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6장 7-11절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심판하신다고 하실 때는 결코 갑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에 앞서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난 뒤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때도 한번만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회개해야 한다,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난 뒤 그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심판을 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그리고 그의 심판이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내가 네게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조금만 베푼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에 앞서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할 것을 권하셨고, 회개하지 않을 때 책망의 말씀도 하셨고, 때로는 징계를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들이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완악해져 갔던 것이 북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바가 제사가 아니라 인애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매우 부요했기 때문에 어쩌면 수없이 많은 제물을 가져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제사는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는 않았습니다. 형석적인 제사요, 외식적인 번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을 수밖에 없었고, 그 지식에 따른 열매로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사보다는 인애를,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한다고 하실 때 모든 제사, 모든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와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예배를 명하셨기 때문에 명하신 바를 기뻐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특별히 명한 바에 따라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알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도 알리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의 요약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길 원하시고, 또한 그 사랑이 이웃에게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이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보니 인애와 같은 열매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오늘 본문에서는 가장 인애가 있어야 제사장에게서조차 인애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가장 인애가 있어야 제사장조차 인애를 찾아볼 수 없다면 지금 북이스라엘 사회는 어떠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난주 본문의 내용 속에서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만이 아니라 유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경우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순수한 예배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대하여 북이스라엘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예배가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거짓 예배로 돌아서기에 하나님은 “...유다야 내게 네게 어떻게 하랴...”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시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6절과 연결해서 보자면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지만 너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처럼’이라는 말에 대하여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래 아담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중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의미하는 바는 똑같습니다. 즉 지금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경우 하나님을 남편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아내로 표현하는데, 결혼을 하게 되면 서약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서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처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야하는데, 북이스라엘은 호세아서 첫 장에서부터 말씀하신 것처럼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그래서 결혼을 파괴해 버리고 만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사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번제를 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섬겼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시작인 여로보암 1세 때 예루살렘이 아닌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웠는데, 거기에 금송아지를 두면서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이 아니었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방의 우상이 들어오게 될 정도로 부패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형식과 외식으로만 남아 있을 뿐 하나님이 명하신 바와는 거리가 멀었던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거기에서’ 나를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즉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를 원하지 않고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지만, 너희는 제사를 드리는 그곳에서 나를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몸은 제사를 드리는 곳에 와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 지식에 근거한 그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왔지만, 그래서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그 예배가 형식적일 수 있습니다. 몸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찬송하지만 하나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결국 어떤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호세아 8장 1절에 보면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을 어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달리 표현하면 율법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반역할 때 결국 그들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는 자리,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리로 결과 된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서, 다시 말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명하셨다면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이 나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비록 책망과 징계, 그리고 심판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가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식에 근거해서 인애와 같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 7절을 보시면 저들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할 때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아담이라는 말의 뜻인 사람으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전자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단순히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모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언급하는 것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북이스라엘의 죄는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김으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할 만큼 그런 심각함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의 경우는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말씀합니다. 왜 모든 인류가 타락했는가?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요,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타락은 모든 인류의 타락이고, 그의 넘어짐은 모든 인류의 넘어짐인 겁니다. 그런 아담이 타락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지금 북이스라엘의 죄는 아담의 타락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각함의 증거로 말하는 것이 8절과 9절인데, 거기서 하나님은 특별히 제사장과 관련해서 언급을 합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학자들에 따라 이 길르앗을 도피성이 있는 길르앗 라못으로, 혹은 길르앗의 중요 성읍인 미스바로, 혹은 길르앗 전체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길르앗 라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어 나오는 세겜도 도피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특별히 제사장과 관련해서 언급하면서 8절에서는 길르앗을, 9절에서는 세겜을 언급하고 있는데, 도피성을 의식한 지역으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피성은 어떤 곳입니까?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성읍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살자의 가장 가까운 형제나 친지로부터 피의 보복을 피해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피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성읍이 도피성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빠져 사람이 맞아 죽었다면 고의가 아니라 실수요, 부지중에 살인하게 된 경우입니다. 그때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형제나 친지로부터 피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성읍이 도피성입니다. 