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6장 4-6절
나는 인애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저들에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모든 책망과 징계의 목적은 호세아 5장 15절 말씀에 있습니다. 즉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호세아 6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런 하나님이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나아가 여호와를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난의 현장, 징계와 진노의 현장 앞에서 한편으로는 낙심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한 것처럼 내비치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야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잘못을 경감시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과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반응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 하면 하나님 편에서 너무 심하게 다루시는 것 아닌가 하는 것으로 따지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불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풀어 설명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징계하는 것이 과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자비를 베풀면 베풀수록 너희의 패역함은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호세아서를 보면 책망과 징계를 말씀하시는 바가 많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속의 말씀 혹은 위로의 말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실 때 저들이 잘못했다고 해서 일괄적으로 책망과 징계만을 말씀하셨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책망과 징계의 말씀을 하시면 반드시 약속과 위로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약속의 말씀, 위로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더란 겁니다.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면 그 은혜와 자비에 대하여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저들은 더욱 패역한 길로만 가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의 한탄이 있는 겁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그런데 지난주 본문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면 그 분위기가 갑작스레 변한 것처럼 보입니다. 6장 1절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할 뒤 3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로 오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는 말로 분위기가 갑작스레 변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앞서 한편으로는 이런 자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저런 자들이 있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전체, 나아가 남유다 전체를 향해 말씀하시지만 그 안에 두 대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즉 북이스라엘 안에서 함께 타락했지만 타락 한 자들 안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책망과 징계의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호세아 6장 1절에서 3절을 말씀하셨다면, 책망과 징계의 말씀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곧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도 하시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는 같은 대상을 향해 말씀한다기보다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는 자들을 향해,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6장 1절에서 3절에 합당한 자들도 이 말씀을 듣는 대상으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절에서 3절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 바로 그들에게 이 말씀을 주고 계신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네게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전적으로 불치의 상태에 있고,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저들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는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한다는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능력이 모자라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해 봐도 네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4절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너희는 그 은혜를 비웃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은혜를 베풀었지만 더욱 그 은혜를 하찮게 여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고 말씀하시는데, 이 표현을 잘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시면서 저들의 죄악을 열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인애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이런 죄, 저런 죄를 지어서 소망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으로 지금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법으로만 정의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이라고 할 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 혹은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죄를 정의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에서 죄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니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으로만 죄를 정의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도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이란 이만큼인데, 이만큼에서 부족하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4장으로 가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인과 아벨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데, 그 일 후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 6절과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다. 즉 선의 부재가 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북이스라엘, 나아가 남유다를 행해 말씀하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다. 너희의 선이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다. 인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아침 구름과 같고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 참된 선이 전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들의 죄로 지적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밭주인이 곡식을 거둘 때 모퉁이까지 다 거두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삭을 거두어서 가져가다가 떨어지면 떨어진 것을 다시 주워 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 거류민을 생각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인애요, 자비요, 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선의 부재가 죄라는 것입니다. 즉 레위기 19장으로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퉁이의 곡식을 거두는 것도 죄요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도 죄입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남기지 않는 것도 죄요 떨어진 포도를 줍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자기 땅에서 자기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 결과물을 얻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 가운데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생각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 자비가 이런 방식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 자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의 인내와 긍휼과 자비로 나타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을 죄라고 여깁니다. 오늘날 레위기 19장과 같은 정신으로 살지 않아도 죄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선의 부재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정신에 있어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안에는 이런 인애가 없었습니다. 인애처럼 가장할 뿐 참된 인애가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침 구름이나 이슬과 같다고 하십니다. 잠시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금세 사라져 없어져 버리더란 것입니다. 겉으로는 선인 것처럼 하지만 그들의 속은 선을 가장하여 악을 행하는 그런 일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저들을 향하여 심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이유 없이 저들을 책망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유 없이 저들을 징계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유 없이 저들을 심판하시는 게 아닙니다. 저들의 죄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으로 그들을 치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목소리를 자신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두에 하나님의 책망의 목소리, 하나님의 징계의 목소리, 하나님의 심판의 목소리가 자신들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저들의 논리는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 징계하신다, 심판하신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엄중한 심판의 목소리보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음성, 즉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수록 더더욱 책망의 목소리, 징계의 목소리, 심판의 목소리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하신 바대로 행하시기에 그들을 치고 그들을 죽였다는 이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있게 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있으라 하매 있게 되는 역사는 창조만이 아니라 심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말씀하신 그대로 됩니다. 