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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211010설교 / 호세아9장1-6절 / 이방사람처럼기뻐뛰놀지말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10.10|조회수47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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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9장 1-6절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지식을 버릴 때 어떤 모습으로까지 전락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서를 통해 영적 간음, 다시 말해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할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매우 심각한 죄로 있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가? 철저히 자신들의 유익, 그것도 지상에서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알리십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폐하기까지 하는, 한 마디로 사사 시대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북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데, 먼저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역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노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노는가? 2절에 의하면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들은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작 마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많을 때, 그리고 술틀로부터 나오는 것이 많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던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의식주의 풍성함으로 이스라엘은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노는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의식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마6:31-32),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떤가? 의식주로 인해 염려하고 의식주로 인해 기뻐하는 그런 모습이더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의식주로 기뻐 뛰놀면서 저들이 음행하여 하나님을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로 염려하고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향해 그 마음을 쏟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세아 2장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살핀 바가 있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2:8) 모든 의식주를 누가 주시는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얼마나 하나님 지식이 없었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신들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여 그 일부를 그들에게 바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은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기뻐 뛰놀지만, 지금은 기뻐 뛰놀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과 음행하는 자로 있지만, 너희에 대한 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기뻐 뛰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죄를 지으면서도 괜찮은 줄 압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죄에 익숙해지고, 그래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닌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지난번에도 괜찮았기 때문에 지금도 괜찮은 것인 줄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참아주시는 것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잠시 잠깐 참으시는 것이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계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가만히 계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공의로 행하시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죄에 대하여 당장 심판하신다면 누가 이 땅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십니다. 참고 또 참으십니다.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시고 관용하신다는 겁니다.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부른 자들에게는 참으시는 것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선지자를 보내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떤가?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래서 율법과 상관없이 사고하는, 그저 의식주만 풍성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더란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2절의 말씀을, 나아가 3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는 분은 누구시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6:26)라고 말씀하시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마6:28,30)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0-32)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기르시느냐?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떤 분이냐? 단순히 창조주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외아들까지 주시면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타작 마당이나 술툴이 그들을 기르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시는가? 새 포도주가 떨어지게 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인시키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흉년이 들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어 나오는 말씀이 저들이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땅이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난 뒤 대략 400년 후에 이스라엘이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거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타작 마당이나 술틀의 풍성함으로 길러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빼앗으심으로, 특별히 주변에 있던 나라를 들어 그들을 치게 하심으로 그것들이 너희를 기르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실 때 그것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 1절의 내용으로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이십니다. 하나님이 최고 상급이라는 것은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고, 의식주 때문에 기뻐합니다. 실제로 물질적으로 좀 없다가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습니까? 물질이 있다가 없어지면 그것으로 인해 염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염려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있고,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물질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주신 것을 거둬 가십니다. 거둬 가심으로 의지했던 것이 의지의 대상이 아님을 알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의 내용 속에서 하나님만이 의지의 대상임을 배우셔야 합니다. 물질이 우리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른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 인식해야 합니다.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시면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북이스라엘처럼 여전히 의식주를 의지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면 북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 모든 것을 거둬 가시더라도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아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당장 진노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내버려두시는 법은 없습니다. 자기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외아들조차 주시면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셨기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릴 때 그것을 고치고 치료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에게로 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거둬 가기도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거둬 가시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3절에서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애굽과 관련해 실제로 애굽으로 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이 애굽을 비유로 보고 애굽의 종으로 있던 것처럼 그렇게 앗수르의 종이 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셔서 종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집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저들의 아버지로 있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너희가 이방인과 같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방인처럼 취급할 것이라는 그런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는다는 것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 이제는 더러운 이방인들 속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르셨지만 그들이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도록, 그들과 혼합되어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불변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지상의 나라는 빼앗길지라도 천상의 나라는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이는 나라에서는 쫓겨날지라도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는 쫓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때문에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그때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 일인가를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그때도 늦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안일한 마음을 가진다면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도리어 늦어버린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때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자세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4절을 보시면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출애굽기 29장, 레위기 23장에 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붓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는데(출29:40, 레23:13), 2절에서 새 포도주가 떨어지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면서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전제로 포도주를 부어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가? 전제는 반드시 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인데,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면 제물에 대하여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라고 번역합니다. 즉 애곡한다는 것은 상중에 있다는 것이고, 율법은 초상집에 들어가는 자 그리고 초상집에 있는 자가 모두 7일 동안 부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조차 모두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데(민19:14-15), 저들이 가지고 온 제물이 애곡하는 자의 떡, 초상집에서 내놓는 떡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물을 먹는 자는 더러워진다고 말씀합니다. 부정한 제물이기 때문에 그 제물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가? 없습니다. 거룩하지 않고 부정한 제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 여호와의 집에 드릴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왜 4절의 말씀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드리는 희생제물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드리는 제물은 내가 받을만한 제물이 아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향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11-15)

