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10장 4-8절
벧아웬 송아지로 인해 두려워하리라
북이스라엘의 심각한 죄악 가운데 하나는 혼합주의 신앙, 즉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그러나 하나님보다 이방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복을 주셨지만 그것으로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더 많이 만들고, 주상을 아름답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일에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저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향한 열심을 가지는가? 이미 호세아 2장 8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외적인 복을 주시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방신이 그들을 복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향한 열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만의 신앙을 버리고 혼합주의 신앙으로 만들어 버렸던 겁니다.
이런 두 마음의 심각성은 그나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으로 안심하려고 하는 마음인데, 사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의 마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인데, 여기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만이 아니라 전체를 부족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의 일부분만 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결코 마음이 나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럼 왜 북이스라엘의 마음이 나눠졌는가? 두 마음을 품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가?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북이스라엘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아니라 명하지 않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 예배를 거부하고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워 거기에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섬기게 되면서부터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마도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때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옴으로 아론을 부추겨 송아지 신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아론은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 즉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향할 뿐이었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에서도 밝힌 것처럼 우상을 금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단지 이방신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혹 하나님 자신을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대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여 형상을 짓지만 그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송아지 신상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32:1) 이것이 백성들의 요청이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의 시작부터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행한 모든 것은 사실 불법이요, 거짓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참된 예배라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이 있었지만 참된 맹세가 아니라 거짓된 맹세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저들을 향하여 그 부분을 생각하도록 하시는데, 우선 4절을 보시면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문에서는 ‘헛된’이라는 말이 없지만 이어 나오는 거짓 맹세라는 부분 때문에 저들의 말이 헛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벧엘과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신상 앞에 가서 많은 말들을 합니다. 때로는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많은 말들도 다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운다고 할 때 언약의 핵심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되 전적인 은혜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게 은혜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바로 언약을 지키라는 것, 율법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고 율법을 준행해야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너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언약을 세우지만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만 그 말이 헛된 말인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인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맹세한 바에 대하여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만하였던 겁니다. 이런 내용은 단순하게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면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이라고 맹세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면 그런 맹세를 언제 했는냐는 식으로 돌이키지 않는 저들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지난주 본문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지금 북이스라엘은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도 섬기지만 이방신도 섬기는 자들로 있습니다. 여로보암 1세의 경우 백성의 마음이 성전을 향하여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였다면, 아합 시대 때는 수없이 많은 우상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아합에 대하여 그 이전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말하면서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특히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으면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상까지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왕상16:30-33), 이방신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하나님 신앙을 완전히 버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난주 본문에서 열매가 많으면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할 때 단지 이방신을 위한 주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벧엘과 단에 세워진 소위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있는 그 금송아지 신상에 대해서는 제외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여겨집니다. 즉 땅이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벧엘과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신상과 관련해서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상 앞에 가서 외적인 복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면 사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금하신 바 되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듣지 않고 저주를 내리시는 게 더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들어주시는 것처럼 하는 외형을 띠기도 합니다. 실제로 여로보암 2세 때는 굉장히 부하고 강한 나라의 모습을 가지기도 했던 겁니다. 그리고 외적 복을 허락해 주시면 좀 더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다고 맹세한 것에 대하여 실제로 복을 받으면 어떤 모습으로 섬기는가? 땅이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금송아지 모양으로 된 그 주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여기는 바로 그 금송아지 신상을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으로 금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원문에는 ‘헛된’이라는 말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들이 말을 낸다고 할 때 선지자의 의도는 저들 편에서는 진실하고 거짓 없는 말을 낸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한 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겠다고 할 때 실제로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 입장에서는 맹세한 바에 대하여 거짓 없이 진실하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신상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그것을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그 대상을 향한 맹세와 언약은 거짓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송아지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우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헛된 말이요, 거짓 맹세일 뿐이란 겁니다.
여러분, 아무리 진심어린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쪽이라면, 그 방향이 나타난 하나님의 뜻, 기록된 말씀과 상관없는 방향이라면 그 진심은 헛된 진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진심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진심이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이면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세워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 앞에서 맹세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맹세한 바대로 실행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짓된 예배에 무슨 참된 맹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모든 맹세는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 때 자기를 위한 것으로 만든 것처럼 자기를 위한 맹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맹세를 실행하는 것 역시 자기를 위한 것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무엇인가? 밭이랑에 돋는 독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밭이랑이라는 말은 밭의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둑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통해 밭을 잘 일구어 놓았고 거기에 좋은 씨앗을 뿌려 자라기만을 바라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열매를 맺히길 바라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는 자의 열매는 밭이랑에 돋는 독초와 같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수고하여 잘 일궈놓은 밭에서 열매를 기다리지만 무성하게 자라는 것은 독초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외적으로는 잘 일궈놓은 밭의 모양이지만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독초 외에는 없다, 즉 그들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 같지만 독초처럼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결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앞서도 언급했지만 외적인 복을 달라고 했을 때 외적인 복을 주시면 그 외적인 복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독초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호세아 13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왜 분노하므로 왕을 줍니까? 저들이 왕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그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자신들의 진정한 왕임을 거부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왕들이 어떤 길을 걷느냐? 하나님의 법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상관없이 갔습니다. 신명기 17장 18절과 19절에서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런 왕이 드물더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그 응답 자체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왕을 세워 왕위에 오르게 되면 율법서의 등사본을 기록해서 왕이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고 배우고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말씀을 배우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무늬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종교심만 가지고 있는, 그런데 그런 종교심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일 뿐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 없으면 위장된 종교의 모습을 가질 뿐입니다. 거기서 무슨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만 위장할 뿐 이미 그들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금하고 있는 것으로 열매 맺을 뿐입니다.