결코 헛된 말씀이 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치고 죽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내 심판이 빛처럼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까지 들어 있느냐 하면 심판의 정당성까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충분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빛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그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려졌지만 고의적으로 빛을 꺼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의 빛을 저들에게 보여주시는 것 외에 남은 것이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구원의 빛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북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구원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까? 빛이신 말씀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말씀으로부터 자신의 생활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의 빛을 비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빛이 비춰지지 않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있지만,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징계의 말씀도 있습니다. 심지어 심판의 말씀도 있습니다. 비록 책망과 징계와 심판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어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4절에서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여기서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제사보다 인애를 하는 것으로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제사는 무엇입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명하셨습니다. 그런 제사를 어떻게 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 때는 저들의 제사가 율법이 명한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그럼 하나님께서 왜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는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인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드리지만 자비가 없기 때문이요, 무수한 제물을 드리지만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는 드리면서 그에 합당한 열매가 전혀 없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북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명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게 아니라,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형식만 있을 뿐 예수님께서 말한 성령과 진리의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니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돌아볼 줄 몰랐다는 것이요,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사를 드리면 희생제물을 드리는데, 거기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형식적으로 나아온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과 함께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덧붙여 말씀하시는데,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애가 열매라면 인애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기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아야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아는 지식을 신앙으로, 그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인애를 경건의 열매로 표현할 수 있는데, 만약 신앙만 있고 경건의 열매가 전혀 없다면 그런 신앙은 야고보서의 표현처럼 죽은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몸과 같습니다(약2:26) 반대로 신앙이 없이 열매만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경건의 열매는 반드시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경건의 열매, 인애와 자비와 선이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까? 거기서 하나님 지식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경건의 열매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제물을 드리면서도 하나님 지식도 배우지 못하고,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열매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은 드리지만 형식적으로 드릴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의 말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내용 안에서 두 번이나 오늘 본문 호세아 6장 3절의 내용을 인용하시는데, 우선 마태복음 9장 13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내용 속에서 인용한 말씀인데,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실 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은 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가 있다고 하시면서 호세아의 본문을 인용하십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12장 7절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내용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는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는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이라 비판하였는데, 이때 말씀하시는 것이 호세아 6장의 본문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 스스로 분리된 자로 여길 만큼 구별되고자 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율법을 해석했느냐?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지식에 있어 올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결여되어 나타났는가? 인애입니다. 긍휼이요, 자비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기준이 아니라 율법을 자신들 마음대로 해석하여 정해놓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할 수 있는가?”로 비판했던 겁니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의인이었으며, 의인으로서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지식의 부재는 하나님의 뜻의 부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의 부재는 결국 이웃 사랑에 있어 선의 부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그러나 모든 제사를 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적인 제사, 하나님 지식이 없는 제사, 경건이 없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역으로 성령과 진리가 있는 예배, 하나님 지식이 있는 예배, 그리고 경건이 있는 예배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비와 긍휼과 인애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지식이 없다보니 그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수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하나님 지식이 없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인애라는 열매가 없는 것에 대해서도 책망하셨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인애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 지식이 없는 결과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서를 보면 자주 열매가 없다는 것으로 책망하실 때가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열매가 없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도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애를 원한다고 하실 때는 인애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 지식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지식 없는 인애가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 차원의 내용이 아닙니다. 인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지식에 근거한 경건의 열매로서의 인애요, 자비요,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호세아 6장 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힘써 여호와 알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지식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경건의 열매라는 것을 안다면 열매 없음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 지식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열매를 맺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레위기 19장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누가 자신을 것을 주울 때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을 죄라고 여깁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회의 법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율법 안에 의식법, 재판법, 도덕법이 있다고 할 때 의식법과 재판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러나 의식법이나 재판법은 도덕법 안에서 그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0-42)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열매로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는 많이 부족한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 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의 부재도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도록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 높은 기준을 내가 아니라, 나대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이 놀랍고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에 근거하여 두려움 가운데서 성취하신 바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감사와 감격으로 주께서 성취하신 바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을 향해 가는 자들과 우리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지상에서는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보장받은 자들로서 영생을 향해 나아간다고 할 때 우리의 마땅한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열매가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정당한 하나님 지식과 함께 그 지식에 합당한 열매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특별히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래서 말씀을 따라서만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