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11장 8-11절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지금까지 살핀 호세아서의 내용을 보면 많은 부분이 북이스라엘의 죄를 말씀하시면서 그 죄에 대하여 징계하실 것이요,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엄하게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이후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호세아 11장 12절을 보시면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는 오늘 말씀은 사실 나머지 전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는 말씀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서를 설교하면서 간간이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실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버리는 것처럼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저들을 고치기 위함이요,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영원 전부터 가지신 목적, 즉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하나님을 단순히 엄한 분으로,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혹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쟁이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어떤 행위에 따라 변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효력이 있는 부르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할 때는 효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지만, 외적 말씀으로 부르실 때는 효력이 없는 것처럼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후자의 경우 지상의 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교회 안에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외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그리고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른 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버리시는 일은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 8절을 보시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오늘 본문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부르시지만 그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저들에 대하여 앗수르 사람이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하여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하여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핏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곧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망하고 없어질지라도 그의 택한 백성을 버리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모든 인류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택하셨지만 택하신 원인이 택함을 받은 자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 있는 말씀처럼 아직 나지도 아니한 자들이지만, 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이지만,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서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16절은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아담의 범죄 이후 원죄를 가지고서 태어납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가운데서도 여전히 남아 있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도록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향해 책망하시듯 하는 말씀을 하실 수 있고, 또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북이스라엘이 실제로 망하는 그런 심판을 행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까지 하시느냐? 버리기 위해서냐? 그렇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치기 위함이요,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에베소서 1장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가만히 두고만 보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 안에 부패성이 있는 한 우리 스스로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고, 그래서 누군가의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돕고자 하시는데, 그 방식 가운데 하나가 말씀을 통한 책망이요, 그것에 따른 징계요, 그것에 따른 심판의 역사로 나타나기도 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치고 치료해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의 동맹국들입니다. 창세기 14장 1절과 2절에 보면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1절의 네 나라가 강대국이라면 2절의 다섯 나라는 약소국입니다. 약소국이 12년간 조공을 바치며 섬기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배반하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강대국이 승리를 하면서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추격하여 강대국을 이기고 돌아오는 것이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누가 도움을 받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 그리고 소알입니다. 강대국을 이길 수 없었지만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하는 과정에서 다섯 나라가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라 할지라도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아드마, 스보임에 대하여 말하면서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런 내용으로 봐서는 그들 역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신 경우라면,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내가 저들과 같이 너를 놓는 일이 있느냐? 그들과 같이 그냥 내버려두는 일은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상은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죄를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악의 심각성은 소돔과 고모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보자면 북이스라엘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처럼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지만 지금 하나님은 그 이상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내용이 다윗 언약 안에서 발견되는데, 사무엘하 7장입니다. 13절부터 보시면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7:13-15) 13절에서 ‘그’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나라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내용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는 것인데, 은혜언약의 내용이 여기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언약 때문에 만약 그가 죄를 범하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은총을 빼앗긴 자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유기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리고 그 안에서 은혜의 방편을 누리고 있었지만, 결국 그의 죄로 말미암아 은총이 빼앗기는 모습으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생을 돌아보면 칭찬할만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만 해도 다윗을 따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천 명의 아내를 두면서 아내들이 가지고 온 온갖 우상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그 명성이 먼 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었지만, 죄에 노출되자 그런 지혜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나타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울과 비교해 보면 사실 나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죄만 놓고 보면 솔로몬이 더 심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온갖 우상을 섬기는 죄가 어떻게 낫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은혜언약을 솔로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얼마나 견고한지 온갖 우상을 섬기는 자로 있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서 은총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총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을 통해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시느냐?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살핀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고 있듯이 에서는 미워하신 반면 야곱은 사랑하십니다. 그럼 야곱이 사랑 받을만한 짓을 해서 사랑하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에서보다 야곱이 더 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에서의 경우는 사울과 같이 은총이 빼앗긴 것으로 나타난다면, 야곱에게서는 은총이 빼앗기지 않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은총을 빼앗기지 않았지만 그의 세월은 그 스스로가 고백하는 것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창47: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그를 하나님이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처럼 보이는 결과를 볼 수 있지만 오늘 본문 1절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에게서 하나님이 자신의 은총을 빼앗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소돔도 망하고 고모라도 망하고 아드마, 스보임도 망한 것처럼 북이스라엘도 망하는 형태로 있습니다. 실제 역사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외형은 똑같을 수 있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심판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통해 돌이키도록 하고자 하는 역사로 있는 겁니다. 