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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210606설교 / 호세아2장14-18절 / 애굽땅에서올라오던날과같이하리라

작성자최성헌|작성시간21.06.06|조회수577 목록 댓글 0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2장 14-18절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지난 시간 언급했던 것처럼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즉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외적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락들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자신을 선물로 주고자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사실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예배의 형식을 취하였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우상에게 예배하는 거짓 예배가 저들의 종교적 모습이었고, 그러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알이라 이름 한 신이 주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컸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내가 준 것을 빼앗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주인인지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부요하게 한다고 생각한 바알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알이 거짓 신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바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들어도 바알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이 먹게 하리라는 모든 말씀은 단순히 벌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회복을 위한 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2장 13절에서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 벌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위로 하겠다,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먼저 1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셨는데 벌을 내리겠다고 해서 강압적으로 자기 백성을 다루시겠다는 그런 뜻이 아님을 여기서 밝히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고 하십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설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데리고 가시느냐? 거친 들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반역적이고 완고한 백성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까?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적이고 완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실 수 없는 겁니다. 벌을 줘서라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벌을 내리시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벌을 내리시지만 저들의 반역과 완고함에 걸맞은 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저들의 반역과 완고함에 걸맞은 벌이 내려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불순종했다고 할 때 모든 인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기에 충분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거기에다 지금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대상으로 있었지만 그런 은총까지 저버리고 있는 상태인데,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영원 전에 저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롬9:11) 선택하셨기 때문에 저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저들의 상태로 보자면 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고, 그러나 저들의 상태에 걸맞은 벌을 내리자면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적당한 벌을 내리십니다.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벌이 어떤 형태로든지 너무 심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신 후에 벌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약한 벌의 경우 돌이키지 않을 만큼 완고하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강한 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심한 벌이 아닙니다. 강한 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벌은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가 받아야 할 벌만큼의 벌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타이르기 위한 도구로 있을 뿐입니다. 설득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려가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 위로하십니다. 무엇으로 위로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즉 외적으로는 거친 들, 광야이지만 거기에 말씀의 위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벌로서 광야가 있다 할지라도 그 광야를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 죽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때문에 죽음을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죽음이 형벌이지만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한 성화와 영화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같은 죽음이지만 한편으로는 벌로써의 죽음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화와 영화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거친 들, 광야가 그렇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이 광야 40년 길을 걷게 되었습니까?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벌로써 광야 40년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한 광야를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는데, 신명기 8장에 의하면 40년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그 길이 훈련의 과정인 것을 말씀하십니다(신8:2-6 참조). 그러므로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벌이 어떤 형태로든지 너무 심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지만 단순히 징계만을 위한 벌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으로 벌을 내리십니다. 저들이 더 이상 징계를 받을만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징계와 벌을 통해 돌이킬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말씀으로 위로를 더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14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내리신 벌은 무엇입니까? 지난주 살폈던 말씀처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도로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곡식도 빼앗고 포도주도 빼앗고 양털과 삼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위로 받기를 원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회복 되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회복케 하실 수 있고, 또 이어지는 15절을 통해 회복케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회복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복락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누구까지 보내셨는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라 하셨는데,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던 겁니다. 요한복음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말씀인 그리스도보다 더 복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위로한다고 할 때 상황이나 환경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거친 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광야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자신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거기서 자신의 말씀으로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상급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조차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사실도 깨닫게 하십니다. 때문에 광야일지라도, 거친 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말씀이 있는 한 위로와 소망, 그리고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 15절에서는 말씀의 위로와 더불어 빼앗겼던 것들도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의 위로 없이 단지 빼앗겼던 외적인 것만 회복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위로를 통하여 누구 주체인지 알지 못하면 벌을 받기 이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위로와 더불어 하나님은 빼앗겼던 것들도 회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은과 금 등 바알이 준 것인 줄 알았지만, 더 이상 바알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줄 알게 하시고 난 뒤 그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에 보면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그것을 다시금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빼앗았지만 그것을 도로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포도원은 한 가지를 통하여 다른 모든 것을 포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본래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의’ 포도원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너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놓치지 말아야 될 사실은 욥기 1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주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신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각자에게 주셨을 때 그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 것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처럼 있는 게 아니라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빼앗았던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어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여러분, 아골 골짜기는 어떤 곳입니까? 여호수아 7장에 의하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간이 죽임을 당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6장에서 여리고 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재물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6장 17절에 의하면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그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보다 훨씬 작은 성,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패배의 이유가 아간의 범죄 때문인 줄 알고 그를 돌리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는데(수7:25-26),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골 골짜기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린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간의 탐심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사실도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간의 탐심으로 그를 죽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징계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형벌로써 죽음을 성도의 성화와 영화의 과정으로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 즉 형벌의 장소를 소망의 문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와 벌이 있을지라도 그의 말씀이 위로요, 그의 말씀이 소망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포도원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말씀만 보시면 안 됩니다. 말씀을 주시는 주체가 누구신지, 그리고 포도원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주체가 누구신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이 우리의 위로와 소망입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위로도 없고, 진정한 소망도 없습니다.