때문에 진리 없는 진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 없는 열심을 주의해야 합니다. 진심과 열심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없는 것은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으로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를 때만 진리에 합당한 것으로 있습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벧아웬은 벧엘에 대한 명칭입니다. 그러나 벧아웬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부르는 것인데, 벧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 벧엘을 벧아웬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집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신상만 있을 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벧엘을 벧아웬으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고 할 때 4절의 일이 특별히 벧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일이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왜 두려워하라고 하느냐 할 때 이후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선 5절 나머지 부분을 보면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백성도, 제사장고 슬퍼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의 영광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관련해서는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영광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을 두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데, 도대체 그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6절을 보시면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그러니까 송아지가 앗수르로 옮겨지는 그것을 그의 영광이 떠나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면 지금 북이스라엘이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벧엘에 세워진 금송아지 신상입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신상이 어디로 옮겨지느냐? 앗수르로 옮겨집니다. 북이스라엘이 영광스럽게 생각한 그 금송아지가 앗수르로 옮겨지는 것을 통해 백성들이 슬퍼하고 제사장들도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송아지를 금으로 만든 것은 어떤 면에서 그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거기에 영광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외적인 것으로 영광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외적으로 화려한 것을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적인 것으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은 사람에 의해 증가되거나 감소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마5:16) 본유적 영광에 있어서는 증가되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대상16:29). 그것을 위해 무엇을 주셨는가? 자신의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또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율법 혹은 말씀을 통해 알리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벗어난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서 이런 기도를 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의 말씀으로 하자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는 내용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앞서 무엇이 있느냐?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그의 부활과 승천을 통한 모든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죽음에 앞서 성육신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 그리고 부활과 승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비하의 신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승귀의 신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이라고 할 때 낮아지는 것보다는 높아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낮아지는 것은 영광스럽지 못한 것이요, 높아지는 것, 화려한 것, 빛이 나는 것만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 말씀 때문에 낮아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의 말씀 때문에 죽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인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조롱과 채찍질을 받고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는 것도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이 외적인 것으로 영광을 생각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가?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외적인 화려함과 함께 자신에게 그런 화려함이 주어지는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 5절에서는 사마리아 주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라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는 그 우상이 앗수르로 옮겨 야렙 왕에게 예물로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아웬의 송아지를 영광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힘으로 여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드리게 되는 일이 있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6절과 7절의 내용을 보면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모든 영광이 사라질 때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던 것, 그것을 힘으로 여기던 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이스라엘의 계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어떤 일에 대한 계책을 내놓지만, 그리고 그런 계책은 다 자기를 위한 것이요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 부끄러움만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과 같다고 하십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때 부국강병한 나라일지라도, 그래서 영원할 것만 같은 그런 나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시면 물 위에 있는 거품과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그렇게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쫓는 것이 많은 부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집착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온갖 계책을 다 냅니다. 물론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묻기보다는 형식적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헛된 말을 내는 것에 불과하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울 뿐일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세상 이익과 관련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놓고 자신의 계책을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주의 말씀 때문에 낮아지는 것, 주의 말씀 때문에 죽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사실 손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하나님 때문에 낮아지고, 하나님 때문에 죽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말씀을 따르는 쪽으로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말씀을 막지 않도록, 나의 계책이 말씀을 막지 않도록, 나의 어떤 지위가 말씀을 막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영광이 맞물러 있을 때 본성적으로 나의 영광을 위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자기애가 강한 자들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그 영광을 위해서 말씀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로 오시면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인가? 아웬의 산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을 벧아웬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우상의 집으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금송아지 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으로 취급하시고 그것이 곧 너희의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에 거기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죄, 즉 아웬의 산당을 만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아웬의 산당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가 아니라 인간의 고안물은 결국 파괴되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난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아웬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인데, 단지 산당만 파괴되는 정도가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파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좀 더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가?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살아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산이 우리를 덮치고 작은 산이 무너져 거기에 깔려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말씀하신다고 할 때 우리는 속히 거짓된 예배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예배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 우리의 몸을 우상의 집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하고, 혹 우상의 집으로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허물어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 일평생 두 마음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외 다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두 마음이 계속해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싸움 속에서 하나님 편보다는 세상 편이, 재물 편이 승리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받고, 또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복된 길이며, 그 길만이 영광된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