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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211121설교 / 호세아10장9-15절 / 너희묵은땅을기경하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11.21|조회수98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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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0장 9-15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이방신을 섬기 것, 그래서 두 마음을 가지는 것,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해서도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리신 바에 합당하게 섬기지 않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역시 계속해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9절을 먼저 보시면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기브아 시대라 함은 호세아 9장 9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배경이 사사 시대입니다. 한 레위인이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첩을 취한 것, 그리고 그 첩이 음행한 것,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 집으로 갔을 때 레위인이 첩을 데리러 갔다고 기브아의 불량배를 통해 첩이 강간당한 것, 첩이 죽은 것을 통해 열 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각 지역으로 보낸 것, 그 일에 대하여 기브아가 있는 베내만 지파를 다른 지파들이 친 것 등 무엇 하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기브아 시대입니다. 레위인도, 지도자도, 백성도 어느 누구 하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사 시대에 대하여 요약하는 말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시대가 바로 기브아 시대로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범죄 하던 것을 지금까지 동일한 죄를 짓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죄악의 뿌리가 깊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죄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죄악이 있었고,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이스라엘 백성만 생각해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 했다고 알리시는 것은 사람의 죄악이 관영했다고 할 때 그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 기브아 사건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죄악이 그때부터 시작해서 북이스라엘의 멸망 직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번역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전쟁으로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번역하는 것도 있는데, 개역한글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의 시대로부터 범죄하였거늘 무리가 기브아에 서서 흉악한 족속을 치는 전쟁을 거기서 면하였도다” 그러니까 전자는 전쟁이 기브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고 계시다면, 후자는 기브아 시대 때부터 범죄하였으나 그들이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존속된 것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후자의 번역을 따른다면 그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긍휼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했지만, 죄악이 극에 달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고 또 참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0절을 보시면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 번역을 따르자면 하나님께서 전쟁으로 심판하시되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인 개역한글판 번역을 따르자면 죄악의 관영함에도 불구하고 참고 또 참으시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시는 내용입니다.

어떤 번역을 따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브아 시대 때부터 오던 저들의 죄악에 대하여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인데, 언제 심판하시는가?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언제냐 할 때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 만민이 모여서, 마치 전체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친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가지 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세아 3장 5절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악과 다윗 왕가에 대한 죄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스라엘이 벧엘과 단에 둔 금송아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과거 기브아에서 지은 죄와 현재 불의한 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서 전체를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죄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으로 있지만 그분을 버리고 다른 신랑, 다시 말해 다른 신들을 찾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매튜 헨리의 경우는 예레미야 2장 13절로 저들의 죄를 지적하는데, 이것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개인적으로는 예레미야 2장 13절의 내용처럼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만큼은 호세아서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첫 번째 되는 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나는 이웃 사랑의 부재가 아닐까! 즉 두 가지는 죄는 율법이 명하고 있는 바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어쨌든 성경이 두 가지 죄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특별히 만민을 모아 그들을 치게 하시는 중대한 범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미워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죄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 자체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죄에 대하여 곧바로 징계하시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오래 참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종종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34:6)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분으로 계시다는 것 때문에 죄에 대하여 무뎌져도 괜찮고, 죄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오래 참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너희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주실 때가 회개의 기회임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12절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또한 엄중한 심판에 있어서는 결코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있지만, 즉 반드시 있어야 할 일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엄중한 심판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는 자로 있게 됩니다. 왜 그런가? 호세아 10장을 시작하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신앙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이런 저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을 길들인 암소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런 암소인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저들에 대하여 곡식 밟기를 좋아하지만 목에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일에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11절은 곡식 밟는 일과 밭가는 일을 대조시키면서 저들이 길들인 암소라고 할 때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순종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또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북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순종하는 체하지만 멍에를 메고 모든 일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정도로는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다고 하실 때 하나님 편에서 매우 잘 길들인 암소이기에 기뻐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저들의 위선에 대하여 비웃으시는 투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메려고 하지 않는다. 노는 재미로 타작마당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곡식이나 밟고 있을 뿐이다. 밭을 갈아야 하지만 힘든 일에 대해서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길들인 암소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내가 너희 고집을 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라도 목에 멍에를 메우고 밭을 갈고 흙덩이를 깨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운다고 말씀하심으로 여전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위에 사람을 태운다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워 그 위에 태우고 그를 길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사람은 누군가? 앗수르로 해석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여 에브라임의 고집을 꺾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로 해석되는 사람 외에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를 통해서도 저들을 징계하시겠다, 즉 남유다를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 남유다 측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징계의 도구로 남유다를 사용하신다면 자신은 그런 북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들과 동일한 길을 가지 않도록 교훈을 받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지만 남유다의 경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마치 교훈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앞서 언급한 예레미야 2장 13절 말씀을 남유다를 향해 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로 결국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때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처럼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 손에 길들여진 자로 있을 때 거기에 안전이 있습니다. 곡식 밟기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메게 하고자 하는 멍에를 메고 그의 뜻을 따라 밭을 갈고 흙덩이를 깨뜨리게 될 때 거기에 안전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일부만의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뜻에 순종하는 거기에 안전이 있는 것이고, 두 마음이 아니라 온전한 마음인 거기에 안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무엇을 위한 존재를 부르셨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죄를 향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향해 가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죄가 아니라 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1절에서 밭을 가는 것으로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북이스라엘 안에는 공의가 전혀 없고 또한 인애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이고, 단지 회개하라는 정도로만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선고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전히 저들에 대하여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맨 처음 호세아서를 시작할 때부터 알렸던 말씀입니다. 