수없이 많은 제물을 가지고 올 때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한 제사장은 그 제물을 기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는 게 아닙니다. 그 제물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가? 나아가 그 제물을 드리는 자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가? 그런데 이사야 시대 유다의 모습은 어떠한가?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강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나아오는데, 강탈한 것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있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가?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지고 온 들 하나님은 기뻐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제물은 율법이 명한 대로 거룩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점과 흠이 없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또한 드리는 자도 거룩한 자로 드려야 합니다. 정결하게 하고서 드려야 합니다. 온갖 악을 행하면서 그저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결함이 있다면 회개 하고서, 정결하게 하고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전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수없이 많은 제물을 드리고 있다는 것으로만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의 제물은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니라, 너희가 먹는 데만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표현처럼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방금 읽은 이사야서에서도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을 가증히 여긴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르지 않는 말씀입니다. 명절 곧 여호와의 절기의 날이 올지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여호와의 절기의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물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나아온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물을,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받으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주님의 날이라고 합니다. 모든 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날이지만 특별히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구약의 안식일이라는 날까지 폐하시고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 주일이라고 말하는 날 모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날보다 이 날은 더욱 주의 영광을 위한 날로 삼아야 합니다.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내용처럼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이 날 경건에 더욱 힘쓰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내용처럼 사랑과 질서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날도 해야 하지만 주의 날만큼은 더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께 하듯, 주께 하듯 사람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날, 얼마나 주의 영광을 위한 날로 하루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가지고 나오고 있진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관없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만 안심을 하면서 안일하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때 영은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란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인데, 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이란 말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육체적인 방식, 물질적인 방식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수없이 많은 제물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님을 그렇게만 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4장을 잘 살펴보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고 할 때 구약의 모든 의식적인 요소가 제거된다는 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는데, 그 규범은 무엇인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말씀이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과, 좀 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 아래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있는 겁니다.

 

오늘날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뜨거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뜨거움은 진리가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있는 말씀 두 부분만 읽어드리면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18:26),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왕상18:28) 외적으로만 보자면 굉장한 열심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저들에 비해 종교적 열심으로 보자면 미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저들처럼 제단 주위에 뛰놀지도 않고, 큰 소리로 부르지도 않고, 칼과 창으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도 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으로만 보자면 저들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이 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뜨거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내 마음이 뜨겁다고 하는데, 정작 말씀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뜨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예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의 말씀이 명하는 것 안에서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도 있고, 하나님을 위한 제단도 있고, 또 제단에서 드리는 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이었고, 그것을 드리는 그들도 부정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예배요, 진리가 없는 예배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고 있는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절과 같이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여기서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라는 말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애쓰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그들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는 자들이 있게 됩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 피할 목적으로 애굽으로 가지만 하나님은 언제까지 그들을 거기에 두시는가? 장사될 때까지 그들을 거기에 두십니다. 그래서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 즉 애굽 안에 있는 도시 이름인데, 그곳에서 그들이 장사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쫓겨나 애굽이 자신의 매장지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무엇과 비교해 볼 수 있느냐?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갈 때 가져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딘들 묻힌다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자신의 해골이라도 가나안 땅에 묻힐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느냐? 가나안은 어떤 면에서 천국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비록 자신은 죽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런 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위해 요셉은 자신의 해골이라도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땅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만큼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고,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동안만 유랑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그래서 황폐하고 경작하지 않는 땅으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모든 소망을 차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말씀이 다름 아닌 영적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는 쫓겨날지라도 그 가나안을 통해 소망하도록 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쫓겨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11장으로 가시면 8절에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물론 호세아의 많은 부분이 저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으로 가득하지만, 이런 말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서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라고 말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진노는 긍휼을 위한 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만 기쁨을 찾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방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거두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고백을 받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하나님은 이 고백을 위하여 주시기도 하시고 주신 것을 거두어 가기도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든, 주시지 않든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 자신만을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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