 

이런 소망을 주실 때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번역으로는 응대한다, 대답한다고 되어 있지만 노래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는데, 그때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마치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5장의 내용을 연상하게 하는데, 거기 보면 모세의 노래와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보이이고, 애굽의 거짓 신들과 같이 않다는 것을 확인시키십니다. 그 결과 출애굽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쫓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십니다. 그것을 본 애굽 군사들도 뒤따르게 되지만 갈라졌던 물이 다시금 합쳐짐으로 인해 수장되고 맙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역사를 통해 모세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데, 이 찬송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실 때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노래한다는 것은 이런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출애굽 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 찬송을 올려드린 것처럼 너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한다고 할 때 출애굽 역사가 구원의 시작을 알린다면 여기서는 구원의 모든 과정과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무엇인가? 시작하시는 이가 완성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시작은 하셨는데 완성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면 그 시작은 완성까지를 보장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행하여 너희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기 전에는 아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죄와 악을 향해서만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여 결국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14절의 말씀처럼 타이르시고,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어디에 소망이 있는지 확인시키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시느냐? 1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본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 남편인 하나님을 두고 바알이라는 신과 음행하였습니다. 한번만 음행한 것이 아니라 본 남편을 잊어버릴 정도로 음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하자면 이혼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알을 의지하게 했던 모든 것을 끊으셨습니다. 또한 담을 쌓아 바알에게 가는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징계하심으로 말미암아 누가 본 남편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본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진정 자신의 남편이라고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은 결국 바알을 내 바알이라고 하지 않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정도만이 아니라 바알이라 일컫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고 여전히 바알을 내 바알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진심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만 내 남편이라는 의미이지, 하나님도 내 남편이라는 의미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다른 것은 더 이상 남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17절에 보시면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입에서 제거한다, 기억하여 부르는 일조차 없게 하겠다는 것은 본 남편인 하나님 외에는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신앙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고, 그 사실을 고백하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내가 하겠다고 하십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작하신 하나님이 완성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우리 안에 착한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되었는데, 거기에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지 완성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주 바알을 향해 갑니다. 바알에게 가면 갈수록 바알이 더 큰 존재가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완성할 때까지 그들 마음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일하시되 그의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책망하기도 하시고, 책망과 함께 설득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위로의 말씀으로 주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바알은 무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의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책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징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이 없듯이, 징계와 책망 없는 올바른 신앙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 섬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으로 하자면 하나님과 겸하여 바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완성까지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사실을 이뤄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뢰어야 하고, 하나님 외에 도와주실 분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자기 백성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회복도 있다고 알리십니다. 사실 인간의 죄는 인간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만물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만물의 으뜸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다른 모든 만물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첫 범죄는 이 모든 것을 역순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할 사람은 만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사람의 죄에 대하여 만물을 통하여 징계하기도 하시는데, 본문에서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겠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너희를 대적하던 만물에 대해서도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도 없이하겠다고 하십니다. 평안히 눕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 역시 죄가 하나님 사랑을 파괴했다면 그 죄는 이웃 사랑의 정신도 파괴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이 회복되면 이웃 사랑도 회복이 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없으니 평안이 누울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 땅에 전쟁이 있는지, 그리고 왜 만물 가운데 사람을 대적하여 공격하는 일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자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회복되어야 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오늘 본문 18절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자리와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고서도 음행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고, 또한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두 마음, 세 마음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가시를 두시고 담을 세워 가던 길을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미워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한번 시작하시면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놓는 것은 죄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이루시는 것은 죄가 아닌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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