처음에 잠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이후 꽤 긴 내용으로 엄중한 심판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저들에 대하여 포기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전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기 위해서, 다시 말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회개하여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엄중한 심판의 말씀이 있더라도 그런 말씀이 있다는 것 자체가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말씀을 하고 계시는 자체가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12절에서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그들의 과거가 완악한 모습으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들에게 긍휼의 얼굴을 보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할 때 이런 열매들은 누구를 위한 것으로 있는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마5:16).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기 35장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의가 하나님께 무엇을 더하여 드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욥35:6-7 참조).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해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역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선행으로 유익을 얻거나 영광이 더해지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 자체로 영광스러우시고, 영광이 풍성하십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회개하라, 죄를 버리라,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죄에 대한 일차 피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받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그 피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어야 하는데,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바로 우리 자신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로 인애와 관련해 우리가 이웃 사랑의 정신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것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준다고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피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차 피해는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신이 1차 피해자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열매와 관련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그래서 그 사랑의 증거로써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 유익을 받은 사람이 어떤 혜택을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 그 자신이 1차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표현까지 합니까?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또한 묵은 땅을 기경하여 거기에 공의를 심고 인애와 같은 열매를 거두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것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 위해 부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이 돌이켰는가? 묵은 땅을 기경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시면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위해 있어야 할 것이 공의요, 인애라고 말씀하시지만, 북이스라엘이 열매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브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의와 인애를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모든 일의 원인이 무엇인가?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계획, 자신의 힘과 능력 등을 의지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사기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과 능력을 의지하는 그런 교만이 너로 하여금 악을 밭 갈고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자로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7장 10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교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면 돌이켜야 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따라 사람의 매나 인생 채찍을 통해 징계하시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계획과 힘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결코 찾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교만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은 결국 넘어지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계획, 우리의 힘과 능력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되 어떤 영역에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12절에서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하실 때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것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명하시는 바가 있지만 사실은 명하시는 바를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혹 명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에 명하시는 바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명하시는 바는 명하시는 바의 자리가 마땅하기 때문에 명하는 것입니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지면 멀어졌지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땅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명령의 형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다만 명하시지만 명한 바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조차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즉 너희가 지금 어떤 자리에 와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 명령의 형식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의 자리로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만 가능한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내 힘과 내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의뢰해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겸손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두 마음이기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형식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 자신의 힘만을 의뢰하는 그런 자로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계획을 다 더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보다 지혜로운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의 힘을 더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그 힘을 이길 수 없다 하더라도 한분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는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모든 내용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잠언 16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16:18-20) 그리고 그 복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같은 것!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자들,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힘을 의뢰하는 자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무엇인가?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란함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여 그들을 벌하실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산성들이 다 무너진다고 말씀합니다. 즉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 그래서 그것으로 안심하던 것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북이스라엘이 실제로 경험한 전쟁, 살만에셀의 군대를 통해 그 땅이 황폐되고 살육이 벌어졌던 그 일처럼 북이스라엘이 다시금 그런 일을 겪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경험한 바 있다는 것은 그때도 동일하게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통해 경고하신 바가 있었지만 북이스라엘은 그런 경험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저들을 치실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여전히 너희가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 악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은 너희의 큰 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징계의 원인이 너희의 큰 악인데, 구체적으로 벧엘에서의 일이 그 원인으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호세아 10장 5절에서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벧엘에 세운 그 송아지 형상으로 인해, 다시 말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세운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한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왕이 망하는 것은 북이스라엘 전체의 망함과 같습니다. 새벽이라는 것은 한참 잠을 자고 있는 가운데 있을 때 갑작스레 그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어느 날 새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 온데 간데 없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북이스라엘처럼 계속해서 악을 밭 갈고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징계를 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징계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면 계속해서 징계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실 수 없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것을 결코 작은 죄로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교만은 결국 망하고 말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으로 가장한 신을 섬기는 것으로, 나아가 다른 신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인데,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모습이 없는지 살피셔야 합니다. 반드시 예배당 안에 우상을 만들어야지만 저들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할 때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나누게 만들고 두 마음, 세 마음이 되도록 만든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께로만 가야 할 마음이 나누인다면 거기에 교만함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돌이켜야 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할 것이고, 겸손히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마음 가운데 공의가 심기로 인애를 거둘 수 있는 은혜를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를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와 만나주시고 공의를 비처럼 우리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말씀으로 우리를 돌아보면서 겸손히 하나님께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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