돌이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게 만들기 위한 역사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본래는 너희 죄로 인하여 책망과 징계와 심판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은총을 더 이상 주지 않는 것으로 있어야 하지만, 그 결과는 영원한 지옥 형벌로 나타나야 하지만, 은혜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으로 내가 너희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도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만 원인을 두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신학적인 이해로 하자면 사실 하나님 안에 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돌이킨다는 표현 자체는 하나님의 속성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 마치 인간의 감정으로 표현하시는 것이 있는데, 지금 이 내용이 그것입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택하신 이상 버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마치 버리신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알리고자 본래는 버려야 하지만 돌이켰다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로 우리를 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죄에 대하여 미워하시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가는 데 방해합니다.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뚝 쳐도 넘어지는 게 우리의 인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영원한 지옥의 형벌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고자 하십니다. 치료하고자 하십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책망하십니다. 책망하시지만 돌이키지 않는다면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드시기도 하십니다. 미워해서 사람의 매, 인생 채찍을 드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에 의하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징계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이런 징계 앞에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마땅히 우리의 죄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징계가 헛되지 않도록 돌이켜야 합니다. 완악한 마음을 계속해서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주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9절을 보시면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사실 이 말씀만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국가는 망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단에게 넘겨주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통해 한 나마라 멸망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그 자리에 가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로 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는 말씀의 내용과 같습니다. 사람은 말한 바에 대하여 변경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약속해도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거짓말 하지 않고, 후회도 없고, 말씀하신 바를 실행하지 않는 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 45절로 하자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너를 거룩하게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맹렬한 진노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그런 일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내가 너희를 바꾸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48장을 보면 우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절 후반부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4절에서는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그리고 8절에서는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저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사48:2). 얼마나 뻔뻔합니까?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서는 너희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온갖 우상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으로만 보자면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들이지만 저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9절부터 보시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9-11) 노하기를 더디 하고, 또 참고 멸절하지 아니한다고 하시지만 연단은 하십니다. 어떤 연단이냐? 고난의 풀무 불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왜 하시는가? 내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 그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엡1:4).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엡1:14).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부패하여 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를 반드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들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연단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고난의 풀무 불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을 들어 우리를 교훈하고자 하실 때 먼저 우리 자신의 죄를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로 인한 책망의 도구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책망에 대하여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무지함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죄를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문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어떠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나와 무관한 말씀은 없습니다. 무관하다고 생각하다면 거기에는 우리의 교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우리는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친히 일하십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또한 내버려두지도 않습니다. 일시적으로는 교훈하시기 위해 죄악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일이 있지만 영원한 지옥 형벌에 이르기까지 하도록 내버려두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총 가운데 머물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면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자처럼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그 말씀이 저들의 귀에만 닿고 말았지만 이제는 그의 말씀이 귀에서 마음에까지 도달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효력 있도록 반드시 역사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효력은 소리를 내실 때 여호와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게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질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부르는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런 말씀 앞에서 안타까운 것을 생각해 보자면 좀 더 일찍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집이, 인간의 완악함이, 인간의 강퍅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였던 겁니다. 이성은 있지만 그 이성으로 하나님께 굴복하기보다는 자기 소견만 내세우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고집을 꺾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책망으로 인간의 완악함을 누그러뜨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징계로 말미암아 인간의 강퍅함을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드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전에는 들려지지 않았던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들어도 자기 생각에는 이렇다고 하면서 말씀을 저울질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책망과 징계와 심판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을 하나님은 본래 그들의 집,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머물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지상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도록 한 것처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도록 하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로 하자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결국 오늘 본문 8절에서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하실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본래부터 주고자 하는 모든 은총의 내용을 주고자 말 것이라고 확고히 하십니다. 이사야 37장 31절과 32절에의 말씀과 같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주의 교회를 향하여, 또한 주의 백성을 향하여 역사하시는 바로 있습니다. 바로 외적으로 들려지는 그의 말씀으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로 그렇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정당한 말씀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책망하시면 우리의 완악함, 우리의 강퍅함이 누그러져야 하지만 그런 책망에도 여전히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자로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완악함을, 우리의 강퍅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북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셔야지만 참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나타나게 됩니다. 이사야 37장 31절에서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고 할 때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것을 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는 내 소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떠한 말씀을 하시든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오늘 본문에 이어 호세아 11장 12절부터 시작하는 내용은 오늘 본문 이전에 있었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나머지 전체의 기본 바탕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반드시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백성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하신다면 이제는 우리 역시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사는가로 그 관심이 옮겨져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호세아 12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