이런 의도에서 마련되었기 때문에 도피성의 위치는 실수로 살인한 자가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나안 지경 어느 곳에서라도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선정되었는데, 요단 동편에 셋 그리고 요단 서편에 셋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를 그곳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길르앗과 세겜 지역은 어떤 지역보다 긍휼과 자비, 인애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가 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고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살인한 자로 하여금 피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긍휼과 자비, 인애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악을 행하는지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피로 더럽혀지고, 피에 의해 점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겜 길에서는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 무리가 살인하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제사장 무리, 마치 제사장들이 하나라도 된 것처럼 일심으로 살인하는 그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8절과 9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누구보다 긍휼과 자비, 인애를 보여야 할 제사장들이 반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요,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보호하던 성읍이 이제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길르앗과 세겜 성읍만 그러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피성은 여섯 군데 있습니다. 지금 두 곳만 언급했지만 사실 다른 곳도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북이스라엘만 말하지 않고 남유다까지 말하고 있다고 할 때 남유다 지역에 속한 도피성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4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여기서는 좀 더 강한 어조로 인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들조차 강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백성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그들이 살고 있는 도피성의 예로 북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 대하여 칼빈의 경우는 제사장들이 공개적인 살인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석합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그만큼 악한 짓을 행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정당하게 가르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죽게 만들고 있으며,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보다 빛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그들은 전혀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영적으로 죽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피성으로 마련한 곳은 더 이상 도피성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와 인애의 장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과 13절을 읽어드리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위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입니다. 이 성전청결사건은 복음서 안에서 두 번 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번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이고 또 한번은 공생애를 마칠 때쯤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을 행하셨는가? 성전이신 자신처럼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때 몸 된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의 물건을 엎으셨지만 실상은 성전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거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청결사건을 행하셨던 겁니다.
성전은 말 그대로 거룩한 집입니다. 구약의 이해로 하자면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만나시며,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며,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 마디로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그곳은 매매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매매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멀리서 희생제물을 가지고 오는 수고를 덜어준다는 등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율법 안에서 어느 정도 허용되기도 했습니다(신14:24-26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예배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원리를 따라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이 형식적인 예배일 뿐, 성령과 진리의 예배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그런 예배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고, 그들의 물건을 다 뒤엎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이 마치 강도의 소굴과 같다고 하실 때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신 것인데, 거기 보면 11절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7:8-10) 한 마디로 강도의 소굴이란 악한 열매로만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무엇보다 종교지도자들이 강도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구약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 북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조차 그러했다면 우리 시대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집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사야 56장 7절을 인용하신 것인데, 6절과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도하는 집이란 무엇보다 여호와와의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연합 안에서 그를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의 종이 되고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것, 이것이 기도하는 집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기도하는 집으로 있습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살 때 우리 몸을 기도하는 집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오히려 악한 열매만을 맺는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알기를 포기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소망하는 그 자리만이 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알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마음으로 하나님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우선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하면서 음행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8절과 9절이 제사장과 특별히 도피성이 있는 성읍에 대하여 말했다면, 10절에서는 북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증한 일이란 에브라임이 음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음행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우상숭배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예배가 아니라 더럽고 타락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들이 타락했는가 할 때는 무엇보다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신상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동조한 제사장들입니다. 즉 여로보암 1세로부터 시작해서 여로보암 2세가 되기까지 북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들 좋은 대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특히 8절과 9절에서 제사장에 대한 언급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지금 북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숭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남유다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데, 11절입니다.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간단히 말하면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심각함이 있는데,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순수한 예배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처음부터 순수한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거짓된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는 순수한 예배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은 그만큼 북이스라엘의 타락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북이스라엘의 심판이 정해진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추수한다고 되어 있어서 어떤 수확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심판이 언제 있게 되는가?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는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키려고 하시지만, 저들은 돌이키기는커녕 더더욱 북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추수할 일을 정하셨다,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호세아의 경우 주로 북이스라엘을 대상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남유다에 대한 언급을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그 표지를 버릴 때 그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순하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목회자가 바뀌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순수성을 버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왜 이런 순수성을 버리는가? 사람에게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패한 본성은 결국 하나님 지식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식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예배가 타락하게 되는 것이고, 예배가 타락함으로 더더욱 하나님 지식은 정당한 내용으로 들려질 수 없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 지식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인애라는 경건의 열매도 없었고, 그 심각성을 제사장의 타락으로 설명할 정도입니다. 특히 도피성이 있는 두 성읍을 언급하면서 가장 인애가 넘쳐야 할 고을이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 되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원인입니까? 하나님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지식에 근거해 가장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인애가 있어야 할 교회가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의 교회라고 한다면 그것보다 한탄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전이라면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정당한 하나님 지식에 따른 긍휼과 자비와 인애가 넘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열매를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