. 기적은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기적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성취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종종 ‘때’라는 말로 표현하셨는데, 이런 성취와 관련된 일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상과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모든 사람이 이 일을 알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집의 하인들, 그리고 제자들만 이 사건을 목도한 자들입니다. 기적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기 위한 사건은 처음부터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이 일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때는 언제냐? 마지막 때입니다. 심판 때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때는 마지막 때인데, 그때는 그가 창조주요, 그가 구원자요, 그가 심판자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자면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으로서 여자라고 부르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신적인 생각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충분히 이해를 했는지 5절에서 하인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만약 4절의 말씀을 기적을 베풀지 않겠다는 뜻으로만 이해했다면 5절과 같이 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든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요청합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지길 소원하는 마음으로 기적을 바라고 있었지만, 마리아가 생각하는 때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시자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집 하인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이릅니다.
6절에 보시면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돌항아리의 크기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용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결 예식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섯 돌항아리를 가득 채울 것을 하인들에게 말씀합니다. 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돌항아리 여섯 개 중 초대받은 손님들이 쓴 물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잔치에 참여한 손님이 손을 씻기 위해서 항아리에 있던 물을 쓴다고 생각할 때 어느 정도 물을 사용한 항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용한 물을 모두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결코 거짓 없는 사실임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인들이 채운 것은 틀림없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정도로 아귀까지 채운 물이기 때문에 이후 일어날 사건이 결코 거짓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을 다 채우고 난 뒤 예수님은 이렇게 명하십니다. 8절을 보시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가장 먼저 연회장에게 주어 맛보게끔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잔치를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위하여 모든 일을 관리하는 연회장이라고 할 때 포도주의 맛이 어떠한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때문에 이전과 비교해서 그 맛이 얼마나 더 탁월한지 알 수 있는 사람에게 그 맛을 먼저 보게 하신 것입니다.
포도주의 맛을 본 연회장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9절과 10절을 보시면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기적 자체를 주목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입니다. 기적만 남고 기적을 통해 알리시는 바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기적만 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육신의 문제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9절에 보면 ‘물로 된 포도주’라고 되어 있는데,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다른 첨가물을 더하여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는 물이지만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연회장의 평가는 보통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 그러나 이때 취했다는 것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라는 의미보다는 어느 정도 맛을 음미하는 것이 둔하게 되었을 때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때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까지 먹은 포도주보다 질 좋고 맛도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11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표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비록 인성을 취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지만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에 의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물론 사람도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물과 여러 재료들을 통해 포도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아무런 첨가물 없이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물이 포도주가 되는 법은 없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전에 맛보지 못한 포도주를 내놓으셨습니다. 최상의 포도주를 내놓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포도주를 내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를 이미 충분히 맛보고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포도주를 내놓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확인하게 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는 무에서 유와 다를 바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바로 이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만 알리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이 때를 위해서임을 알리시는데, 그 때는 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요, 승천하시고 난 뒤 때가 되면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그 때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는데, 구원자라는 말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생명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변화가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생명을 잃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받으면,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근본적인 어떤 변화가 있으며, 그때부터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물론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의 특징이 10절에서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좋은 포도주라는 특징도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 좋은 포도주요, 비교할 수 없는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생명이 그렇습니다. 단지 육신적인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더 좋은 생명이고, 육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심지어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육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을 주시되 그 생명이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그의 이름에서 알려진 것처럼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이 일을 위해 이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되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까지 있다고 알리시는 겁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겨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은혜로운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잡아주고 힘을 주며 위로하시는 역사를 통해 풍성한 사람을 살게 될 것이라고 알리시는 겁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표적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알리시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욱 풍성하도록 주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이심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되, 더 좋은 포도주, 비교할 수 없는 포도주를 통해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시는 겁니다.
물론 중간에 하인들의 순종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다면 이런 역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큰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종을 통해 무엇을 더하시겠습니까? 오히려 순종을 통해 무엇을 더하신 것처럼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고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오늘 본문은 처음 표적을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에게만 공개하셨습니다. 특히 11절에서 첫 표적을 통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할 때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지만(요1:41,45) 이 사건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만이 창조주요 그만이 구원자이심을 재차 확인학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명을 주신 자에게 그 생명이 더 풍성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역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조금 성장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믿음이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금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고 난 뒤 성령이 사도들 위에 임하심으로 놀라운 변화를 실제로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모습은 아닙니다. 실수하기도 하고,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도일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졌다면 그 생명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면 내실수록 저들에게 주어진 생명 역시 더욱 풍성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는 만큼 우리의 믿음도 자라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기록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가 나타내고자 하시는 영광이 무엇인지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 믿음의 자라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어지는 13절에서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는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보면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여러 날 계시지 않은 이유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행보는 인성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드릴 목적으로, 신성을 따라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목적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신 것도 그렇고, 거기서 여러 날 계시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딜 가든 예수님은 인성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릴 목적으로 있으시고, 신성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있으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고, 때를 따라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고 할 때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인생은 생명을 얻었으나 헛되게 허비하는 생명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는 오직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리고 더욱 풍성하게 얻고 있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